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53화 (53/241)

#53 스토브 리그(3)

인턴 대나무숲은 따끈따끈한 연애 이야기로 가득했다.

―이번에 파견지에서 커플 탄생한 거 다들 알고 있나?

―송 씨랑 이 씨?

―김 씨랑 천 씨라고 들었는데?

―내가 아는 건 진 씨랑 정 씨임.

―그럼 세 커플이야? ㅋㅋㅋ

―ㅋㅋㅋ 대박이네

―역시 파견지에는 마가 끼인 듯. 인턴들끼리 파견 가서 바다 구경하면 마음이 막 싱숭생숭해지나?

―나도 파견 스케줄 하나 구해야겠다.

―다음 달 파견 구합니다!

인턴들 사이에서 커플이 급증하고 있는 모양이다.

봄 동안 주고받았던 ‘썸’의 결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쁜 병원 생활 와중에도 다들 부지런히 청춘을 즐기고 있는 모습들이다.

"나는 남의 연애사에 관심 없는데."

"왜? 재밌잖아."

"남들 신경 쓸 시간이 어딨어? 자기 일 하기도 바쁜데."

내 말에 근욱이는 삐죽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차가운 놈. 너는 가만 보면 은근히 무정한 면이 있어."

그런가?

나는 뺨을 긁적거렸다.

어차피 연애라는 게 별거 있나?

폐쇄적인 환경상, 병원 사람들끼리 연애가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누가 누구랑 사귄다고 해서 특별히 유난 떨 것도 없다.

"아무튼 여태까지 파견지에서만 다섯 커플 탄생이래. 그래서인지 난데없이 파견 스케줄 가치가 상승하고 있더라."

근욱이가 재밌다는 듯 말한다.

‘파견 근무’.

말 그대로 잠시 서울을 벗어나는 업무다.

인력이 부족한 타 지역 연국대병원으로 한 달간 출장을 가는 것이다.

현재 나의 바뀐 스케줄에도 파견이 한 달 포함되어 있다.

‘파견이라…… 기분 전환도 할 겸 괜찮겠네.’

사실 인턴 1년은 말 그대로 죽었다고 봐도 되는 기간이다.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병원 안에서 꼼짝없이 일만 해야 한다.

그 와중에 파견은 잠시나마 여행 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선한이 너 8월 파견이지?"

"맞아. 중원이 형한테 정신과 넘기고 받았거든."

"참고로 선한이 너 나랑 8월 파견 같이 간다! 헤헤."

"어휴, 징그러."

"누가 할 소리를? 여기서 맨날 보던 얼굴을 거기서 또 한 달 동안 봐야 한다니, 벌써부터 지겹다."

나는 근욱이와 사이좋게 악담을 주고받았다.

물론 진심은 아니다.

친한 친구끼리 여행을 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재미있다.

그때, 근욱이가 뭔가 좋은 생각이 난 듯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야, 말 나온 김에 우리도 파견지에서 청춘이나 즐기고 올까? 8월 불꽃축제! 주변에 이쁜 애들은 여기 해변으로 다들 모이지 않겠냐? 헌팅 고고?"

"안 해."

"선한아, 제발! 나 어릴 때부터 바닷가에서 헌팅해 보는 게 꿈이었단 말이야!"

근욱이가 2층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또 와락 앵긴다.

거참 꿈도 많네.

어릴 적 근욱이는 대체 어떤 소년이었던 걸까? 저번에는 승무원 만나 보는 게 꿈이었다고 하더니…….

하여간 머릿속에 여자 꼬실 생각밖에 없었나 보다.

"생각해 봐. 우리 지난번에 강남역에서도 재밌게 놀았잖아? 외딴 파견지에서 우리끼리 심심할 거 아냐."

"일하는데 심심할 틈이 어디 있어? 그리고 어차피 우리 둘이서만 파견 가는 것도 아니잖아."

파견은 보통 4명이서 간다.

즉 근욱이와 나 말고도 두 명의 인턴 동기가 함께 간다는 뜻이다.

물론 백 명이 넘는 동기 중에서 누가 우리와 함께 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럼 다 같이 놀면 되지! 나머지 2명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재밌게 같이 놀 수 있는 애들이었으면 좋겠다. 흐흐흐."

