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58화 (58/241)

#58 흉부외과는 처음이지?(6)

누군가 했더니…….

류명인이다.

하루의 시작이 이 녀석 얼굴을 보는 것이라니!

그것도 샤워실에서.

"제가 전화기 대신 켜 드렸어요. 고맙죠?"

류명인은 히죽 웃었다.

고맙긴 개뿔.

내가 왜 아침부터 네 알몸을 봐야 되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콜폰의 스피커 너머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 참, 전화받는 중이었지.

<인턴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907호 박향기 환자 우징(woozing, 체액이 밖으로 흐름)이 되어서요. 드레싱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금방 갈게요."

나는 재빨리 통화를 끝냈다.

역시 인턴 콜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뛰어 올라갈 수는 없다.

적어도 머리를 헹굴 시간은 필요하니까.

쏴아―

나는 류명인과 나란히 샤워 호스에서 나오는 물을 맞았다.

……이 분위기 어쩔 거야.

어색해 죽겠네.

빨리 끝내고 나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류명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부터 흉부외과 시작이네요."

"응, 이제 출근하나 보다?"

"네."

"일찍 일어났네."

"형이야말로."

말이 묘하게 짧다.

은근히 신경 거슬리게 하네.

뭐, 나도 말 길게 하고 싶은 상대는 아니다.

"먼저 간다. 수고해."

"네. 형도요."

나는 얼른 샤워를 끝냈다.

가능하면 이 녀석과 별로 오래 있고 싶지 않다.

띠잉―

엘리베이터를 타고 암병원 9층으로 올라간다.

아직 이른 새벽이지만 스테이션은 밝다.

나이트(night, 밤 근무) 간호사들이 일을 마무리하는 시간.

조용한 듯하면서, 다들 각자의 일을 바쁘게 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나는 밝게 인사를 건넸다.

밤 동안 마주친 간호사들은 벌써 얼굴이 익숙하다.

물론 처음 보는 간호사들도 있다.

그중 몇몇이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어머, 누군가 했더니 뉴스에 나왔던 인턴 쌤이잖아요?"

"정말이네."

"이번 달에 흉부외과로 오셨구나. 잘 부탁해요!"

다들 기억력도 좋으시네.

방송에 나온 지 한 달이나 지났으니 잊혔을 줄 알았는데.

나는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앞으로 한 달.

간호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특히 외과 계열은 간호사들의 역할이 크다.

의사들의 손이 모자란 만큼, 간호사들이 커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반대로 얘기하면…….

의사인 내가 1인분을 하지 못하면, 간호사들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는다.

‘가만있자. 일단 급한 콜부터 해결해야겠지?’

나는 먼저 콜을 받았던 환자의 드레싱부터 마쳤다.

그리고 스테이션으로 돌아와 의자를 빼고 앉았다.

18명.

오늘부터 나에게 배정된 환자의 수다.

주치의 첫날이라고 환자를 적게 맡는 일 따위는 없다.

의사 생활은 언제나 실전이니까.

‘이 중에 산소부족으로 뇌 손상을 입게 되는 환자가 언제 생길지 몰라.’

나는 주의 깊게 환자들의 리스트를 살폈다.

가슴에 자라난 기형종(teratoma) 제거 수술을 받은 환자.

폐암 수술을 앞둔 환자.

폐농양으로 수술을 한 환자.

양잿물을 마시고 식도가 타들어 가서 식도재건 수술을 앞둔 환자.

등등…….

같은 폐식도 파트라도, 다양하게 고통받는 환자들이 모여 있다.

‘일단 환자 리스트부터 뽑아 놓고 바이탈(vital sign, 활력 징후) 체크하자. 첫날부터 꼼꼼하게!’

지이잉―

프린터가 종이를 뱉어낸다.

내가 종이들을 챙기려고 손을 뻗는 순간.

옆에서 희멀건 손이 하나 다가온다.

"선한이 형."

깜짝이야.

또 너냐?

언제 올라와 있었지?

류명인이 어느새 귀신처럼 내 옆에 나타나 있다.

"이건 제가 뽑은 거구요, 이게 형 거예요."

