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흉부외과는 처음이지?(5)
달칵―
문을 닫고 책상 앞에 앉았다.
한바탕 몸을 움직이고 왔더니 정신이 또렷해진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사락―
노트를 꺼내 펼쳤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지만, 역시 생각을 정리할 때는 아날로그적인 종이와 펜이 가장 좋다.
‘삼수생 시절 생각나네.’
생각해 보니 고시원 책상이 딱 이런 느낌이었다.
목표를 향해 무작정 달리던 시절.
책상 앞에는 라고 써 붙인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수능 영단어를 공부할 때 가장 좋아했던 단어.
한글로 하면 ‘근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끈덕지게 공부했던 시절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물론 그때에도 마음속 한구석은 언제나 불안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괜히 헛수고를 하는 건 아닐까?>
<내가 이렇게 용을 쓴다고 무언가가 바뀌기나 할까?>
등등…….
스스로에 대한 의심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한번, 그때처럼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다.
<내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바로 이럴 때 필요한 게 근성이다.
뭐든 집요하게 잡고 늘어지면 어떻게든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좋아. 해 보자!"
나는 팔을 걷었다.
일단 첫 번째 단서부터.
꿈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려 보자.
분명 송유주는 담배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뇌 손상이라……."
사락, 사락―
나는 전공서적을 넘기며 메모를 시작했다.
성인 뇌의 무게는 1.2~1.4킬로그램.
전체 몸무게의 2.5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조직이다.
그런데, 혈류량 중 20퍼센트 이상이 뇌로 향한다.
즉 우리 몸에 필요한 산소의 20퍼센트 이상을 뇌가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엄청나게 탐욕스러운 녀석이라고 할 수 있지.’
만약 그런 뇌에 산소공급이 끊긴다면?
금방 망가지고 만다.
즉 환자가 일정 시간 동안 숨을 쉬지 못하면 그것만으로도 뇌 손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4분>.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을 때 손상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손상된 뇌는 영원히 복구가 불가능하다.
단 4분의 시간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지가 마비되거나 인지장애, 실명 등등…….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고, 심하면 사망까지 간다.
‘일단 저산소증으로 뇌 손상이 가능한 케이스를 정리해 보자.’
나는 전공서적을 계속해서 넘겼다.
그리고 잠시 후.
신경질적으로 펜을 돌리다가 책을 집어 던질 뻔했다.
"젠장. 가능한 케이스가 너무 많잖아?"
내가 일하게 될 곳은 <흉부외과 폐식도 파트>다.
폐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당연히 산소수치가 떨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겠지.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나 다름없다.
그런데, 가만있어 보자.
언제 어디서든 산소공급이 가능한 이 병원에서 저산소증이 온다?
그것도 뇌 손상이 올 정도로?
이건 CPR이 발생해서 뇌에 산소를 공급해야 할 심장이 멈춰 버리는 상황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일부러 산소공급을 멈춰 버린 경우이거나.’
나는 이마를 짚었다.
생각이 생각을 낳는다.
수많은 가능성들이 나뭇가지처럼 뻗어 간다.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역시 첫 번째 단서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하지만 두 번째 단서까지 포함한다면 어떨까?’
두 번째 단서.
송유주 선생의 말을 떠올려 보면, 사고가 일어나는 시점을 대략 추측할 수 있다.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하필이면 레지던트들이 전부 수술방에 들어가 있고 병동에 인턴들만 남았을 때 벌어진 일이라…….>
그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냐고?
물론 가능하다.
왜냐하면, 흉부외과니까!
항상 인력이 부족한 곳이라 가끔 병동이 빌 때가 있다는 연서의 말이 떠올랐다.
<가끔 흉부외과가 무의(無醫)촌처럼 될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는 인턴들끼리 판단하고 해결해야 돼요.>
<무의촌?>
<네. 레지던트 선생님들은 반쯤 농담 삼아 흉부외과 병동은 가끔 무의촌이 된다고 표현하더라구요.>
웃기면서도 서글픈 얘기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아무튼, 지금까지의 결론은 이거네."
나는 노트를 덮었다.
두 가지 단서를 조합하면, 결국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병동에서 모든 레지던트들이 자리를 비울 때, 저산소증 환자를 조심하자!>
물론 정보는 한참 부족하다.
어떤 환자에서 어떻게 저산소증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대략이나마 계획을 세우니 마음은 그나마 편해졌다.
다만…….
여전히 신경 쓰이는 건 류명인이다.
녀석이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니, 그날이 오면 조금도 방심하지 말자!
* * *
6월 1일.
흉부외과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회진 도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는 줄 알았지?
나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흉부외과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선한, 안 자냐?"
"자기는. 이제 곧 근무 시작인데. 준비 단단히 하고 있어야지."
"뭐? 벌써부터?"
근욱이는 숙소 2층 침대에 누운 채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 11시 58분.
"에이. 아무리 그래도 밤 열두 시부터 콜이 오겠냐? 아무리 흉부외과라도 그렇지."
근욱이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
따르르르―
밤 12시.
땡 하고 자정이 지나는 순간부터, 콜폰이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근욱이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나는 거 보라는 듯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예, 인턴 신선한입니다."
곧 전화기 너머에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두근, 두근.
드디어 흉부외과 첫 콜이다.
그런데…….
이건 지난 3달간 울렸던 콜과는 너무 다르다.
