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중환자실의 해병대(10)
낡은 야구공이었다.
노랗게 변색된 공에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는 웃으며 물었다.
"할아버지께서 야구를 좋아하셨나 봐요?"
"예. 아들 낳으면 같이 야구하는 게 꿈이었대요."
남자는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초등학교 때였나. 아버지가 저한테 캐치볼을 가르쳐 주려고 했거든요. 제가 손이 이 모양인데 어떻게 야구를 하냐고 버럭 화를 냈던 기억이 나네요."
"……."
"그날 밤에, 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와서 저 자는 동안 옆에서 우는데…… 어휴."
슥슥.
남자는 눈두덩을 비볐다.
문득 떠오르는 옛날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하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그가 내민 야구공을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환자분께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또 오실 건가요?"
"그래야죠."
그렇게 대답하는 남자는, 무언가 후련한 듯한 표정이었다.
10년 동안 묵혀 두었던 감정이 조금은 풀린 것일까?
보호자가 나간 뒤, 나는 야구공을 환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전쟁의 상흔을 평생 안고 살아야 했던 노인.
그에게 이 야구공은, 아주 평범한 행복을 의미하는 물건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게 도움이 될까요?"
"글쎄요…… 지금 당장은 몰라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요? 아들분도 또 찾아오신다고 하니까요."
차유리와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데.
꿈틀―
야구공을 잡은 환자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기분 탓인지, 환자의 호흡도 안색도 안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환자분, 좋은 꿈 꾸고 계신 것 같네요."
차유리가 흐뭇하게 말했다.
어쩌면 꿈속에서 아들과 함께 평화로운 공원에서 캐치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변 선생이 옆에서 지나가며 투덜댔다.
"크흠흠…… 원래 중환자실에 외부 물건 반입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이번은 예외예요."
"아니. 그 야구공…… 수류탄인 줄 알고 또 던지면 어떡하냐고?"
변 선생의 투덜거림에 간호사들이 꺄르르 웃는다.
"쓸데없는 걱정 마시고 변 선생님은 어서 삭발이나 하세요."
"와, 간호사 선생님들 이러시깁니까?"
* * *
5월의 끝자락.
그 뒤로 어택중 할아버지의 상태는 급속도로 호전되었다.
마동섭 선생의 빠른 판단력으로 인공호흡기 치료를 시작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아들의 방문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중환자실에 다시 내려온 지 3일째 되는 날 아침, 인공호흡기를 제거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일어나셨어요?"
"예에."
"간밤에는 편히 주무셨구요?"
"그러믄요. 아주 좋은 꿈을 꿨습니다."
"다행이네요."
나는 그의 흉관을 소독하며 미소를 지었다.
어택중 환자는 인공호흡기 치료를 끝낸 뒤에는 섬망 소견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매일 밤 섬망이 발생했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좋아진 것이다.
이제 간호사들도 긴장을 놓고 안심할 수 있었다.
내가 소독을 끝내고 스테이션으로 돌아오자, 변 선생이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이해가 안 되네…… 정말 가족 한 번 다녀갔다고 갑자기 저렇게 싹 좋아질 수가 있냐?"
변 선생은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는 말투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풉 하고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뭘 봐, 인마."
변 선생은 머리를 밀었다.
물론 완전 삭발은 아니고, 밤톨처럼 짧은 머리로 합의를 봤다.
그래도 평소의 떡 진 머리보다 훨씬 깔끔해 보인다는 것이 모두의 의견이었다.
"머리 잘 어울리십니다, 선배님."
"닥쳐."
"꼭 안 미셔도 됐는데."
"내기를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변 선생은 비장하게 중얼거렸다.
자기 나름대로 신념이 있는 모양이다.
지나가던 간호사들이 웃으며 한마디씩 했다.
"곧 여름인데 시원해 보이고 좋아요, 선생님."
"잘 어울리네요."
"그, 그래요?"
변 선생은 히죽 웃었다.
사람이 단순한 건지…….
