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중환자실의 해병대(11)
<신선한 : A+>
최고점이라니?
교수는 놀랐다.
물론 신선한이라는 인턴은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 달 내내 성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까.
다만 교수가 놀란 이유는, 점수를 매긴 사람이 다름 아닌 변 선생이기 때문이다.
‘귀찮은 일이라면 질색하는 놈이 웬일이지?’
그동안 변 선생이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턴 평가에 최고점을 주려면, 레지던트들이 특별히 코멘트를 달아야 하기에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변 선생의 성격대로라면 이런 최고점을 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디 보자…… 대체 뭐라고 코멘트를 써 놨을꼬?’
엄서용 교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얼른 스크롤을 내렸다.
그리고 곧 장문의 글을 발견했다.
[평가 소견]
저는 그동안 저도 모르게 나태해져 있었습니다.
거울 속 눈빛은 어느덧 동태눈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턴 신선한 선생은 달랐습니다.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태도가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환자의 증상에 대한 논문을 프린트해서 공부까지 하더군요…….
그런 모습에 저는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을, 한편으로는 제가 처음 외과에 지원했을 때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르쳐야 할 입장이지만, 오히려 인턴 선생을 통해서 배우고 느낀 것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이게 인턴 평가야, 반성문이야?"
교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살다 살다 이런 평가 소견은 처음 본다.
그 뒤로도 비장함이 느껴지는 글은 끝없이 이어졌다.
잠시 후 엄서용 교수는 피식 웃었다.
"자식. 하여튼 웃기는 놈이야."
타닥, 타닥…….
엄서용 교수는 승인 버튼을 누른 뒤, 인턴 평가에 동의한다는 코멘트를 추가하였다.
그렇게 5월이 끝나고, 뜨거운 계절인 6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토브 리그(1)
프로야구에는 <스토브 리그>라는 것이 있다.
시즌이 끝난 뒤,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때 각 구단들은 다음 시즌을 준비하며 팀을 재정비하는데, 이 과정에서 치열한 트레이드 시장이 펼쳐진다.
어떤 선수를 방출하고 영입하느냐에 따라 구단의 미래가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지금.
6월이 막 시작되려 하는 어느 날.
우리 병원의 인턴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스토브 리그>가 열리고 있었다.
"너 안과 스케줄 구했냐?"
"아니, 아직."
"슬슬 구해야 하지 않아?"
"안 그래도 수소문하는 중인데 팔려는 사람이 없더라. 올해 안과 프로퍼(proper, 지망) 꽤 많은 것 같더라고."
"에휴, 나는 재활의학과 노리고 있는데 도저히 매물을 구할 수가 없네……."
인턴 동기 몇 명이 그런 이야기를 하며 식당 복도를 지나갔다.
전공을 사고판다니?
얼핏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여기에는 우리 인턴들만의 사정이 있다.
인턴 1년은 정말 중요한 시기다.
연말에 어떤 전공을 선택하여 지원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한다고 해서 아무 곳이나 지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원하는 과에 지원하려면, 그 이전에 해당 과의 인턴을 반드시 돌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즉, 쉽게 말하자면…….
안과 레지던트가 되고 싶다면, 안과 인턴을 최소 한 달은 돌면서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들 원하는 스케줄은 구했냐?"
점심 구내식당.
중원이 형이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내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근욱이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아뇨. 이제 알아봐야죠."
"서두르는 게 좋을걸? 빨리 안 알아보면 매물 없어서 늦는다."
"물물교환 하는 것도 아니고 귀찮아 죽겠어요."
"어쩌겠냐. 스케줄이 애초에 랜덤인걸."
중원이 형과 근욱이가 투덜거렸다.
인턴 1년 동안의 스케줄은 기본적으로 병원에서 임의로 정해 준다.
그렇기에, 자신이 원하는 과를 배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메이저’라고 불리는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는 필수 코스로 배정되어 있지만 다른 과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원하는 과가 있다면, 인턴들끼리 서로 스케줄을 교환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원하는 과 있으면 서둘러라. 심지어 인기 많은 과들은 돈으로 사고판다고 하더라."
"돈이요?"
"당연하지. 원하는 게 있으면 그만한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게 세상 이치 아니겠냐?"
나는 중원이 형의 말에 놀랐다.
