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54화 (54/241)
  • #54 흉부외과는 처음이지?(2)

    "연서야, 너……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

    오랜만에 본 연서는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이다.

    피곤해서 튼 입술.

    핏기 없는 볼.

    구겨진 옷.

    그리고 정돈되지 않은 머리까지.

    "너 못 본 사이에 좀……."

    "왜요, 꼬질꼬질해졌다구요?"

    "아니, 뭐."

    나는 말끝을 흐렸다.

    언제나 CF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외모를 유지했던 연서.

    그런데, 한 달 사이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이온 음료 광고를 찍던 연예인이 정글 탐험 예능을 찍고 온 것 같다.

    "그러게 아까 말했잖아요. 제 몰골 보고 놀리지 말라니까."

    "이제 좀 사람 같고 보기 좋네 뭘."

    "됐네요. 이제 와서 그래 봤자 늦었거든요?"

    연서는 입술을 삐죽였다.

    "선한 오빠도 흉부외과 한번 돌아보시면 이해하게 될 거예요. 아~ 그래서 그때 연서가 그 모양 그 꼴이었구나, 하고."

    연서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얼마나 힘들었길래?

    잠시 후, 우리는 병동 스테이션의 한쪽 컴퓨터 앞에 앉아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계장은 다 읽어 봤죠?"

    "응. 우리가 주치의까지 해야 한다면서?"

    "맞아요."

    "재밌겠다. 이제 드디어 진짜 의사가 되는 기분이네."

    내 말에 연서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이다.

    "재미라뇨. 여기 환자들 오빠만 쳐다보고 있다니까요? 무슨 일 있으면 여기 스테이션까지 찾아와서 말한다구요. 부담감 장난 아니에요."

    <주치의>.

    환자를 전담하여 온전히 책임지는 의사를 뜻한다.

    보통은 인턴을 수료한 뒤 레지던트 1년 차부터 주치의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흉부외과는 특이하게도 인턴들에게 병동 주치의를 맡긴다.

    다른 과에서는 보통 레지던트가 되어서야 할 수 있는 일을 인턴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물론 인력난 때문이다.

    "흉부외과는 환자 수에 비해서 전공의 선생님들이 정말 적거든요. 그래서 병동 환자들은 우리 인턴들이 알아서 판단해야 되는 경우가 많아요."

    "스릴 있겠네."

    "어휴, 막상 겪어 보면 식은땀 날걸요?"

    연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우리 인턴들도 의사자격증이 있는 엄연한 의사다.

    하지만, 고작 한 달 돌고 사라지는 인턴들이 주치의라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은, 연국대병원의 20여 개 과들 중에서 오직 흉부외과가 유일하다.

    ‘주치의 경험이라…….’

    벌써부터 긴장이 된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만큼 두근거리기도 한다.

    내 의사로서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야 하는 시험대가 될 것 같으니, 마음속에서 도전욕이 샘솟는다.

    "잠은 몇 시간씩 잘 수 있는 거야?"

    "가만 보자…… 첫 주에는 3~4시간 정도 잔 거 같은데요?"

    3~4시간이라.

    딱 예상했던 만큼이다.

    흉부외과에서 넉넉한 수면 시간을 가질 거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1주 지나면 적응해서 할 만해요. 그런데 환자 갑자기 몰리면, 적응이고 뭐고 이 병동의 살아 있는 지박령 되는 거예요."

    연서가 힘없이 웃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흉부외과 인턴들이 왜 숙소에서 잘 보이지 않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주의해야 할 점이……."

    연서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집중해서 연서의 말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메모했다.

    그런데 문득 연서의 옷차림을 보니 수술복 위에 가운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다.

    "혹시 인턴들도 수술방에 들어가는 거야?"

    반쯤 기대하며 물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수술방에 들어가는 경험을 해 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아뇨, 내과 돌 때처럼 가운 안에 셔츠 입으면 불편해서 여기서는 일 못 해요. 며칠 일해 보면 알 거예요. TS(흉부외과) 인턴들이 왜 편한 수술복만 입고 사는지."