근욱이가 잔뜩 기대 어린 표정으로 웃는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근욱이에게는 핀잔을 줬지만, 사실 나도 어느 정도 기대가 된다.

8월에는 여러모로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다.

물론 그 전에 6, 7월을 무사히 넘겨야겠지만.

* * *

다음 날.

나는 바뀐 스케줄을 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이미 몇 명의 인턴들이 오고 가는 것이 보였다.

다들 치열했던 스케줄 교환을 끝내고 온 모양이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형, 오랜만이네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류명인.

예전에 술집에서 만난 적 있는 녀석이다.

성적에 너무 집착해서 <성적 괴물>로 불리기도 하는 녀석.

오랜만에 봐도 특유의 기묘한 인상은 변하지 않았다.

"다음 달 흉부로 바꾸셨다면서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소문 들었어요."

벌써 소문이 났나?

이럴 때마다 참 병원이 좁다는 생각이 든다.

온갖 사소한 것까지 소문이 나니 말이다.

"피부과 버리고 흉부외과 얻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라구요."

류명인이 미소를 짓는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피부과를 버린 건 아니다.

그 대가로 조진기로부터 11, 12월의 꿀 스케줄을 얻었으니까.

하지만 자세히 설명하는 것도 귀찮고 해서,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옛날부터 흉부외과는 꼭 돌아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저도 바꿨어요."

"뭐를?"

"원래 6월에 다른 과였는데, 흉부외과 넣었다구요."

무슨 소리야.

나 때문에 스케줄을 바꿨다고?

내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녀석이 빙긋 웃으며 말한다.

"형이랑은 한번 같은 과 돌아보고 싶었거든요."

녀석의 표정이 의미심장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껌딱지가 신발 바닥에 눌어붙어 있는 듯한 기분이다.

크게 방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귀찮다.

"그럼, 다음 달 같이 힘내 봐요!"

녀석은 전의를 불태우는 표정으로 사라졌다.

언제 봐도 특이한 녀석이다.

뜬금없이 왜 나를 경쟁 타깃으로 삼은 걸까?

나는 뺨을 긁적거렸다.

"귀찮은 놈이 들러붙었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인턴들은 결국 서로 경쟁하는 관계니까.

병원 안에서 한정된 기회를 잡기 위해 다들 치열하게 노력한다.

류명인 역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이리라.

‘남들이 뭐라든 나는 내 목표만 신경 쓰면 돼.’

내 목표는 단순하다.

첫째. 연국대학교에서 살아남는 것.

둘째. 백의신처럼 멋진 외과의사가 되는 것.

그 밖의 잡다한 일들은 안중에도 없다.

처음 의사의 꿈을 품었을 때 마음의 소리만 믿고 따라가면 된다.

#흉부외과는 처음이지?(1)

어릴 적, 나를 뒤흔들었던 백의신 다큐멘터리에는 이런 질문이 등장한다.

<교수님은 흉부외과 의사이신데…… 처음에는 일반외과로 커리어를 시작하셨다구요?>

그러자 백의신이 대답한다.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일반외과 5년 레지던트를 거쳐야 흉부외과 레지던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일반외과를 5년이나요?>

<그러고 나서 3년 동안 흉부외과 레지던트를 거쳐야 비로소 흉부외과 의사가 될 수 있었죠.>

<와, 정말 험난한 길이네요. 그렇다면 그렇게 험난한 흉부외과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흉부외과의 매력이라…….>

백의신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그의 입이 열렸다.

<기자님은 죽음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다.

기자는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글쎄요, 죽음이라…… 심장박동이 멈추는 것? 아니면, 뇌의 활동이 멈추는 것?>

<죽음이란 게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걸까요?>

백의신이 재차 묻는다.

기자는 당황하며 몇 마디 대답하다가 웃음을 짓는다.

<어째 제가 인터뷰를 당하고 있는 것 같네요.>

기자의 어색한 웃음이 이어진다.

하지만 백의신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다.

한 번쯤 웃어 줄 만도 한데,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말한다.

<기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심장의 박동이 0이 되면 그것이 죽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말하던 중.

아주 잠시, 백의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심장의 박동이 0이 된 환자를 다시 생(生)의 영역으로 데려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사들 중에서도 감히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일이죠.>

백의신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확실한 권위를 목소리에 담아 말했다.

