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스토브 리그(2)
구내식당에 모인 인턴들은 다들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인턴 공지]
빈번한 스케줄 교체로 인한 혼돈을 방지하기 위해 안내 말씀 드립니다. 인턴 여러분은 모두 스케줄을 5월 안으로 꼭 확정 짓길 바랍니다.
마감 : 5월 30일 정오
―인재개발실
"아니, 이게 뭔 소리야?"
"오늘 27일이잖아요."
"스케줄을 3일 동안 확정 지으라고? 너무한 거 아냐?"
근욱이와 중원이 형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식당 맞은편을 보니, 다른 테이블에 앉은 인턴 동기들도 술렁이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트레이드 시장에 72시간의 타임 리미트가 걸렸다.
"야, 이거 생각보다 더 급하네. 서둘러야겠다."
"매물이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모두들 다급해지는 모습이다.
그리고 나는 여유 있게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졸지에 만수르급 구단주가 된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손에 쥔 카드가 너무 많다.
* * *
인생은 뽑기 운에 많이 좌우된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다.
누군가는 금수저로, 누군가는 흙수저로 태어난다.
나는 평소에 늘 궁금했었다.
금수저는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나는, 생전 처음으로 금수저가 된 기분을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선한아, 우리 밥 한번 먹을까?"
"선한아, 내가 한턱 쏜다!"
"선한이 형, 잠깐 시간 돼요?"
"선한 오빠!"
왜들 이래?
갑자기 친한 척들이다.
심지어 평소에 전혀 친하지 않던 동기들까지 살갑게 말을 걸어온다.
"적응 안 되네."
평소에는 일운대 출신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나는 업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스케줄표를 확인했다.
[스케줄]
3월 ― 내과
4월 ― 응급의학과
5월 ― 중환자실 (←현재 여기)
6월 ― 피부과
7월 ― 영상의학과
8월 ― 정신과
9월 ― 성형외과
등등…….
확실히 내 스케줄표가 좋긴 하다.
소위 말하는 A급 이상의 인기 카드가 여러 개 있기 때문이다.
‘정작 나한테는 필요 없는데.’ 나는 인기과들에 별로 관심이 없다.
오히려 비인기과인 외과 계열을 돌아보고 싶다.
그렇기에 다른 인턴들에게 나는 노다지와 같은 존재로 보이고 있을 것이다.
‘뭐, 관심 없는 과들은 적당히 트레이드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때,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실루엣이 보였다.
작은 체구에 햄스터 같은 인상.
"소담아."
"아, 선한아."
소담이가 고개를 들었다.
휴게실 구석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한참 고민 중이었던 모양이다.
슬쩍 보니, 인턴 대나무숲에서 스케줄 교환 게시판을 읽고 있는 것 같다.
"뭐 보고 있었어? 스케줄 교환?"
"응. 얘기 들었어. 너 스케줄 금수저라며?"
어디까지 소문이 난 것인가…….
인턴들 사이에서는 이미 내 얘기가 많이 알려진 모양이다.
"그렇긴 한데, 정작 내가 원하는 과는 없더라고."
"아, 맞다. 너 외과 쪽 가고 싶다 그랬었지?"
"응. 서로 교환할 스케줄 있는지 볼까?"
"그럴까?"
나는 소담이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서로의 스케줄을 비교해 보았다.
아쉽게도 소담이의 스케줄에서 내가 찾는 흉부외과는 보이지 않았다.
반면, 소담이는 내 스케줄표를 보더니 부럽다는 듯 말했다.
"우와, 너 영상의학과도 있네?"
"응."
"좋겠다. 나도 미리 한번 돌아보고 싶었는데."
"너 영상의학과 지망이야?"
"으응. 적성에 맞을 것 같아서……."
소담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영상의학과를 스케줄에 넣고 싶어 하는 경우는 ‘편할 것 같아서’라는 이유가 많다.
하지만 소담이는 진지하게 자신의 진로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긴…… 생각해 보니 소담이는 여러모로 영상의학과랑 잘 맞네.’
일단 환자를 보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몇 시간 연속해서 같은 자리에서 판독을 해야 하는 날도 있는 것이 영상의학과의 특성이다.
그런 점에서 소담이 특유의 내향적이고 차분한 성격과 잘 어울린다.
‘그리고 소담이는 눈썰미가 은근히 좋았지.’
예전에 응급실에서 일할 때, 교통사고 응급 환자의 출혈 부위를 가장 먼저 찾아낸 것도 소담이었다.
엑스레이 등 영상을 판독할 때도, 소담이의 판단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소담이에게 여러모로 잘 어울리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너 가져."
