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45화 (45/241)
  • #45 중환자실의 해병대(5)

    "빅 써전(big surgeon)이 되고 싶어서 외과에 지원했지."

    "예?"

    "왜. 의외냐?"

    변 선생이 픽 웃으며 말했다.

    의외였다.

    사실 질문을 던지면서도 나는 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마 변 선생은 성적에 맞춰서 지원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외과 계열은 아무래도 경쟁률이 낮으니까.

    하지만 그의 대답은 다소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TV에 보면 외과의사들이 그렇게 멋있더라고. 수술실에 딱 서서 ‘메스!’ 이렇게 외치잖아. 나는 그런 멋있는 써전 (surgeon, 외과의사)이 되고 싶었거든."

    와…….

    나랑 너무 비슷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다.

    마치 데칼코마니를 보는 것 같다.

    게으름의 대명사처럼 보이는 변 선생도 그런 꿈을 꾸었던 적이 있었구나.

    "한때는 그런 꿈을 품었는데, 지금은 후회한다."

    "후회요?"

    "너는 외과의사 절대 하지 마라."

    이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은데.

    마치 그거 같다.

    흡연자들이 담배 피우면서 너희들은 이런 거 하지 마라, 하는 것 같은.

    "너도 이제 조금 겪어 봐서 느낌이 오지 않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환자들 평생 보면서 살고 싶냐?"

    변 선생의 말이 이어졌다.

    외과는 응급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이 수시로 밀려든다.

    그리고 주요 장기를 수술한 환자들은 목숨이 간당간당할 때가 많다.

    "열심히 일할수록 멘탈 나갈 일밖에 없는 게 바로 이 바닥이더라고."

    죽음과 항상 가까이에서 일하는 부서가 존재한다.

    소위 종합병원의 메이저라고 불리는 내/외/산/소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가 그것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바이탈(vital)을 다룬다는 의사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과(科)이지만, 그만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물며 수술실에서 내 손으로 째고 꿰맸던 환자가 수술 후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수술받기 전에는 걸어서 병원에 들어왔던 환자가 말이야. 그런 일이 있고 나면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잔다니까."

    변 선생이 피식 웃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아마 그에게도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을 것 같다.

    그는 빨대로 음료를 휘적휘적 저으며 말을 이었다.

    "살다 보니까 그냥 적당히…… 뭐든지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좋더라고. 과몰입해서 일해 봤자 죽을 환자들은 죽더라…… 내가 달라붙어 있었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도 처음부터 나태한 성향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번 부정적인 경험을 겪다 보면, 사람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결국 지금의 모습이 그가 내린 정답이라는 걸까.

    "뭐, 아무튼 굳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과 쪽으로 오겠다면……."

    쪼로록.

    변 선생은 얼음 사이로 남은 음료수를 빨아 먹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네 미래의 모습이다."

    안 돼!

    정신이 번쩍 든다.

    그것만큼은 사양이다.

    나는 변규남 선생 같은 의사가 되기 위해 연국대병원에 온 것이 아니다.

    내 롤모델은 백의신이란 말이야!

    "그나저나 너한테 줄 게 있는데."

    "뭡니까, 그게?"

    "자. 선배가 후배에게 주는 선물이다."

    변 선생이 아까부터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넨다.

    뭐지, 이게?

    나는 내용물을 확인하고 놀랐다.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크록스 신발인데, 딱 봐도 말랑말랑하고 편해 보인다.

    내 신발 사이즈는 대체 어떻게 알고?

    "왜. 맨날 카페에서 후배 뜯어먹는 노양심 선배인 줄 알았냐? 그동안 뜯어먹은 커피값이다."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다.

    변규남, 이 사람은 도대체…….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애매한 인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구나.

    "오늘부터 그거 신고 다녀라."

    "감사합니다 선배님."

    "크크크. 선배 좋다는 게 뭐냐? 이제 올라가자."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로퍼 대신 선물받은 신발을 신고 출근을 했다.

    훨씬 발이 편한 것이 느껴진다.

    그렇게 회진을 기다리고 있을 때, 엄서용 교수님이 ICU(중환자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

    오늘도 머리가 빛나는 엄서용 교수님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아래로 내 발 쪽을 향하고 있다.

    "인턴 선생님은 며칠 전에 병원 공지 사항 확인 못 했나 보지?"

    "예?"

    "수술방 밖에서는 그런 미끄러운 신발 신지 말라고 공지가 내려왔을 텐데. 환자들이 따라서 신다가 낙상 사고가 많다고 말이야."

    …….

    전혀 몰랐다.

    공지 사항이라니?

    나는 인턴이라 그렇다 치고, 외과 레지던트면 그런 공지 사항은 직접 받았을 텐데…….

    나는 당황한 채 변규남 선생을 바라보았다.

    교수님이 계속해서 말한다.

    "규남아, 너 이거 수술방에서도 신는 신발 밖에서도 신고 다니는 거지? 너같이 수술방에서 신던 신발 병동이랑 ICU에서도 신고 다니면 수술장 안에서 감염 확률도 높아지지 않겠니, 응?"

    "어…… 죄송합니다."

    변 선생도 공지 사항을 확인하지 못했는지 당황하며 쩔쩔맨다.

    잠시 후.

    회진이 시작되자, 교수 뒤에서 변 선생은 나에게 속삭였다.

    "미안."

    야이 씨……!

    욕이 목까지 올라왔다.

    ‘대충대충’이 삶의 모토인 그가 공지 사항을 자세히 읽어 봤을 리 없지.

    하여간 이 인간이랑은 붙어 다녀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 * *

    며칠 뒤.