"선생님 황준규 환자 열감 있어서 열 재 봤더니, 37.9℃네요. 어떻게 할까요?"
엇…….
순간 말문이 막힌다.
나에게 판단력을 요구하고 있다.
이전에 받았던 인턴 콜들은 주로 명령 위주의 콜이었다.
누군가가 임무를 주면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피를 뽑든가, ECG를 찍든가, 드레싱을 하든가…….
즉, 내 판단력이 필요한 부분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주치의로서 받는 콜들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어……."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물론 난 분명 알고 있다.
열이 나는 환자에게 어떤 감별진단(differential diagnosis)이 필요한지.
그래서 어떤 검사를 하거나, 어떻게 해 주어야 하는지.
그런데, 교과서에 나오는 피버(fever, 열)의 감별진단은 수십 가지 진단명이 따라온다.
당장 이 환자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데, 입에서 무언가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러자 폰 너머에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RUL Lobectomy(우상엽 폐엽절제술) POD(수술 후) 3일째 환자예요. 항생제는 기본으로 쓰는 세포테탄(cefotetan) 쓰고 있구요. 나이도 51세로 젊고, 다른 기저질환은 없는 환자예요."
역시 간호사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
그래서 주치의를 처음 하게 된 나 같은 인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간호사의 말이 이어진다.
"그냥 지켜보면서 렁 케어(lung care, 호흡 관리) 시킬까요? 30분 있다 다시 재 볼까요? 아니면 컬처(culture, 혈액배양검사) 하고 항생제 바꿀까요?"
이런 친절한 간호사 선생님을 보았나…….
나에게 선택지를 주고 있다.
나는 선택만 하면 된다.
게다가 그 선택에 필요한 기본 정보까지 다 읊어 준다.
나는 간호사가 알려 준 보기와 인계장에서 봤던 내용들을 참고하여 대답했다.
"일단 POD 3일째니까, 렁 케어 하면서 30분 있다가 다시 열나는지 체크해 볼게요. 그때도 열나면 컬처 하고 안티(anti, 항생제) 타조신으로 바꿀지 다시 결정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면 무난하게 첫 프라이머리 콜을 해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신이 번쩍 든다.
‘이래서 연서가 쉽지 않다고 했구나.’
이후에 열이 지속된다는 노티가 있었고, 결국 나는 컬처 오더를 내었다.
이전 달 같았으면 주치의가 오더를 내고, 담당 인턴이 컬처를 시행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오더 내면 누가 해 주지?
당연히 내가 직접 한다.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인턴 주치의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첫날부터 느낌이 확 다르네.’
물론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날 밤, 그 뒤에도 몇 번의 전화가 더 울렸다.
"선생님. 전상욱 환자 BST 220 나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선생님. 이승찬 환자 주무시는 동안 세츄레이션 91 체크되는데 어떻게 할까요?"
모두가 나를 고민에 빠지게 하는 콜들이었다.
전화를 받고 뭔가를 찾아보거나 누군가에게 물어볼 시간을 주지 않는다.
간호사는 내가 답을 주기까지 끊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이제 시작이구나.’
마동섭은 분명 인턴생활이 튜토리얼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데…….
튜토리얼부터 벌써 쉽지 않다.
굳이 게임에 비유하자면 나는 아직 레벨 10인데, 레벨 20짜리 던전을 돌기 시작한 기분이다.
‘차라리 잘됐어. 일찍 경험할수록 레벨업도 빠르겠지!’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의욕이 샘솟는다.
오롯이 내가 판단하고 내가 책임진다는 것.
독립적인 의사가 되어 가는 과정, 그 첫 번째 입구에 비로소 들어선 느낌이었다.
* * *
삐비빅―
삐비빅―
알람이 울린다.
새벽 5시 반.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2층 침대의 천장이 이제는 익숙하다.
"쿠르르르르―"
근욱이는 아직 2층에서 자고 있는 모양이다.
굴삭기 소리처럼 우람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중간에 콜을 받느라 몇 번 깨서, 내가 잠을 잔 건지도 애매한 몽롱한 상태에서 새벽 5시 반을 맞이했다.
"다 합치면 한 3~4시간 잤나."
나는 졸린 눈을 비볐다.
역시 연서의 말이 맞았군.
마음 같아서는 몇 분이라도 더 눈을 붙이고 싶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첫날이니까 성실한 모습을 보여야겠지."
영차!
나는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송유주 선생님과의 회진은 새벽 6시 반.
연서 말로는 30분이면 회진 준비는 가능하다고 했지만, 오늘은 첫날이니만큼 한 시간 일찍 일어났다.
샤워실로 향했다.
옷장에 콜폰을 놓아두고 샤워기의 레버를 당겼다.
막 온몸에 물을 끼얹기 시작하던 찰나.
따르르르―
콜폰이 울린다.
샤워를 하는 중에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나는 물을 뚝뚝 흘리며 잠시 옷장으로 이동해서 콜폰의 바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물이 묻은 손 때문에 핸드폰은 나의 터치를 인식하지 못했다.
‘어휴. 손이라도 닦아야겠다.’
옆에 비치된 수건에 손을 뻗으려는 찰나.
누군가 내 폰에 터치를 하더니 스피커폰 버튼을 눌러 주었다.
"네, 인턴 신선한입니다."
나는 대답을 하면서 얼굴을 살짝 들었다.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들이 눈에 들어와 시야가 흐렸지만, 뿌연 내 눈앞에 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