인턴들 사이에 거래가 활발한 건 알고 있었지만, 심지어 돈으로 사고파는 줄은 몰랐다.
그때 근욱이가 중원이 형의 밥그릇에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형님, 근데 저 치즈돈가스 하나 먹어도 됩니까? 맛있어 보이네요."
"안 돼 인마! 내가 얼마나 줄 서서 기다렸는데."
"히잉."
"방금 뭐 들었어? 원하는 게 있으면 그만한 값을 치러야 한다니까. 비슷한 등급의 반찬이라도 가져오든가!"
중원이 형의 핀잔에 근욱이가 젓가락을 들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스마트폰을 켰다.
인턴 대나무숲 커뮤니티에는 아침부터 온갖 거래 글들이 활발하게 올라오고 있다.
―7월 중환으로 9월 부산 파견 구합니다!
―9월 정형외과 원하시는 분?
―10월 응급 팔아요!
―7, 8월 재활 구해 봅니다 ㅠㅠ
―6월 PS랑 NS 바꾸실 분?!
―7월 OS로 가정의학과 구해 봅니다.
└ 양심 있냐? ㅋㅋㅋ
└ 돈 주고도 못 산다는 꿀 스케줄을 날로 먹으려고? ㅋㅋㅋ슬슬 월말이다 보니 더 많은 글이 올라오는 것 같다.
나는 중원이 형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인기 있는 과들은 스케줄을 구하기가 힘든 모양이죠?"
"당연하지. 저길 봐."
중원이 형이 젓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구내식당 한쪽 벽.
인기 메뉴인 치즈돈가스 코너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반면, 그 옆의 곤드레비빔밥, 초계국수, 꽁치조림 코너는 비교적 한산해 보인다.
"한낱 돈가스에도 줄이 저렇게 몰리는데, 하물며 전공은 오죽하겠냐? 의사로서 앞으로 평생의 미래가 걸려 있는데."
"하긴, 그렇게 말하니 확 와닿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인턴 생활도 3개월이나 지났다.
이제 병원 생활에 적응도 끝났겠다, 본격적으로 각자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함께 웃고 떠들며 동고동락하던 인턴들이 슬슬 경쟁 상대로 보이기 시작할 시기다.
여태까지가 몸풀기 시즌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인턴들의 본게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저도 슬슬 스케줄 구해 놔야겠네요."
"선한이 너는 어디 돌아보고 싶은데?"
"저는 흉부외과요."
"흉부외과?"
중원이 형이 푸웁 하고 웃으며 말했다.
"야, 걱정하지 마라. 흉부외과는 마음만 먹으면 30분 안에 구할 수 있을걸? 만약 맞바꾸자고 하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환영하는 놈들 많을 거다."
하긴…….
중원이 형의 말대로다.
흉부외과는 인기가 없다.
20여 개에 달하는 연국대병원의 과(科)들 중에서 유독 하위권을 다툰다.
굳이 인기도를 등급으로 표현하자면 C등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흉부외과가 어때서?’
‘멋있잖아!’
‘드라마 보면 흉부외과 의사들밖에 안 나오던데?’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흉부외과는 몸이 힘들고 고달프기로 유명하다.
전공의 시절은 물론 전문의가 되고 나서도 24시간 콜에 노출되면서, 저녁이 있는 삶 / 주말이 있는 삶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개업하여 독립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에 개업해서 대박 날 생각은 애초에 접어야 한다.
아마 대다수의 인턴들에게 흉부외과는 매력적인 선택지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처럼 특이한 인간이 아니고서야…….
"그래서 올해는 무슨 과가 제일 핫한데요?"
근욱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
곧 중원이 형이 신나게 좔좔 읊기 시작한다.
"크~ 역시 구관이 명관! 피안성 정재영이 전통의 강자들 아니겠냐? 한때 반짝하고 다른 과들이 급부상하긴 했지만, 유행은 돌고 돌아 다시 찾아오는 법!"
거의 TV 정보통 프로그램에서 맛집 소개하는 듯한 텐션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기도 A급 이상의 카드들은 다음과 같다.
[피부과] (S)
희귀도 : ★★★★★
인턴난이도 : ★★
전망 : ★★★★★
명실상부 가장 희귀한 카드! 수요가 많은데 매달 인턴을 위한 자리는 1개밖에 없어서 바늘구멍이라고 불린다. 게다가 인턴들의 일도 비교적 편한 편이라고?