그 표정을 보니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하여간 미워하기가 힘든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보호자 면회 시간이 되었다.
아들은 이제 거의 매일같이 면회를 왔다.
그리고 올 때마다 꼬박꼬박 우리에게 환자의 상태를 물었다.
"저…… 우리 아버지는……?"
"많이 좋아지셨어요. 오늘은 인공호흡기 뽑았으니까 편하게 이야기 나누실 수 있을 거예요."
차유리 간호사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섬망 증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자연스레 회복도 빨라지고 있었다.
결국 미래가 바뀐 것이다.
환자가 인공호흡기 치료를 끝내고 입에 물려 있던 튜브를 제거하고 난 뒤 가장 처음 내뱉은 말은 아들의 이름이었다.
그날 면회 시간에 어택중 할아버지와 아들의 재회는 우리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환자는 병동으로 전실되었으며, 이후 큰 이벤트 없이 회복되어 갔다.
* * *
그날 저녁.
문 앞에서 퇴근하는 차유리 선생을 마주쳤다.
"선한 쌤 퇴근 안 하세요?"
"예, 저도 곧……."
나는 대답하다 말고 약간 놀랐다.
차유리 선생의 외모 때문이다.
그녀는 간호사복을 입고 있을 때와 사복 차림의 분위기가 확실히 다른데, 오늘은 유난히 더 그렇다.
길게 푼 머리에, 약간 헐렁이는 티셔츠와 타이트한 청바지가 참 잘 어울린다.
"어디 놀러 가세요?"
"금요일 저녁이잖아요! 친구들이랑 약속 있거든요."
차유리는 빙긋 웃으며 나를 팔꿈치로 툭 쳤다.
"선한 쌤도 병원 일에만 너무 빠져 있지 말고 적당히 놀면서 해요. 나중에 번아웃(burnout) 와요."
"그럴게요."
"그나저나 선한 쌤, 우리 이제 못 보겠네요? 저 월말까지 3 오프(off)거든요."
간호사들의 듀티는 다소 불규칙하게 짜인다.
그리고 내가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것은 이번 주까지다.
차유리와 근무 시간이 겹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한 달 동안 고마웠습니다."
"에휴, 선한 쌤 덕분에 한 달 동안 재밌었는데."
우리는 거의 동시에 말하고 서로 웃었다.
차유리는 아쉽다는 듯한 표정이다.
나도 같은 마음이다.
간호사와 이 정도로 친하게 지낸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병원에서 외과의사 할 거라는 목표는 그대로죠?"
"당연하죠."
"다행이다. 그러면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겠네?"
"제가 이 병원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요."
나는 엄살을 피웠다.
그러자 차유리가 내 몸을 툭 치며 웃었다.
"에이, 잘할 거면서 왜 그래요? 나는 선한 쌤이 좋은 써전(surgeon, 외과의사)이 될 거라고 확신해요."
차유리는 늘 이렇게 나를 북돋아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처음 겪는 중환자실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 주기도 했다.
여러모로 고마운 사람이다.
"아 참. 깜빡하고 당부 안 한 게 있는데…… 닭발집 아무한테도 알려 주면 안 돼요! 나만의 비밀 장소란 말이야."
차유리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무슨 말을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하나 했더니.
나는 픽 웃고 말했다.
"저도 당부할 거 있어요."
"뭔데요?"
"소주 세 잔 이상 마시지 마세요. 차유리 선생님 술 약해서 금방 잠들어 버리잖아요."
"왜, 걱정돼요?"
"조금요."
나는 솔직히 말했다.
그러자 차유리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걱정되면 앞으로도 계속 같이 마시러 가 주시든가?"
갑자기 훅 들어온다.
나는 순간 대답할 말을 잃었다.
차유리의 얼굴에 짓궂은 표정이 떠올라 있다.
"농담이에요."
차유리는 깔깔 웃더니 나를 팔꿈치로 툭 치고는 산뜻한 걸음걸이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뺨이 간질간질했다.
