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중환자실의 해병대(4)
김 일병이라고?
나는 당황했다.
잠깐 장단을 맞춰 주었을 뿐인데, 이게 진짜로 효과가 있을 줄이야…….
"김 일병 맞나?"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표정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장동건이 원빈을 바라보듯 애처로운 눈빛이다.
어떻게 할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대장님. 김 일병입니다."
"김 일병, 살아 있었나? 나는 자네가 죽은 줄로만……."
"적군의 총탄 사이로 열심히 뛰어 돌아왔습니다!"
"그…… 그랬던가?"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변 병장님?!"
나는 변 선생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사타구니를 걷어차이고 끙끙대던 변 선생은 황당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제발 호응 좀 해 줘라!
나 민망하다!
내 간절한 눈빛을 읽었는지, 변 선생이 갑자기 과장된 연극 말투로 말한다.
"크어억, 적군의 총탄이 영 좋지 않은 곳을 스쳐서……."
"푸흐읍."
차유리가 웃음을 터트린다.
주위의 간호사들도 등을 돌리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다.
웃지 말라고!
민망해 죽겠네!
어쨌거나 우리의 연기가 효과가 있었던 모양인지, 할아버지는 다소 누그러진 모습이다.
"자네 살아 있었구만……!"
"네, 위생병들이 곧 온다고 합니다. 소대장님 총에 맞은 상처부터 치료하셔야지요."
"……응? 내가 총에 맞았던가?"
"왼쪽 가슴에 통증이 있지 않으십니까? 거기 아직 총알이 박혀 있습니다. 절대로 건드리시면 안 됩니다!"
나는 할아버지의 흉관을 가리켰다.
할아버지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와 변 선생은 필사적인 연기력으로 할아버지를 어르고 달랬다.
이 정도면 오스카까지는 아니더라도 청룡영화제 주연상감이다.
곧 소대장…… 아니, 어택중 할아버지는 흉관에서 서서히 손을 떼고 얌전히 베드에 누웠다.
"휴우."
나는 한숨을 돌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간호사들이 전부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다.
특히 차유리의 표정이 가관이다.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웃음을 참더니,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올린다.
아오, 막상 저지르고 나니 쪽팔리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고 싶다!
그때,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난리가 났다고 하더니 어제보다는 스테이블(stable, 안정적) 하네요?"
저벅, 저벅―
중환자실에 조폭이 들어온 줄 알았다.
만약 의사 가운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흉부외과 마동섭.
몇 번을 봐도 참 적응이 되지 않는 험상궂은 외모다.
"환자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네요. RASS 4점은 될 줄 알았더니. 이 정도면 3점도 안 되겠는데?"
RASS 점수란 중환자실 환자들의 불안초조 정도를 숫자로 나타내는 지표이다.
4점이면 전투적이고 폭력적인 상태를 의미하며, 3점이면 수액 라인 혹은 흉관 등을 뽑으려는 상태를 말한다.
"어휴, 말도 마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리도 아니었어요."
담당 간호사가 아연실색하며 말한다.
마동섭은 씩 웃으며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어디 보자…… 지금 이 정도면 덱스메데토미딘(dexmedetomidine)만 걸어도 잘 주무실 거 같은데요? 어제는 할돌(haloperidol) 5mg 한 번 10mg 한 번으로 겨우 주무셨는데."
그의 입에서 몇 가지 용어가 나온다.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약물들의 이름이다.
그중에서 덱스메네토미딘은 환자를 수면유도 상태로 이끌어 주는 약물이다.
종종 저혈압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지만 다른 약물에 비해서 비교적 부작용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 환자분 주무시겠습니다~ 여기 안대랑 귀마개 해 주세요."
곧 마동섭의 처방에 따라 약물이 투입되었고 안대와 귀마개가 착용되었다.
곧 할아버지는 몇 번 중얼거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잠들었다.
오늘은 비교적 환자를 얌전히 잠재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간호사 선생님들, 고생하셨습니다."
"어휴, 말도 마세요. 완전히 RASS 4점이었어요. 우리 당직 인턴 쌤들 하루씩 돌아가면서 환자분한테 얼굴을 맞았다구요."
"오늘 또 주먹을 쓰신 거예요? 하하. 그런데 어떻게 진정시킨 거예요? 아까 전화받을 때만 해도 뒤에서 할아버지 소리치는 게 들리던데……."
마동섭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러자 간호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인턴 쌤이 한 건 했죠."
"인턴 쌤이?"
