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49화 (49/241)

#49 중환자실의 해병대(9)

"죽는다구요?"

"예."

"뭐 제가 알 바는 아닌데…… 폐암 수술 잘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중환자실 잠깐 다녀온다고 어제 연락받았는데요."

남자는 퉁명스레 말한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일어나고 있는 동요를 감추지는 못한다.

분명 있다. 아직 아버지의 상태를 우려하고 있는 조금의 마음이.

나는 아들이 보여 준 그 약간의 틈 속으로 더 들어가고자 했다.

"섬망 때문에 회복에 큰 지장이 있습니다."

"서, 선망? 그건 또 뭡니까?"

남자는 어리둥절한 듯 되물었다.

이런 건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

나는 섬망에 대해 짧게 설명한 뒤 말했다.

"섬망이 완화되려면 심리적인 안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안정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방법은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옆에 있어 줘야 한다?"

"예. 아드님만이 어택중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나라고 미래의 가능성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은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인턴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이보세요. 제가 세상 물정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인턴이면 완전 초짜 의사 아닙니까? 그런 양반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고……."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불신이 가득하다.

이럴 때는 나의 인턴이라는 직위와 어린 나이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의사는 수술을 하거나 약으로 치료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가족이 약이라니, 그게 무슨 사이비 무당 같은 소리인지……."

남자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백팩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섬망에 대한 논문입니다."

어택중 환자의 치료 방법을 공부하기 위해 몇 번이나 열심히 읽었던 영어 논문이다.

그중 몇 장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다.

나는 내가 형광펜으로 칠해 놓았던 단어들을 가리켰다.

가족의 참여>

집에서 가져온 친숙한 물건>

"해외에서 연구한 결과를 보더라도, 치료 과정에 가족을 참여시키고 집에서 익숙한 물건을 가져오는 것이 효과가 큰 것으로 나타납니다."

"……."

"만약 본인께서 가지 않으신다면, 친숙한 물건이라도 전달해 주세요."

남자의 눈빛이 흔들린다.

내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던 모양이다.

시종일관 나를 의심하고 경계하던 눈빛이 조금 바뀌는 것 같다.

"저희 아버지 때문에 논문도 공부하고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까? 왜 그렇게까지……."

남자는 말하다 말고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손에 쥔 라이터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진 듯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쥐어짜 내듯 말했다.

"보아하니 아직 나이가 어린 의사분 같은데…… 부모 자식 사이가 안 좋은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이해합니다."

"10년 전…… 평생 고생만 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한테 쌍욕을 퍼붓고 의절을 했어요."

남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덤덤했던 표정 위로 괴로운 기억들이 조금씩 떠오르는 듯하다.

"그렇게 10년을 넘게 연을 끊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나보고 아버지 얼굴을 어떻게 보라는 소립니까?"

남자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굽은 어깨에서 말 못 할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졌다.

"……저는 물론 보호자분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아직 어리기도 하고요."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죽음 이후에 남겨진 가족의 후회스러운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움찔.

남자가 내 말에 반응한다.

고개를 든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지금 환자분에게 유일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보호자분입니다."

꾸벅―

나는 지갑을 꺼내 밥값을 계산하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렇게 내가 가게에서 나갈 때까지……

남자는 테이블에 앉아 착잡히 구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나는 바깥으로 나와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복잡하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완전히 넘어간 뒤다.

나는 햇볕이 아직 어스름하게 남아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옛날 생각이…….’

슥슥―

나는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 골목 계단을 내려와 큰길로 향하려 했다.

"잠깐만요!"

그때 등 뒤에서 남자가 나를 불렀다.

그는 불편한 걸음으로 내 뒤를 허겁지겁 따라오고 있었다.

주르륵―

어찌나 급하게 따라오는지, 비탈길에서 남자가 넘어질 뻔하는 것이 보인다.

나는 황급히 계단을 올라가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그…… 물건은 아무거나 되는 겁니까? 익숙한 물건이면 뭐든 되는 거냐구요."

"예. 환자가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거면 괜찮습니다."

내가 침착히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는 숨을 헐떡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기대는 마십쇼. 저도 그런 물건이 있는지 잘 모르니까요."

* * *

"끄윽."

그날 밤.

남자는 몸을 휘청였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

맨정신으로는 차마 발걸음을 떼기 힘들어서 소주를 마셨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오기 전에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저벅, 저벅.

남자는 낡은 연립주택의 계단을 올랐다.

깜빡, 깜빡.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노란 전등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한다.

곧 그는 문 앞에 도착했다.

페인트칠이 반쯤 벗겨진 문은 굳게 잠겨 있다.

문 한가운데는 종이 한 장이 붙여져 있었다.

<병으로 장시간 집을 비웁니다. 급한 용무는 아래로 연락 바랍니다>

"쯧."

남자는 혀를 찼다.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이런 걸 붙여 놓았단 말인가?

그는 손을 뻗어 종이를 떼려다 피식 웃었다.

하긴, 도둑이 들어와 봤자 훔칠 것도 없겠지.

이런 허름한 집에 무언가를 훔치러 들어온다면, 아마 그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도둑일 것이다.

스윽―

남자는 허리를 굽혀 화분 사이로 손을 넣었다.

늘 아버지가 비상용 열쇠를 놓아두던 곳이었다.

곧 손끝에 열쇠 하나가 잡혔다.

역시, 10년이 지났지만 변하지 않는 습관들은 여전한 듯했다.

철컥, 끼이익―

남자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마치 오랫동안 시간이 멈추어 있었던 것처럼.