    곧 연서의 푸념이 이어졌다.

    "수술복도 매일 갈아입으면 다행이죠…… 저랑 같은 파트 도는 동기는 이틀 전에 수술복 위에 묻었던 고춧가루가 오늘도 같은 위치에 있던데요?"

    그 정도라고?

    기가 막혔다.

    얼마나 정신이 없으면 새로운 수술복 꺼내서 갈아입을 시간도 없을까?

    그렇게 연서의 말을 듣고 있을 때.

    어쩐지 주위가 조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스테이션을 둘러보니, 나와 연서 말고 간호사들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

    ‘……뭐지, 이 불길한 정적은?’

    잠시 후.

    스테이션 뒤, 처치실 쪽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사람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 사나운 목소리였다.

    "야 안경식! 너 내 환자 이제 보지 마!!"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오더야? 어?!"

    우당탕탕!

    물건들이 서로 부딪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갑자기 귓전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슈웅―

    ……방금 뭐가 날아온 거지?

    연서와 나는 동시에 바닥을 바라보았다.

    드레싱 세트에 들어 있는 핀셋이 스테이션까지 날아와 바닥에서 또르르 돌고 있다.

    나와 연서는 눈을 마주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엉?!"

    그 와중에도 다그치는 목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나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조용히 물어보았다.

    "무슨 소리야, 이거?"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요."

    "탈곡기?"

    "한상기 교수님인데…… 우리는 다 탈곡기라고 불러요."

    연서가 어깨를 움츠렸다.

    "저는 다행히 다른 교수님 파트여서 겪어 보지는 못했는데, 화내실 때 장난 아니래요. 한번 털리면 거의 며칠 멘탈 나간다고…… 그래서 별명이 탈곡기예요."

    "왜 저렇게 화가 나셨대?"

    "저야 모르죠. 대충 들어 보니까 던트(레지던트, 전공의) 쌤이 뭐 크게 잘못했나 본데요?"

    와장창!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언가 또 날아온다.

    이번에는 50cc 실린지 주사기다.

    다음엔 또 뭐가 날아올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물건이 좀 많이 날아다니는 거 보니 오늘은 슈퍼 탈곡기인가 본데요?"

    연서의 말에 나는 숨죽여 물었다.

    "설마 흉부외과는 늘 이런 분위기야?"

    "오빠, 저 지금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 쇼생크 탈출하는 느낌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연서의 볼이 핼쑥하다.

    아무래도 지난 한 달간 굉장한 일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흉부외과 사람들 성질이 유독 예민하고 거칠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그 소문이 사실인 것일까.

    "아무튼 인계 끝났습니다! 더 궁금한 거 없죠?"

    "응?"

    "저는 흉부외과의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선한 오빠도 행복하세요!"

    "야, 잠깐……."

    "프리더어엄!"

    연서가 팔을 벌리며 뛰쳐나간다.

    마치 지긋지긋한 감옥을 뛰쳐나가는 죄수의 모습이다.

    아니, 한 달 동안 얼마나 시달렸길래 저래?

    그때 등 뒤에 커다란 인기척이 느껴졌다.

    "우리 친구 드디어 왔구나."

    두둥―

    깜짝이야.

    빚 받으러 온 조폭인 줄 알았다.

    병동 자체가 살벌한 분위기인데, 이 와중에 마동섭의 얼굴을 밑에서 올려다보니…….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더 무서워 보인다.

    "어서 와. 흉부외과는 처음이지?"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다.

    교수님들도 마동섭 선생을 다룰 때는 두려워하지 않을까……?

    만약 나중에 내 아래 연차로 마동섭 같은 의사가 들어온다면 무서워서 뭘 시킬 수나 있을까 싶었다.

    "6시까지 회의실로 인턴들 오라고 한 거는 알고 있지?"

    와장창!

    병동 한쪽에서는 탈탈 털리고 있는 소리가 아직도 요란하다.