"응……?"
"스케줄 바꾸자. 7월."
나는 쿨하게 말했다.
그러자 소담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나 주려고?"
"응. 적성에 맞는지 미리 돌아보면 좋잖아."
"야, 안 돼."
"왜?"
"너한테 너무 손해인 것 같아. 나는 7월 신경외과란 말이야."
소담이는 나를 만류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신경외과는 흉부외과 못지않게 기피된다.
인턴 잡이 힘들기로는 다른 어느 과 못지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괜찮아. 외과 계열은 최대한 많이 돌아보고 싶었거든."
"정말 괜찮겠어?"
"응. 어차피 다른 좋은 카드도 많아서."
"헐……."
소담이가 입을 벌렸다.
이것이 바로 플렉스(flex)라는 것일까?
마치 나 돈 많다고 뿌리는 기분이다.
금수저가 된 게 이런 느낌이구나.
소담이는 안절부절못했다.
"나…… 나는 너한테 줄 게 없는데?"
"뭘, 친구끼리."
"내가 뭐 해 줄까 선한아. 밥 사 줄까? 술 사 줄까?"
"됐어. 대신 영상의학과 꼭 붙어라."
"응…… 고마워!"
소담이의 뺨이 헤실헤실 풀어진다.
기분이 좋은가 보다.
친구가 기뻐하니 나도 기분이 좋다.
그때, 소담이가 문득 손뼉을 치며 말한다.
"아 참, 답례라고 하긴 뭐하지만…… 선배한테 들었던 팁 하나 줄게. 11월이랑 12월은 무조건 편한 과로 정해야 된대."
소담이의 설명이 이어진다.
인턴에게 11월과 12월은 중요한 시기다.
10월에 전공 지망이 끝난 후, 연말에 전공의 시험이 있기 전까지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여유 시간을 확보할수록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
"오, 꿀팁이네. 고마워!"
"내가 더 고맙지 선한아. 언젠가는 꼭 크게 보답할게!"
소담이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한다.
왠지 소담이가 그렇게 말하니까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저번 징계위원회 때도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지.
물론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소담이와 좋은 관계를 쌓는 것은 여러모로 나쁘지 않다.
그런 걸 다 떠나서, 소담이는 병원에서 몇 안 되는 좋은 친구이기도 하고.
"자, 그럼 나머지 카드는 어떻게 써 볼까."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휴게실을 나섰다.
물론 나도 자원봉사자는 아니니, 나머지 카드들은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쓸 예정이다.
특히 피부과는 최고의 카드이니, 웬만큼 좋은 조건이 아니고서야 그냥 넘길 수 없다.
* * *
"선한아, 하이."
"……?"
다음 날 아침.
정말 뜬금없는 녀석이 나를 찾아왔다.
누군가 했더니, 조진기다.
만면에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다.
손에 음료수를 들고 어울리지도 않는 말투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중환자의학과는 잘 돌았어? 어땠어?"
갑자기 친한 척이네.
내가 다 어색해질 지경이다.
그나저나 얘는 손에 깁스를 아직도 풀지 못했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뒤로도 술을 먹다가 몇 번 사고를 친 모양이다.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이야?"
"너…… 피부과 스케줄 있다면서?"
녀석이 쭈뼛대며 나에게 묻는다.
"혹시 나랑 교환할 생각 있냐? 마침 내가 6월에 흉부외과거든."
얼씨구?
이놈도 피부과를 노리고 있었나.
다른 놈한테는 줘도 너한테는 안 주지.
나는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들어 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말했다.
"네가 뭘 줄 수 있는데?"
"응?"
"서로 조건이 맞아야 교환을 할 거 아냐."
"너 흉부외과 구한다며. 서로 바꾸면 윈윈이지."
"장난해?"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조진기가 움찔한다.
"나는 흉부외과 스케줄 어디서든 구할 수 있지만, 너는 아니잖아. 서로 희소성이 다른데 1 대 1로 교환을 하자고?"
"아, 알았어."
그러자 조진기가 주저하다가 말한다.
"……50만 원 정도면 어때?"
돈이라.
돈도 좋긴 하지.
하지만 50만 원이면 너무 싸다.
내 표정이 미동도 없자 조진기의 목소리가 급해진다.
"70만 원!"
"……."
"배…… 100만 원!"
나는 하품을 했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백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스케줄의 가치에 비해 충분하지 않다.
게다가 처음부터 나를 등쳐 먹으려고 접근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쉽게 넘겨줄 수 없다.
"에라, 그래. 200만 원!"
"고작 그 정도야? 네가 미래를 위해서 투자할 수 있는 게?"