<그것이 바로 흉부외과의 세계입니다.>

"크으, 다시 봐도 멋있네."

나는 숙소에 누워 스마트폰 화면 속 백의신을 보며 감탄했다.

그동안 나는 항상 머릿속에 그려 왔다.

백의신이 이끌었던 연국대학교의 흉부외과에서 일하는 순간을.

‘드디어 기회가 왔다!’

다음 달 6월은 흉부외과다.

.

직역하면 흉부와 심혈관의 수술을 담당하는 과(科)를 말한다.

내가 학생 실습을 돌았던 병원에서는 앞 글자 C와 S를 따서 CS라고 불리었는데, 여기 연국대에서는 T와 S를 따서 TS라고 불리고 있었다.

어쨌든 둘 다 흉부외과를 지칭하는 단어다.

‘물론 아직 진로를 확정한 건 아니야.’

아직 나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다.

외과 계열 중에서도 다양한 분과들이 존재하니까.

물론 백의신이 연국대에서 흉부외과 교수직을 하고 있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흉부외과에 올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의신이 은퇴한 지금, 나는 조금 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

‘일단 적성 파악이 먼저야!’

그렇게 흉부외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궁금증을 가지고 지내던 5월의 마지막 주.

여느 때처럼 EMR(전자의무기록)에 로그인하여 처방을 내려고 하는데 알람이 울렸다.

EMR 시스템 내에서 쪽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이었다.

쪽지는 흉부외과 4년 차 레지던트에게서 온 것이었다.

[인턴 공지]

흉부외과 진동중입니다.

6월 인턴 배정을 알려 드립니다.

성인심장 ― 유영준/이준화/김수경

소아심장 ― 강주이

폐식도 ― 손지민/신선한/안철민 /류명인

지난달에도 크고 작은 인턴 실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치의가 되는 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근무하셔야 합니다.

각 파트의 5월 인턴들에게 인계 확실히 받고, 인계장 반드시 숙지하고 오세요.

―TS R4 진동중

‘나는 이번 달에 폐식도 파트구나.’ 흔히들 흉부외과라고 하면, 심장 수술만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흉부외과에서는 심장뿐만 아니라 폐와 식도 역시 다룬다.

흉벽, 종격동 질환, 그리고 다양한 혈관 질환도 진료 범위에 포함된다.

이에 따라, 연국대학교 흉부외과는 크게 3 파트로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다.

1 ― 성인의 심장과 대동맥 등의 혈관 수술을 담당하는 <성인심장 파트>.

2 ― 소아의 선천성 심기형을 다루는 <소아심장 파트>.

3 ― 그리고 폐와 식도 등의 흉부장기에 대한 수술을 담당하는 <폐식도 파트>.

‘사실 심장 파트를 먼저 경험해 보고 싶기는 했는데.’

나는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물론 이럴 줄 알고 흉부외과 스케줄을 두 번이나 넣었다.

즉, 다음 번에는 심장 파트를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폐식도에도 관심이 있으니, 이번 기회에 잘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류명인이랑 결국은 같은 파트가 됐네?’

나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성가신 놈.

그때, 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연서] : 오늘 우리 언제 볼까요?

오랜만에 보는 연서다.

연서는 지난 한 달간 흉부외과 인턴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인 오늘, 나에게 업무를 인계해 주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답장했다.

[선한] : 네 시간에 맞춰야지. 인계 가능할 때 연락 줘.

[연서] : 이따가 오후 5시쯤 시간 될 것 같은데 그때 괜찮아요?

[선한] 응, 5시에 흉부외과 병동으로 갈게.

6시에 안 그래도 폐식도 인턴들 모이라고 연락 왔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연서의 프로필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뭐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벚꽃과 함께 찍은 셀카였는데…….

지금은 뭉크의 <절규> 그림으로 바뀌어 있다.

[연서] : 인계장 읽고 오세요~

[선한] : 응 3독했어

[연서] : ㅋㅋㅋ 알았어요 이따 봐요~ 아 참, 제 모습 보고 너무 놀리지 마요!

"놀리지 말라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릴 게 뭐 있다고?

나는 곧 인계를 받으러 병동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오랜만에 본 연서의 모습은 꽤 파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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