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46화 (46/241)
  • #46 중환자실의 해병대(6)

    시야가 혼탁하다.

    마치 비 오는 날 유리에 비친 풍경처럼, 눈앞이 뚜렷해졌다 흐릿해졌다를 반복한다.

    ‘여기는…… 내가 일하는 외과 중환자실이잖아?’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요한 밤.

    오직 간헐적인 기계음만이 중환자실을 지키고 있다.

    폭풍 전야.

    마치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스산한 분위기가 흐른다.

    스윽―

    그때 2번 베드에서 환자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어택중 할아버지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마른 얼굴이다.

    볼은 움푹 들어가고, 입에는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다.

    아무래도 지금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진 모양이다.

    쉬익― 쉬익―

    할아버지가 거친 숨을 내쉬며 눈을 빛낸다.

    흡사 야수의 눈빛이랄까?

    사람이 아닌 것 같다.

    팔과 가슴이 묶여 있기에 완전히 일어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오히려 할아버지를 더욱 자극하고 있는 것 같다.

    덜컹, 덜컹―

    환자는 미친 듯이 몸을 비틀기 시작한다.

    까드득―

    입에 물려 있는 인공호흡기 보호장치를 이빨이 갈릴 정도로 강하게 깨물고 있다.

    또다시 섬망이 시작된 것이다.

    ‘큰일이다. 간호사들이 이걸 봐야 할 텐데……!’

    나는 스테이션 쪽을 다급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야심한 시각.

    간호사들은 잠깐 한눈을 팔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의료진들도 사람인지라 24시간 내내 환자를 주시할 수 없다.

    "그으……!"

    할아버지는 팔에 힘을 준다.

    당장이라도 억제대를 끊어 버릴 기세다.

    노쇠한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 걸까?

    그렇게 팔목의 인대 하나하나가 피부를 뚫고 나올 정도로 힘을 주자, 손목의 억제대가 약간 헐거워진다.

    파악!

    할아버지가 얼굴을 비튼다.

    그리고 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에 달려 있던 인공호흡기 튜브를 거칠게 뽑아 버린다!

    삐이이익?!!

    곧 산소포화도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스테이션에 있던 간호사들이 놀라서 뒤늦게 달려온다.

    "2번 베드 환자 인공호흡기 튜브(e―tube) 뺐어!"

    "빨리 흉부외과 콜! 전화 안 받으면 CPR 방송해!!"

    간호사들이 소리친다.

    곧 당직 의사가 다급히 환자를 살핀다.

    하지만 이미 환자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충격적인 상황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맙소사. 셀프 익스투베이션(self―extubation)이라니?’

    그리고, 다음 순간―

    갑자기 화면이 휘어진다.

    휘익 하고, 나는 어느새 빨려 가듯 다른 장소로 움직였다.

    ……장례식장이다.

    어택중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이 보인다.

    야심한 시각인지 조문객은 아무도 없다.

    상주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40대 정도의 남자인데, 혼자 사진 앞에 서 있다.

    "그렇게 유언도 못 하고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상주는 얼굴이 벌겋고 두 눈이 충혈된 채로 조용히 말을 잇는다.

    물론 죽은 사람은 대답이 없는 법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아시죠? 저 아버지 평생 원망만 했잖아요. 솔직히 아버지가 아직도 미운데……."

    상주는 문득 목이 멘 듯 숨을 삼켰다.

    투둑―

    기어코 눈물이 떨어진다.

    걷잡을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턱 밑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

    "적어도 가시는 얼굴은 볼 걸 그랬네요. 그러면 미련이라도 남지 않았을 텐데……."

    * * *

    파앗!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젠장!

    기분이 묘하다.

    아직도 장례식장의 냄새가 내 몸에 배어 있는 착각마저 든다.

    눈앞에서 마동섭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본다.

    "갑자기 표정이 왜 그래?"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이 기분은 몇 번을 겪어야 익숙해질까?

    겨우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했다.

    휴우.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할아버지의 상태가 나빠져서 인투베이션(intubation, 기관 내 삽관)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기도로 들어가 있는 튜브를 스스로 뽑아 버리고, 결국에는 사망하게 된다.

    즉, 스스로 산소 공급을 끊어 버렸다는 것이다.

    멀쩡한 정신으로는 절대 하지 않을 자해행위.

    하지만 섬망이 발생한 상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또 사망이야?’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오기가 생긴다.

    이번만큼은 미래를 바꿔 보자.

    환자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고 말 거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병실 안에 있던 간호사가 황급히 뛰어나오며 외쳤다.

    "선생님, 여기 좀 봐주세요!"

    간호사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무슨 일이지?

    타닥―

    우리는 병실로 뛰어갔다.

    그러자 식사를 하던 할아버지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것이 보인다.

    "쿨럭, 쿨럭……!"

    얼굴이 사색이 되어 격렬하게 기침을 하고 있다.

    마동섭이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환자분이 식사를 하시다가 어스피레이션 된 거 같아요!"

    "이런……!"

    마동섭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스피레이션(aspiration).

    음식물이 식도가 아닌 기도로 넘어가서 폐까지 가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사레가 들린다는 뜻이다.

    언뜻 들어서는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심각한 상황이다.

    폐로 넘어간 이물질은 쉽게 폐렴을 일으킨다.

    노인들의 사망 원인 세 손가락 안에 폐렴이 들어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어택중 할아버지처럼 폐 수술을 받고 병동에서 치료받고 있는 환자들의 경우에는 더욱 위험하다.

    "세츄레이션(saturation, 산소포화도)는?"