"……."
"나 간다."
나는 아예 옷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조진기가 외쳤다.
"3…… 300만 원! 진짜 더 이상은 주고 싶어도 못 줘! 선한 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됐고, 네 스케줄표 줘 봐."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곧 녀석의 스케줄에서 황금 같은 시간표를 발견했다.
‘오호…… 이 자식. 이 좋은 걸 꿍쳐 두고 있었네?’
11월 ― 가정의학과
12월 ― 병리과
둘 다 인턴 잡이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과들이다.
소담이의 말대로, 11월과 12월에 개인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연말에 전공의 시험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진기의 스케줄은 꼭꼭 숨겨 놓은 꿀단지 같은 것이었다.
"나 이거 줘."
"응?"
"11월 12월. 둘 다."
"헉……!"
내 말에 조진기의 얼굴이 파래졌다.
"야, 이걸 달라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진짜 꿀 같은 스케줄인데……."
"이 정도는 돼야 서로 균형이 맞지 않겠어? 피부과 스케줄은 어디 가서도 못 구할 텐데."
"윽……."
"싫으면 말든가. 다른 사람한테 넘기지, 뭐."
나는 등을 돌렸다.
그러자 조진기가 다급히 나를 붙잡는다.
그러고는 한참 망설이더니, 울며 겨자 먹기로 말한다.
"에잇, 그래. 바꾸자!"
"콜."
나는 스케줄을 냉큼 맞바꾸었다.
이득이다!
연국대병원에서 살아남으려면 연말 시험 성적도 중요하다.
그런데, 방금 거래로 여유 시간을 대량 확보한 것이다.
돈 몇백만 원에 절대 꿀리지 않는 거래였다.
게다가 내가 그토록 원하던 흉부외과 스케줄도 확보했다.
"그런데 조진기 너 피부과에 원래부터 관심 있었어?"
"당연하지."
"왜?"
"흐흐. 당연히 돈 때문이지. 피부과 의사들 개업하면 한 달에 얼마 버는 줄 아냐?"
조진기는 헤벌쭉 웃었다.
돈을 버는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은가 보다.
"뭐, 내가 유명해지면 너한테 한자리 줄게. 나중에 먹고살기 힘들면 연락해라!"
조진기는 어깨에 힘을 준다.
벌써부터 김칫국을 한 사발 퍼마시고 있는 표정이다.
나는 녀석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되겠냐?’
피부과는 경쟁률이 높다.
당장 인턴 평가부터 죽을 쑤고 있는 조진기가 합격할 확률은 없다.
병원에서 ‘조진기 = 말리그(malignancy, 암세포)’라고 소문이 자자한 걸 본인만 모르는 걸까?
하지만 나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망상을 펼치는 건 자유니까.
"그럼 입금 주소는 메시지로 보낼게."
"응? 뭐야, 돈 300만 원까지 포함하는 거였어?"
"당연하지. 왜, 싫어?"
"……."
"싫음 말든가."
조진기는 참담한 표정으로 나의 계좌 주소를 받아 갔다.
이게 바로 갑질의 묘미인가?
사실 돈보다도 조진기의 쩔쩔매는 표정이 더 즐겁다.
동기 친구들한테 맛있는 고기나 사 줘야겠다.
* * *
저녁이 되자 스케줄 교환이 거의 끝났다.
나는 흉부외과도 두 개나 확보했고, 연말에 충분한 시간도 확보했다.
그 외에 근욱이와 중원이 형에게 각각 필요한 과들을 나누어 주고, 그 대가로 언제든 필요하면 인턴 일을 도와주겠다는 다짐을 얻었다.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베푼 것들이 언젠가는 호의로 돌아오겠지.
이 정도면 성공적인 스케줄의 완성이었고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었다.
‘슬슬 마무리할까?’
나는 느긋하게 숙소 침대에 누웠다.
이제 내일 사무실로 가서 신고만 하면 된다.
그때, 근욱이의 머리가 빼꼼 내려왔다.
"선한, 자냐?"
깜짝이야!
귀신인 줄 알았다.
2층 침대에서 근욱이의 목만 불쑥 내려와 있다.
꿈에 나올까 무섭네.
"자다가도 너 때문에 가위눌리겠다."
"재밌는 거 알려 줄까?"
"뭔데?"
"대나무숲 봐 봐. 지금 난리 났다."
대나무숲?
익명이다 보니 온갖 이야기가 다 나오는 곳이다.
심지어는 온갖 구설수까지 올라와서 인턴들 사이에서는 디스패치라고 불리기도 한다.
"무슨 얘기가 올라왔길래?"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