"……."

"첫날부터 헷갈리시면 안 되죠. 이런 평범한 실수가 나중에 큰 실수가 될 수도 있는 거거든요."

류명인이 빙긋 웃으며 내 종이를 건넨다.

참 희한하다.

분명 웃는 얼굴인데.

그 안에 사사건건 불타는 경쟁심이 느껴진다.

나는 환자 목록을 넘겨받고, 종이에 중요 환자 몇몇을 형광펜으로 표시하며 말했다.

"야, 일 시작하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뭘요?"

"너, 한 달 동안 계속 이럴 거냐?"

내 물음에, 녀석은 순진한 웃음을 짓는다.

"제가 뭘요?"

"자꾸 들러붙으면서 견제하잖아."

"제가요?"

"말 돌리지 말고."

스윽―

나는 여유롭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녀석을 쳐다보았다.

기선제압.

경험상, 이런 타입은 초반에 눌러 놓아서 가면을 벗겨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가 편해진다.

"너 학부 때부터 유명했다며? 한 번 경쟁 타깃으로 삼으면 상대방 진저리 날 때까지 견제한다고."

움찔―

녀석의 표정이 굳는다.

가면 아래 있던 표정이 드러나는 것 같다.

너무 돌직구였나?

나는 픽 웃으며 말했다.

"뭐, 네 성격이 어떻든 내가 알 바는 아닌데…… 왜 수많은 인턴들 중에서 굳이 나를 견제 대상으로 삼은 거냐?"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일운대 출신이다.

물론 강남역 사건으로 반짝 유명세를 얻긴 했지.

하지만, 기본적으로 출생은 변하지 않는다.

이곳 연국대병원에서 나는 조금 별난 이방인에 불과하다.

반면 류명인은 다르다.

연국대 순혈.

초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인물.

학과 안에서도 톱을 다투는 성적을 자랑한다.

게다가 나이까지 어리니, 장래가 탄탄대로로 펼쳐져 있다.

그런 녀석이, 집요하게 나를 견제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외과 계열 지망이야. 네가 어느 과를 목표로 삼든지 나랑 부딪힐 일이 없을 텐데?"

그러자 마침내 솔직해진 류명인의 입이 열린다.

"올해의 인턴."

"뭐?"

"올해의 인턴은 딱 한 명만 뽑잖아요. 저는 1등으로 인턴 수료 못 하면 미쳐 버릴 것 같거든요."

와…….

대충 예상하긴 했는데.

정말 그런 이유였구나.

류명인이 지독한 경쟁 중독자라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1등을 하고 싶어서 나를 이겨야겠다?"

"예."

"솔직해서 좋네."

"형이 솔직하게 물어봤으니까요."

"그런데 올해의 인턴이 목표라면 이렇게까지 오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올해의 인턴>은 대대로 연국대 출신에게 주어진다.

타 대학 출신이 받는 경우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알고 있다.

"어차피 지방대 출신에 평범한 나보단, 연국대 엘리트인 네가 뽑힐 확률이 훨씬 높지 않을까?"

그러자 류명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저는 형이 평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뭐?"

"형한테서는 냄새가 나거든요."

무슨 냄새?

나는 내 옷소매를 킁킁거렸다.

옷 세탁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어지는 말이 가관이었다.

"저는 연국대 최고의 의사가 될 거거든요. 그리고 왕좌에 오를 사람은 경쟁자를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법이죠."

으악, 내 손발!

중2병이냐?

이 친구, 만화를 너무 많이 봤네.

가면 뒤에 숨겨진 얼굴이 고작 중2였다니!

나는 한없이 오그라드는 손을 겨우 펴고 뒷목을 벅벅 긁었다.

"네가 연국대 왕이 되든 해적왕이 되든 상관 안 할 테니까 귀찮게 굴지만 마라. 서로 할 일이나 잘하자고. 오케이?"

"네, 그럴게요."

류명인은 의외로 선선히 대답했다.

참 희한한 놈이다.

저런 말을 진지하게 하는 녀석이라니, 내가 다 부끄러워진다.

"아 참, 송유주 선생님 말인데요."