[성형외과] (A+)
희귀도 : ★★★☆
인턴난이도 : ★★★
전망 : ★★★★★
전국 레지던트 지망 경쟁률 1위는 바로 성형외과! 강남의 유명한 성형외과 원장은 죄다 연국대 출신이라는데…… 개업해서 대박이 난다면 당신도 강남 건물주?
[재활의학과] (A)
희귀도 : ★★★★
인턴난이도 : ★★
전망 : ★★★★☆
요양병원의 증가세와 더불어 수요 급상승!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카드. 게다가 연국대 재활 센터에는 손응민을 비롯한 스포츠 슈퍼스타들이 자주 방문한다고 하는데?
[영상의학과] (A)
희귀도 : ★★★★★
인턴난이도 : ★
전망 : ★★★☆
이곳에 가면 인턴인 당신은 웰빙 라이프를 즐길 수 있다! 오후 6시가 되면 당신은 집에서 넷블릭스를 보고 있을 것이다. 수요가 많기 때문에 본격적인 진로로도 매우 훌륭한 선택!
[정신과] (A)
희귀도 : ★★★★☆
인턴난이도 : ★★★
전망 : ★★★★☆
최근 들어 사회적인 수요가 급증! 오로지 정신과만 바라보고 의사가 된 사람들도 많을 만큼 독보적인 영역을 확보하는 중!
등등…….
중원이 형이 말한 과들은 모두 유명한 것들이다.
괜히 앞 글자들을 따서 피안성, 정재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특히 올해는 성형외과랑 정신과가 인기가 많은 것 같더라. 나도 알아보고 있거든."
"아, 저 그건 둘 다 있어요."
"응?"
중원이 형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근욱이도 눈이 휘둥그레진다.
"선한이 너, 성형외과랑 정신과가 둘 다 있다고?"
"예."
"와……."
"인기 있는 과를 다 가지고 있네? 트레이드 아직 안 했으면 나랑 하자, 선한아! 내가 값은 후하게 쳐줄게."
중원이 형이 손을 비빈다.
어느새 장사꾼이 다 되어서 나와 거래하기만을 바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근욱이도 나를 부럽다는 듯 바라보다가 말한다.
"그거 말고 또 뭐 있는데?"
"영상의학과랑 재활의학과……."
"뭐어?"
두 사람이 다시 한번 놀란다.
근욱이는 황당한 표정이고, 중원이 형은 사레가 들린 듯 콜록콜록 기침을 한다.
"야, 이거 전산 오류 아니냐? 어떻게 초인기 카드를 선한이가 죄다 가지고 있냐?"
"그럼 뭐 해요, 선한이는 외과 바라기인데."
"그러게, 정작 외과의사 되고 싶다는 놈한테 A급 카드가 다 있네.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
중원이 형이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짓다가 말했다.
"얘 설마 피부과까지 있는 건 아니겠지?"
"푸하하, 에이 설마요."
피부과.
인기도 원톱이다.
모두들 가고 싶어 하지만 정작 TO(정원 수)가 얼마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과들 중에서도 경쟁률이 가장 센 편이다.
"피부과는 진짜 희귀하지. 가뜩이나 인기도 많은데, 한 달에 한 명밖에 안 돌잖아."
"우리 인턴들 중에서 피부과 스케줄 가지고 있는 사람이 12명밖에 없다는 소리죠. 아마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걸요?"
"아, 저 피부과도 있어요."
멈칫.
두 사람의 젓가락질이 허공에 멈춘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네 스케줄에 피부과까지 있다고?"
"예, 6월에."
"미친!"
"이거 완전 개사기 아녀!"
중원이 형이 밥풀을 튀기며 분노했다.
근욱이는 나무젓가락을 던졌다.
그리고 그때.
띠링!
중원이 형의 스마트폰에 메시지 알림창이 떴다.
곧 문자를 확인한 중원이 형의 눈이 커졌다.
"야, 큰일 났다. 문자 봐 봐."
갑자기 왜?
띠링, 띠링, 띠링!
곧 모두의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무슨 재난 문자도 아니고……?
곧 식당에서 밥을 먹던 다른 인턴들까지 일제히 폰을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헉……."
"야, 큰일이다!"
식당 곳곳에서 헉 소리가 나온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