    반면 마동섭 선생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일상적이다.

    이런 상황이 너무나도 당연한 걸까?

    "표정이 왜 그래. 교수님 화내는 거 보니 무섭냐?"

    "조금요."

    "흐흐. 그래도 저분은 다른 흉부외과 교수님들에 비해서 비교적 젠틀하신 편이야. 멱살 잡고 아구창은 안 때리잖아?"

    "……네?"

    "농담이다, 하하하."

    저기요.

    전혀 농담 같지 않습니다만?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을 뒤로한 채, 마동섭은 나를 이끌고 회의실로 향했다.

    "뭐, 이전 달 인턴에게 대충 인계는 받았겠지만,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고."

    걸어가며 마동섭이 말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 물었다.

    "흉부외과 인턴은 주로 병동에서 주치의 잡(job)만을 하게 되나요? 혹시 수술방을 들어갈 수 있다든가……."

    "수술방?"

    내 질문에 마동섭이 피식 웃었다.

    "이 친구야. 수술방은 아직 한참 이르다."

    "그럼 병동에서 인투베이션 해 볼 기회라도 있을까요?"

    "하하. 저번에 인투베이션 하는 거 보더니 하고 싶은가 보지? 너도 손으로 뭔가 하는 거 좋아하는 타입이구나."

    마동섭은 흐뭇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좋아, 좋아. 외과의사 지망생으로서 술기(procedure) 욕심이 있다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지!"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 신나게 칼질 모션을 취한다.

    "손이 막 근질근질하지? 얼른 칼 잡고 콱 째 보기도 하고, 막 전기로 지지기도 하고 해야 되는데. 그치?"

    아니, 틀린 말은 아닌데…….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무섭잖아!

    이 양반은 정말 의사 가운 안 입으면 큰일 나겠다.

    영락없이 조폭으로 오해받을 테니까.

    "흉부외과의 세계는 심오하단다. 흉부외과 의사가 되는 미션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스테이지를 완료해야 돼."

    세 가지 스테이지?

    마치 게임이라도 설명하는 것 같은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스테이지 1 : 병동

    ―스테이지 2 : 중환자실

    ―스테이지 3 : 수술방

    "스테이지 1탄은 병동(General Ward, GW)이야. 2탄은 중환자실(Intensive Care Unit, ICU), 3탄이 수술방(Operating Room, OR)이라고 볼 수 있지."

    1탄을 깨야 2탄이 나오고.

    2탄을 깨야 3탄이 나온다.

    즉, 병동과 중환자를 마스터하기 전에 수술방은 언감생심 넘보지도 말라는 뜻이다.

    레지던트 연차가 하나씩 올라가면서 경험치가 쌓이고, 레벨업하면서 각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새삼 내가 초짜 의사라는 실감이 난다.

    하루빨리 메스를 쥐어 보고 싶은데, 그 전에 경험해야 할 것들이 많다.

    지금 나는 그 첫걸음을 막 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제가 이번 달에 할 것들은 튜토리얼인가요?"

    내 질문에 마동섭은 껄껄 웃었다.

    "그렇지. 인턴 과정은 스테이지 0, 튜토리얼이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스테이지 0의 보스는 여기 계실 것 같은데?"

    보스라니?

    터억―

    마동섭이 회의실 문을 연다.

    회의실 문을 열자 인턴 2명이 구석 의자에 앉아 있다.

    벌써부터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 모습들이다.

    그리고 모니터 앞에는 갈색 긴 머리의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머리를 방금 감고 말리지도 못한 건지 물이 뚝뚝 떨어진다.

    ‘아, 저 사람은……!’

    고양이 같은 인상.

    전체적으로 가느다란 체형.

    오버사이즈 옷을 입은 것처럼, 헐렁한 의사 가운 소매를 돌돌 말아 걷어붙인 모습이다.

    "왔냐, 마동?"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는 그녀는 입에 막대 사탕을 하나 물고 있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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