    나는 오프 시간을 틈타 흉부외과 병동으로 올라갔다.

    마침 스테이션을 지나던 마동섭 선생이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왔다.

    "어, 인턴 친구? 웬일이야?"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좀 뵙고 싶어서요."

    "어택중 할아버지?"

    마동섭은 약간 놀란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한번 돌봐 드렸던 환자니까 마음에 걸려서요."

    "그래서 여기까지 보러 왔다고?"

    마동섭은 활짝 웃었다.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는 내 어깨에 덥석 손을 올리더니 어디론가 향했다.

    "자, 따라와."

    성큼성큼.

    마동섭은 나를 끌다시피 하며 걸었다.

    덩치가 크니까 그냥 걷기만 하는데도 바람이 느껴질 정도다.

    ‘적어도 이 선생님은 어디 가서 얻어맞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역시 의사도 피지컬이 중요한 것일까?

    문득 얼마 전 할아버지의 펀치에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환자에게 얻어맞지 않으려면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마동섭의 뒤를 따라갔다.

    곧 나는 병실로 안내받았다.

    평범한 6인실이었다.

    커튼을 열자, 할아버지가 가장 안쪽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코에 여전히 산소 줄이 걸려 있는 어택중 할아버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미소를 짓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그러믄요.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일도 바쁘실 텐데."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나이가 한참 어린 나에게도 꼬박꼬박 정중한 말투로 존댓말을 하신다.

    역시 제정신일 때는 참 젠틀하신 분이다.

    물론 밤만 되면 180도 달라지긴 하지만…….

    나는 허리를 숙여 환자와 얼굴을 맞대고 말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간밤에 좋은 꿈을 꿨거든요."

    "좋은 꿈이요?"

    "오래전에 하늘나라로 떠났던 전우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살아서 돌아오는 꿈을 꿨어요."

    어라, 그거…….

    설마 내가 저번에 연기를 했던 것 때문인가?

    김 일병인 척 역할극을 했던 것이 환자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오랜만에 전우도 만나고 좋으셨겠네요."

    "그래요. 마음의 짐이 조금 덜어진 기분이에요. 아마 그 친구, 지금쯤 다시 태어나서 잘 살고 있지 않을까요. 결혼도 하고 자식도 보고……."

    그렇게 말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은 행복한 상상을 하는 표정이다.

    "할아버지도 얼른 건강해지셔서 가족분들 뵈셔야죠."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할아버지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이런, 말해선 안 될 걸 말했나?

    "가족이라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얼굴 못 본 지 10년이 넘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울적하다.

    나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었다.

    정신 차려 신선한!

    환자가 가족관계가 좋았다면 면회를 당연히 왔겠지!

    나는 곧바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아니에요.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아온 탓이지요."

    할아버지는 옅게 웃었다.

    지난 인생을 회상하는 것일까.

    그의 주름진 눈가에는 회한이 가득하다.

    "생각해 보면 아들에게 미안한 일밖에 없어요. 한참 자랄 때도 아무것도 못 해 줬고…… 물려줘선 안 될 것까지 물려줬으니……."

    물려줘선 안 될 것?

    그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할아버지가 기침을 연신 해 댔다.

    "쿨룩쿨룩…… 크왁……."

    할아버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섬망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어택중 할아버지는 폐암 수술을 받은 환자다.

    개흉술(thoracotomy)을 통해서 폐 절제술(left upper lobectomy)을 받았기에,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가래 뱉으실 수 있겠어요?"

    나는 환자를 도와주려 했다.

    가래를 뱉지 못할 경우, 기관지에 가래가 붙어서 폐의 정상적인 활동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한다.

    "콜록, 콜록."

    할아버지의 기침은 쇤 소리를 내며 헛돌 뿐이다.

    마치 구멍 난 공기주머니를 쥐어짜는 상황 같다고 해야 하나.

    곧 마동섭 선생이 다가와 환자에게 가래를 내뱉기 위한 호흡법 등을 알려 주었다.

    잠시 후, 나는 병실에서 나와 마동섭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수술 후 경과가 어떤 편인가요?"

    "이쪽 분야에 관심 있어?"

    "저도 언젠가는 흉부외과를 돌게 될 테니까 미리 배워 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흐음."

    마동섭은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귀찮아하는 내색 없이 나에게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뭐, 수술 자체는 잘된 편이야. 종양은 완벽하게 제거됐으니, 회복만 잘하시면 당분간은 문제없을 거야."

    "다행이네요."

    "하지만 환자가 언제 나빠질지 몰라. 원래 폐 기능도 안 좋았던 분인데, 밤만 되면 섬망 때문에 몸부림치느라 회복이 생각보다 잘 안되고 있거든."

    "그러면 역시 중환자실에 계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내가 물었다.

    중환자실에서는 항상 환자 모니터링이 가능하다.

    그리고 환자가 나빠지는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중환자실 같은 환경은 섬망을 더 악화시킬 수 있지."

    "아……!"

    나는 입을 벌렸다.

    잠깐 바보가 된 기분이다.

    중환자실 자체가 섬망의 위험 요인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섬망 때문에 중환자실에 있는 게 좋은데, 중환자실에 있으면 섬망이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겁니까?"

    "그래. 바로 그게 문제야."

    젠장, 뭐가 이래?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뱀을 보는 것 같다.

    일종의 딜레마라고 해야 할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한 상황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인턴인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역시 변 선생의 말대로, 내 손을 떠난 환자에게는 신경을 끄는 게 맞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파앗―

    내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미래의 충격적인 장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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