송유주 선생은 왜?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류명인이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그분도 왕위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신 분이죠. 제 본능적인 촉이 발휘된달까? 후후후."

그만해, 이 자식아!

증2병 말기냐?

나는 아예 의자를 돌려 버렸다.

저놈 얘기를 계속 듣고 있다간 내 손발이 모조리 닳아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헛소리에 장단 맞추지 말고, 내 할 일이나 집중하자.

* * *

<바이탈 사인>.

한글로는 활력 징후.

한 사람의 생(生)과 사(死)에 가장 중요한 4가지를 의미한다.

1번, 혈압.

BP(Blood Pressure)라고 줄여서 표현한다.

수술 후에 혈압이 떨어지는 원인은 수십 가지다.

어쨌든 일정 혈압 이상은 유지해야 몸에 피가 도니까, 혈압이 떨어지는 원인을 찾아서 고쳐 줘야 한다.

너무 많이 떨어진다고?

그럼 그게 바로 CPR 상황이다. 병원에 방송 울리며 난리 나는 그 상황.

2번, 맥박수.

HR(Heart Rate)라고 줄여서 표기한다.

이건 너무 빨라도, 너무 느려도 문제다.

또 규칙적으로 뛰어야 하는 놈이 불규칙하게 뛰어도 문제가 된다.

이걸 ‘부정맥’이라 하는데, 흉부외과 수술 후에는 부정맥이 흔하다.

3번, 체온.

BT(Body Temperature)라고 줄여서 표기한다.

다들 알다시피, 열이 나는 건 우리 몸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다.

앞으로 그 문제가 심해질 수 있으므로,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4번, 호흡수.

RR(Respiratory Rate)라고 줄여서 표현한다.

사람의 정상 호흡수는 분당 20회까지다.

만약 이게 더 빨라지면?

그 사람의 폐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다.

이와 같은 바이탈을 다루는 과를 병원에서는 메이저(major) 과라고 표현한다.

그중에서도, 이곳 흉부외과는 바이탈의 ‘끝판왕’이라고 볼 수 있다.

‘가만 보자…… 이 환자는 평소 고혈압 약을 먹던 환자인데도 오늘 아침 혈압이 너무 낮은데? 혈압 낮추는 약 다시 먹기 시작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건 노티(notify, 알림) 해야겠다.’

나는 환자 리스트에 바이탈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지난밤 저혈압 이벤트는 없었는지, 부정맥은 없었지, 또는 열이 나는 이벤트는 없었는지…….

이처럼 환자들의 바이탈을 체크하는 것은 회진 준비의 첫 번째 코스다.

"안녕하세요!"

그때, 류명인이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터벅터벅―

송유주 선생님이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스테이션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오늘도 무뚝뚝한 표정이다.

그나마 아침부터 입에 막대 사탕을 물고 있다는 점이, 유일하게 인간미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존경하던 선배님 밑에서 배우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류명인이 싹싹하게 말한다.

저 자식, 애교도 부릴 줄 아네.

그것도 꽤 능숙한 말투다.

그런데 정작 송유주 선생의 대답이 의외였다.

"너, 나 알아?"

"예?"

"뭘 안다고 존경이야."

싸아아.

차갑다.

말에 얼음이 끼어 있는 느낌이랄까.

순간, 흉부외과 스테이션의 계절이 바뀌어 겨울바람이 부는 착각마저 든다.

류명인은 적지 않게 당황한 눈치다.

"그야 연국대 의대에서 선배님 모르는 후배는 없죠. 워낙 전설적인 분이니까요."

"제일 중요한 얘기는 못 들었나 보네."

"어떤……?"

"내가 쓸데없는 아부 싫어한다는 거."

"……."

"앞으로 일과 관련 없는 쌉소리는 하지 않는다."

"예."

류명인은 깨갱 하고 입을 다문다.

본전도 못 찾았군.

왠지 기분이 상쾌해진다.

속이 뻥 하고 뚫리는 소화제를 먹은 기분이다.

"환자 체크부터 해 볼까?"

드르륵―

송유주는 이동식 의자 하나를 잡아 끌어오더니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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