현관문에서 거실로 향하는 짧은 걸음 중에도 노인 특유의 체취가 진하게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익숙한 물건이라…….’

그는 먼지 쌓인 거실을 지나 안방으로 향했다.

대체 뭘 가져가야 할까.

옷이나 이불은 안 된다. 벽시계를 뜯어서 가져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곧 깨달았다.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뭐라도 찾아야 되는데…….’

아버지는 물욕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들은 나무 진열장 안에 있을 터였다.

곧 진열장을 열고 구석구석 살펴보던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사진?’

흑백사진 속 인물은 세 명이다.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일곱 살의 자신.

아버지의 몸도 멀쩡하고, 자신의 신체장애도 악화되기 전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는 가족끼리 야구장을 갔었지.’

남자의 눈이 추억에 젖었다.

대한민국에 아직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이지만, 당시에도 고교야구는 인기가 많았다.

사진 속의 가족들은 야구장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이때 우리는 행복했을까?’

솔직히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40년도 넘은 옛 시간을 어떻게 전부 기억할 수 있을까.

오직 기록으로만 더듬어 볼 수 있을 뿐이다.

옛 사진들을 보자, 즐거운 기억과 괴로운 기억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떠올랐다.

하지만 중환자실에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사람이니, 사진보다는 아무래도…….

"그래. 이거면 되겠다."

그는 곧 진열장에 있는 물건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 * *

"그래서 그날 진짜 보호자를 찾으러 갔다고?"

"예."

"와, 그걸 진짜 가다니! 너 진짜 이상한 놈이었구나."

카페에 앉은 변 선생은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보호자가 뭐라디? 환자 보러 온대?"

"생각보다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것 같더라구요."

나는 짐짓 우울한 표정으로 시치미를 뗐다.

그러자 변 선생이 킬킬 웃었다.

"거 봐라. 내가 말했지? 어차피 가 봤자 헛수고라고. 10년 동안 코빼기도 안 비치던 아들이 이제 와서 아버지를 보러 오겠냐고?"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아이스티를 쪽쪽 빨았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마 후배인 내 앞에서 자기 말이 증명되어 좋은가 보다.

그는 중환자실에 올라갈 때까지 싱글벙글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심지어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를 붙잡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오늘 어택중 환자 면회 있어요?"

"글쎄요, 일단 아까까지 들어온 건 없는데요."

"푸웁."

변 선생은 웃음을 참는다.

그리고 내 옆으로 다가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어깨에 손을 올린다.

"아무래도 내가 내기에서 이긴 것 같은데."

"어휴, 그런가 봐요."

나는 낙담한 표정으로 말없이 누워 있는 어택중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우리 후배님, 삭발은 언제 할 거야? 응? 반삭까지도 허용해 줄게. 의외로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변 선생이 깝죽깝죽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러더니, 찰칵!

내 얼굴을 폰 카메라로 찍더니 어플로 대머리 합성까지 하면서 보여 준다.

"봐 봐. 잘 어울리잖아? 역시 잘생긴 놈은 대머리도 잘 어울리는구만. 크하하!"

변 선생은 계속해서 나를 놀린다.

딱밤이라도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만큼 얄미운 표정이다.

그때, 오전 면회 시간이 시작되며 보호자들이 중환자실로 들어온다.

그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보이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어택중 할아버지의 아들이다.

오늘은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깔끔한 옷차림이다.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주춤대다가 물었다.

"저…… 아버지는 어디 계시죠?"

"이쪽입니다."

나는 보호자를 베드로 안내했다.

그러면서 힐끗 옆을 보았다.

변 선생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다.

온갖 물음표가 그의 얼굴에 떠 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씩 웃으며 속삭였다.

"선배님. 삭발 기대하겠습니다."

"……."

변 선생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그것참 꿀잼이네.

나는 속으로 웃음을 꾹 눌러 담으며 보호자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베드 옆에는 차유리 선생이 미소를 지으며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저, 아버지는 주무시는 겁니까?"

"네. 여러 가지 약제들로 수면 중이십니다."

"아……."

"혹시 지금 깨워 드릴까요? 지금 깨운다 해도 섬망 때문에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은데……."

"아니. 아니요."

남자가 황급히 우리를 만류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오늘은 얼굴만 보고 가렵니다."

"그러시겠어요?"

"예."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유리 간호사와 나는 한 발자국 물러나 보호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

보호자는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입원 기간이 길어지면서 볼이 핼쑥하고, 며칠 동안 면도를 하지 못해 희끗한 수염이 가득한 얼굴.

보호자의 표정이 복잡해진다.

10년 만에 아버지를 보게 된 기분은 어떤 것일까?

"많이 늙었네요, 아버지."

남자가 말을 건다.

할아버지는 당연히 말이 없다.

하지만 마치, 둘 사이에 무언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스윽―

남자는 허리를 굽혀 환자의 귀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간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눈을 감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소곤소곤.

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10년 만에 만난 아버지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아마 본인만의 비밀일 것이다.

어쩌면 환자가 수면 중이어서 더욱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스테이션에 앉아, 부자 상봉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렇게 20분 후.

면회 시간이 끝나자, 그는 나에게 다가왔다.

무뚝뚝한 줄로만 알았던 그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선생님, 저번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아버지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그리고 이거……."

남자는 머뭇거리더니,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익숙한 물건>.

내가 보호자에게 가져다 달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익숙한 게 뭘까 생각해 봤는데…… 집에 보니까 진열장 안에 이게 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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