병원에서 참 많은 인연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서 몇몇은 각별하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그녀와는 종종 만나게 될 일이 있을 것 같다.
* * *
"다녀왔습니다."
"어, 아들?"
늦은 저녁 시간.
아버지는 횟집 문을 닫고 있었다.
나의 느닷없는 방문에 눈이 휘둥그레진 모습이다.
"아이고. 우리 바쁘신 의사 선생님이 웬일이냐?"
"그냥, 아버지랑 소주 한잔하고 싶어서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어 올렸다.
왠지 오늘은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킁 하고 코를 훔치며 웃었다.
"가만있자…… 소주는 있고. 안주가 있어야 할 터인디."
"제가 사 왔어요."
"이게 뭣이냐? 웬 닭발?"
"같이 일하는 간호사 선생님이 소개해 준 곳인데, 제법 맛있더라구요."
나는 차유리가 소개해 준 핵불닭발을 테이블에 펼쳐 놓았다.
붉은색 윤기가 좌르르르 흐른다.
선선한 저녁 공기.
맛있는 안주와 술.
그리고 가족.
더 이상 바랄 게 있을까?
우리는 입맛을 다시며 소주병을 깠다.
"그나저나 웬일이여. 내 아들답지 않게. 특별한 날 아니면 술은 입에도 안 대더니……."
"그냥요."
"흐흐. 별일이네. 살다 보니깐 이렇게 아들이 소주 한잔하자는 날도 오고……."
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소주를 꼴깍 삼키셨다.
그리고 닭발을 입에 넣으셨다.
3초 후.
"쿨럭쿨럭. 퉷퉷."
아버지는 닭발을 뱉어 버렸다.
그리고 나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살해당할 뻔했다는 듯한 표정이다.
"아들아…… 너 설마 나를 죽이려고?"
"이게 맵긴 한데 먹다 보니까 중독적이더라구요."
나는 머쓱히 웃으며 닭발을 뜯었다.
그리고 곧 퉤퉤 뱉었다.
이상하다. 왜 그때 그 맛이 안 나지?
아무래도 힘들고 고달플 때 먹어야 제맛이 나는 모양이다.
아니면 그날, 차유리가 나에게 최면을 걸었거나.
* * *
5월 마지막 주 어느 날.
엄서용 교수는 거울 속 자신의 머리숱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열심히 관리해 보려고 하지만 날이 갈수록 머리는 훤해지기만 했다.
젊을 때는 이마가 훤하다는 것이 칭찬으로 들릴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스트레스받으면 안 된다. 스트레스는 탈모의 적!’
엄서용 교수는 항상 출근 전에 거울을 보며 다짐하고는 했다.
하지만 병원생활에서 스트레스가 없을 수 없다.
가뜩이나 힘들기로 유명한 외과가 아니던가?
그중에서도 가장 스트레스는 단연 변규남이었다.
‘어휴, 저 골칫덩어리 자식.’
변규남 선생.
자신이 지도를 맡은 레지던트들 중에서 가장 속 썩이는 놈이었다.
분명 외과에 처음 지원했을 때만 해도 나름대로 총명한 인재였던 것 같은데…….
아침에 지각하는 것은 기본.
물어본 질문에 대답 못 하는 것도 부지기수.
시키는 일도 하는 둥 마는 둥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교수도 어느 순간 변규남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변 선생이 최근 들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를 박박 깎고 오더니 사람이 달라져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교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다. 왜 갑자기 성실해졌지?’
최근 며칠간, 변 선생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회진 때 지각하는 일도 없었고, 환자의 컨디션도 완벽하게 체크하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찍기라도 한 것 같다.
한 달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엄서용 교수로서는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디 보자. 이번 달 인턴 평가가……."
엄서용 교수는 교수실의 컴퓨터에서 인턴 평가 승인 팝업을 확인했다.
"음?"
그의 눈이 문득 커졌다.
변규남이 제출한 인턴 평가표 때문이었다.
그가 작성한 인턴 평가지에는 의아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