    "85입니다!"

    환자의 기침이 멎은 후에도 산소포화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삐― 삐―

    삐― 삐―

    마동섭은 알람이 울리는 모니터로 손을 가져가 사일런스(silence, 알람 소리 정지) 버튼을 누른 뒤 단호하게 말한다.

    "환자 처치실로 빼고 인투베이션 준비합시다."

    "예!"

    타닥―

    곧 병동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간호사들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스테이션 한쪽에서는 장비들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환자를 처치실로 옮기기 위한 준비가 부산스럽다.

    마동섭이 나를 보며 말했다.

    "친구야. 오프 중에 미안한데 손 좀 빌려야겠다."

    "예. 저도 돕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흉부외과 소속 인턴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당장 환자의 상태가 위중한데 소속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물론, 만약 변 선생이 보았다면 <다른 과 환자까지 피곤하게 뭐 하러 신경 쓰냐?>라고 말했겠지.

    물론 나도 변 선생처럼 평범한 인간이다.

    출근이 귀찮고, 일하기 싫을 때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환자의 고통까지 방관하고 싶지는 않다.

    흉부외과 인턴들이 도착할 때까지는 내가 마동섭 선생을 도와야 한다.

    "밖에 누구 있지? ICU(중환자실) 자리도 좀 알아봐 주세요!"

    마동섭이 외친다.

    곧 간호사 한 명이 산소 공급을 위해서 산소통을 가져온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베드가 나갈 길을 확보한다.

    "자, 갑시다!"

    드르륵―

    곧 환자가 베드째 옮겨지기 시작한다.

    나도 베드를 밀며 환자가 이동하는 것을 도왔다.

    "선생님. 인투베이션이 꼭 필요한 상황인가요?"

    "내 판단은 그래."

    "혹시 인공호흡기 없이도 잘 회복할 가능성은요?"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했다.

    방금 꿈속에서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 때문일까.

    혹시 인공호흡기 치료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마동섭이 단호히 말한다.

    "친구야. 혹시 이라는 책 읽어 봤어?"

    아이씨유 북?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중환자실 전공서적 이름이다.

    분명 내가 일하는 곳에 비치된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갑자기 왜 전공서적 이야기를 하지?

    "거기 보면, 인투베이션 관련해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리고 마동섭이 투박한 영어 발음으로 말한다.

    "Hesitation invites trouble."

    직역하자면, <망설임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즉, 중요한 결정을 미루게 되면 환자에게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의사에게 막연한 희망은 금물이야. 흡인성 폐렴(aspiration pneumonia)으로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지금 이 방법이 최선이야."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동섭의 결단력과 카리스마에 감탄했다.

    내가 하루 종일 변 선생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유독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멋있게 느껴진다.

    ‘역시 흉부외과로 가야 하나?’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드르륵―

    환자는 이내 처치실로 옮겨졌다.

    마동섭이 망설임 없이 지시한다.

    "자, 여기 미다(midazolam) 3mg, 씨사(cisatracurium) 10mg 주세요."

    곧 환자에게 수면유도제와 근육 이완제가 투입되었다.

    이제 환자의 몸에 산소를 충분히 공급해야 한다.

    마동섭은 한 손으로는 페이스 마스크를 누르면서, 한 손으로는 앰부 백(ambu bag)을 짜기 시작했다.

    푸슉푸슉―

    왼손으로 마스크를 환자의 입 주변으로 누르는데, 그 무시무시한 악력에 공기가 하나도 새지 않는다.

    그리고 오른손의 힘만으로 앰부 백을 파워풀하게 짜기 시작한다.

    곧 환자의 몸 안으로 산소가 우악스럽게 들어간다.

    ‘우와…….’

    나는 잠시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짐승처럼 터프하다.

    원래 앰부는 정상 성인이 두 손으로 잡고 눌러야 하는 것인데…….

    역시 의사는 피지컬인가?

    다시 한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장면이다.

    슬쩍 옆을 보니, 간호사들도 그의 남성미 넘치는 모습에 눈에서 하트를 발사하고 있다.

    "자, 친구야? 여기서 앰부 이렇게 좀 짜 줘. 템포는 3―4초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

    "예!"

    나는 앰부를 넘겨받았다.

    내가 옆에서 앰부를 천천히 짜는 동안, 마동섭은 페이스 마스크를 잡고 있었다.

    곧 산소 수치가 99%를 가리키고, 환자가 충분히 수면에 빠져 마취가 된 것을 확인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기도에 관을 집어넣어야 한다.

    "친구야. 인투베이션 해 봤어?"

    "아뇨, 아직."

    "언젠가는 하게 될 테니까 잘 봐 ?둬."

    마동섭은 나를 슬쩍 보더니, 시범을 보이듯 간호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링고(laryngoscope) 주세요."

    "예."

    ‘라링고스코프’.

    한글로는 후두경.

    목 안의 기도를 볼 수 있게 만드는 의료장비이다.

    곧 마동섭이 건네받은 후두경으로 환자의 입 안을 젖히고 목 안을 슬쩍 본다.

    그러고는 목 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오른손을 슥 내밀며 간호사에게 말한다.

    "이 튜브(E―tube)."

    간호사는 마동섭의 오른손에 튜브를 쥐여 준다.

    그때 마동섭이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갸우뚱한다.

    "쓰읍……."

    표정이 왜 저러지.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시야에 문제가 있는 거야!’

    분명 환자의 목 안쪽에는 가래가 많을 것이다.

    게다가 식사 중이었으니 음식물도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보조 역할인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동섭은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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