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흉부외과는 처음이지?(4)
잠깐.
방금 류명인이 한 말…….
뭔가 중요한 힌트였던 것 같은데?
녀석의 말이 이어진다.
"그러게 남들이 고르기 전에 빨리 고르지 그랬어요? 선한이 형도 마동섭 선생님 파트로 왔으면 한 달 동안 아무 일 없이 평탄했을 텐데."
아하.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가 사다리 타기에서 타노스를 골랐기 때문에 이 꼬라지가 된 거란 말이지?
이건 꼭 기억을 해 둬야겠다.
"그나저나 아쉽네요. 제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형 도와드릴 수 있었을 텐데…… 저라면 환자를 그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듯?"
아, 거참.
더럽게 깐죽대네!
입 좀 닥쳐 줬으면 좋겠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꿈속의 내가 드디어 입을 연다.
"신경 긁지 말고 꺼져."
내 목소리가 이랬던가?
제3자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관찰하니 무척 낯설다.
아무튼 내 말투가 험악해지자, 류명인이 한 걸음 물러나며 어깨를 으쓱인다.
"뭐, 너무 공격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저는 그냥 형을 위로하려고 하는 거……."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파앗―
나는 다시 현실로 빠져나왔다.
* * *
스윽―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시야가 맑아진다.
마치 얼음땡을 하는 것처럼,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움직인다.
"왜 그래요?"
류명인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재수 없는 놈.
나는 주먹을 들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담았다.
아무리 그래도, 꿈속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사람을 팰 수는 없잖아?
아직 회의 중이기도 하고.
‘아무튼, 그건 그거고.’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오히려 류명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내가 얻은 정보들을 침착하게 정리해 보자.
‘첫째. 내가 지금 타노스를 고르면…….’
송유주 파트로 가게 된다.
그러다 환자를 중태에 몰아넣는 사고에 휘말린다.
물론 구체적인 상황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여러모로 가시밭길이 펼쳐질 것만은 분명하다.
‘둘째. 내가 스파이더맨을 고르면…….’
평탄한 생활이 보장된다.
마동섭 파트에서는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고 하니까.
게다가 마동섭 선생은 왠지 모르게 나를 꽤 좋아하는 듯하다.
아마 인턴평가를 좋게 받을 수 있는 확률도 높겠지.
"자, 누가 먼저 고를래?"
탕탕―
마동섭이 벽면의 화이트보드를 두드리며 말한다.
나는 다른 사람이 고르기 전에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먼저 고르겠습니다."
"오, 그래."
나는 입을 열려 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동섭 파트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선택하려니 고민에 빠졌다.
‘잠깐만.’
멈칫―
나는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내가 마동섭 파트로 가게 되면…….
환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미래에 뇌 손상을 입고 중태에 빠지게 되는 환자 말이다.
‘만약 내가 다른 파트로 가면, 그 환자의 미래는 과연 좋은 방향으로 바뀔까?’
분명히 꿈속에서 마동섭은 말했다.
<어떤 인턴을 앉혀 놔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즉 내가 사건을 회피한다면, 환자의 운명을 바꿀 방법은 아예 없어질 확률이 높다.
‘어떻게 할까?’
지금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위험을 피해 가거나.
혹은 정면으로 돌파하거나.
‘……재밌네.’
나는 문득 피식 웃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시험을 내리는 기분이다.
<너 이번에도 미래랑 싸워서 이길 수 있겠어?>
<자신 없으면 피해 가든가?>
이렇게 묻는 듯하다.
그렇다면 나의 대답은 명확하다.
"타노스 고르겠습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보라색 캐릭터를 지목했다.
그러자 마동섭이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타노스?"
"예. 개인적으로 히어로보다 빌런을 더 좋아해서요."
"의외네."
마동섭은 고개를 갸웃대며 보드에 내 이름을 적었다.
물론 이 선택지가 가시밭길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택했다.
왜냐고?
도망치기 싫으니까.
일종의 고집이라고 해야 할까…….
승부욕? 자존심?
아무튼 겁쟁이처럼 피하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주사위는 던져졌어. 이렇게 된 이상 미래를 바꿔 보자!’
미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그런데, 그때.
상상치도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갑자기 류명인이 손을 들고 말한 것이다.
"그럼 저는 토르 고를게요."
응? 잠깐.
네가 왜 토르를 골라?
분명 꿈속에서는 스파이더맨을 골랐다고 했잖아!
"오케이. 류명인은 토르고."
탁, 탁.
마동섭이 보드에 녀석의 이름을 적는다.
곧 우리 인턴 4명은 각자 캐릭터 선택을 마쳤다.
"자. 그럼 사다리 타기 시작!"
마동섭이 마커를 들었다.
쓰윽― 쓰윽―
위아래 일자로 그어져 있던 수직선 사이사이에 수평선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사다리 타기가 시작되었다.
"타노스부터 가 볼까?"
찌익―
마동섭은 마카를 들고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나는 긴장 어린 눈빛으로 사다리를 따라갔다.
‘이거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설마 결과도 달라지는 건가?’
처억―
예상대로 타노스에서 시작된 사다리는 송유주 파트에 도착했다.
그러자 마동섭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오케이. 신선한은 송유주 파트 당첨이고……. 그리고 그다음은 류명인 가 볼까?"
찌익―
토르의 얼굴로부터 선이 내려온다.
마커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복잡하게 내려오다가 목적지에 도착한다.
송유주 파트다.
젠장!
나와 같은 파트라니.
아니나 다를까, 미래가 달라지고 말았다.
"오, 이렇게 되면 나머지는 자동 결정이네."
나머지 캐릭터들도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갔고, 곧 파트가 나뉘게 되었다.
[송유주 파트]
―신선한, 류명인
[마동섭 파트]
―손지민, 안철민
"자, 그럼 수고하고. 내일부터 잘해 보자!"
"예!"
"해산."
마동섭과 송유주의 말에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잠시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류명인과 내가 같은 조라니,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선한이 형, 결국 저희 같은 조 됐네요."
류명인이 웃으며 다가온다.
머리가 혼란스럽지만,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넌 스파이더맨 고르려던 거 아니었어?"
"어라,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원래 스파이더맨 고르려던 거."
아차.
나도 모르게 꿈에서 본 내용을 말해 버렸다!
나는 얼른 둘러댔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 넌 근육질 히어로보다는 머리 좋은 천재형 캐릭터를 좋아할 것 같았거든."
그러자 류명인은 씩 웃었다.
"사실 그러려고 했는데, 형이 자신 있게 타노스 고르는 거 보고 마음이 바뀌었어요."
"왜?"
"영화 보면 타노스랑 제일 멋있게 싸우는 게 토르잖아요."
참 나.
타노스 잡는 건 토르라 이거냐?
상상도 못 한 이유였지만 어쨌든 납득은 갔다.
‘결국 내 행동 때문에 미래가 바뀌었다는 거네.’
원래대로라면, 나는 대충 마지막에 남는 캐릭터를 선택했을 것이다.
어느 파트로 가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적극적으로 움직인 탓에 미래가 미묘하게 바뀌어 버렸다.
‘이건 미처 예측 못 했는데…… 앞으로는 미래를 바꿀 때 좀 더 신중해야겠구나.’
문득 <나비효과>라는 용어가 떠올랐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토네이도처럼 변할 수도 있다는 이론이다.
"그럼 한 달 동안 같이 잘해 봐요!"
뚜벅, 뚜벅.
류명인은 미소를 짓고 복도를 걸어 사라졌다.
내가 만든 작은 변화가 어떻게 나비효과처럼 작용할지 모르겠지만…….
"뭐, 오히려 잘됐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어차피 내 목표는 단순하니까.
<내 실수로 중태에 빠지게 되는 환자의 미래를 바꾼다>!
그것만 생각하면 된다.
류명인?
좀 귀찮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방해가 될 것 같다면?
찍어 눌러 주면 그만이다.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 같다.
* * *
"배에 힘 꽉!"
"시선 45도 아래!"
"스쿼트!"
근욱이가 외친다.
나는 어깨로 바(bar)를 들어 올렸다.
으악!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밀어 올려! 더! 더!"
그렇게 말하며 근욱이가 나를 다그친다.
헬스장에서 근욱이는 성격이 평소와 달라진다.
불이 붙는다고 해야 하나?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엄한 강사로 돌변한다.
"신선한, 벌써 지치면 어떡해!"
"근욱아. 생각해 보니 의사에게 허벅지 근육이 꼭 필요할까?"
내가 부들대며 물었다.
그러자 근욱이가 어림도 없다는 듯 말했다.
"의사이기 전에 남자는 무조건 허벅지가 두꺼워야 돼! 엉덩이 더 내려!"
지난 강남역 사건 이후, 녀석은 틈만 나면 헬스장에서 나를 볶아 대었다.
그때 내가 왜 근욱몬에게 트레이닝을 받겠다고 했을까?
후회막심이다.
이런 걸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라고 해야 할까.
결국 나는 중량 스쿼트를 10개 더 한 뒤에야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좋았어. 5분 휴식!"
"휴우."
털썩―
나는 근욱몬에게 잠시 해방되어 헬스장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평소에 안 쓰던 근육을 썼더니 죽을 맛이다.
"하루 종일 서 있으려면 코어 근육이 중요하다고. 특히 장시간 수술하는 써저리과(surgery, 외과 계열)를 노린다면! 미리부터 몸 안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고생할걸?"
근욱이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사실 조목조목 맞는 말이라 반박도 할 수 없다.
그냥 트레이너님께서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수밖에.
"아무튼 생각보다 꾸준히 따라오는 모습이 보기 좋구만. 다음 주에도 계속 하는 거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아마 당분간은 하고 싶어도 못 할 거다."
"왜? 운동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게으름 피우려고?"
"나 내일부터 TS(흉부외과) 돌잖아."
"아아. 맞다."
근욱이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한 핑계를 대면 무시하려 했는데…… 흉부외과면 어쩔 수 없지. 앞으로 얼굴 보기도 힘들겠구만."
근욱이도 순순히 인정했다.
흉부외과에 들어간 이상, 한 달 동안 나는 숙소에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이다.
문득, 근욱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흉부외과는 인기 없는 과니까 오히려 인턴들 편하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나 같으면 살살 구슬려 가면서 잘 대해 주겠다."
"그렇지도 않대."
"왜?
"어차피 잘해 줘 봤자 안 오니까. 그냥 부려 먹을 수 있을 때 실컷 부려 먹는다고 하던데?"
"푸핫."
근욱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피식 웃으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무튼 나는 여기까지 하련다. 당장 몇 시간 후부터 근무인데 체력 아껴야지."
"그래, 먼저 올라가라."
"너는?"
"난 이제부터 시작이지! 아직 근섬유에 기별도 안 갔다."
근욱이는 나를 내버려 두고 운동을 시작했다.
후욱, 후욱!
내가 들던 바에 몇십 킬로그램 원판을 더 얹어서 들어 올리고 있다.
괴물 같은 놈!
저것이 과연 사람인가?
혹시 인간 모양의 펌프가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픽 웃고 헬스장을 빠져나왔다.
‘아무튼, 이제 곧 시작이구나.’
흉부외과 근무 시작까지 3시간 남았다.
앞으로의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숙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