"연기를 아주 실감 나게 잘하시던데요? 무슨 배우인 줄 알았어요."
그렇게 말하자 간호사들이 나를 보고 깔깔 웃는다.
마동섭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이다.
"연기라뇨?"
그야 당연히 감이 안 잡히겠지.
어떤 인턴이 중환자실에서 즉석으로 전쟁터 상황극 같은 걸 하겠는가?
막말로 또라이 같은 인간들이나 할 짓이다.
‘그리고 그 또라이가 나고.’
나는 민망하게 먼 산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이걸로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놀림받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암담하다.
이렇게 병원에서 흑역사가 하나 생성되는구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번 달에 응급실에서도 그렇고…… 위기 대처 능력이 상당히 뛰어난 친구인가 보네."
마동섭이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본다.
왠지 모르게 눈빛에서 은근한 호감이 느껴진다.
"신선한이라고 했었나? 우리 저번에도 봤었지?"
"예. 응급실에서 뵀었죠."
"왠지 우리 앞으로도 자주 볼 것 같은데 친하게 지낼까?"
그렇게 말하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나름대로 친근함의 표현인 것 같은데…….
솔직히 외모 때문에 좀 무섭다.
똑같은 표정으로 "사채를 썼으면 빚은 갚아야지?"라든가 "척추 접히고 싶냐?" 같은 대사를 쳐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 같다.
"흠, 흠."
그때, 변 선생이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크흠, 섬망이 이렇게 심하면, 주변 환자들도 숙면을 못 할 텐데……."
변 선생이 허공에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다.
분명 마동섭의 덩치와 인상에 쫄아서 대놓고 말은 못 하는 듯하다.
그러더니 스윽 다가와 말을 건다.
"아이고 선생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이 환자, 원래는 흉부외과 중환자실로 갔어야 되는 환자 아닙니까?"
"아, 맞습니다. 그런데 저희 쪽 중환자실이 베드가 없다고 해서요. 외과에서 양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동섭이 대답했다.
그냥 평범하게 말하는 것인데도 목소리가 굵어서 위압감이 느껴진다.
외과 vs 흉부외과 사이의 은근한 신경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변 선생도 쉽게 물러나지는 않았다.
"중환자실에 있으면 오히려 섬망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을 텐데요?"
"환자분 섬망이 너무 심해지면 병동으로 올려 보낼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게 좋겠죠? 병동에서 면회도 좀 자주 하면 섬망이 호전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환자는 지금도 산소 의존도가 있어서요. 일단 중환자실에서 하루 이틀만 더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동섭이 단호히 말했다.
그러자 변 선생도 적당히 물러났다.
"뭐, 그러시죠. 만약 무슨 일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변 선생의 말투는…….
마치, 분명히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
* * *
이틀 뒤.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섬망이 전염병도 아닌데, 다른 환자들에게 옮겨 간 것이다.
마치 늑대가 한 마리 울기 시작하면 다른 늑대들도 공명하며 울부짖기 시작하는 것처럼…….
동시에 여러 명의 환자들이 소리치기 시작한다.
"지뢰 조심해!"
"내가 냉장고 문 닫으라고 했지!"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서로 다른 외침이 대화라도 하듯 이어진다.
물론 내용들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래서 더 기괴하다.
단체로 귀신에라도 들린 것 같은 광경에 식은땀이 난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라 해도 믿을 정도지만, 어디까지나 실제 상황이다.
한 명의 섬망 환자가 다른 환자의 컨디션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고, 갑자기 다들 왜 이러실까!"
"영은아, 4번 베드 환자 억제대 좀 채워 줘!"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중환자실이 대번에 시장 바닥처럼 변한다.
나도 당장 어느 환자부터 봐줘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돌겠네. 하룻밤에만 세 명의 섬망 환자라니……!’
결국 변 선생의 예언이 사실이 되었다.
이 정도면 거의 변스트라다무스 아닌가?
게다가 섬망 환자들만 문제가 아니다.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중환자들도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 제발 미친 사람들 좀 조용히 시켜요! 잠 좀 잡시다!"
"무서워 죽겠네!"
중환자실이 혼란의 도가니다.
물론 다른 환자들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대부분 큰 수술을 받고 나온 상태인 만큼 신경이 잔뜩 날카로울 것이다.
그 와중에 옆자리에서 귀신에 홀린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니 불만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말했지? 저 환자 폭탄이라고."
그때 크록스 신발을 끌며 변 선생이 나타난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콜폰을 들어 올리더니 앓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흉부외과 당직 선생님이신가요? 어휴, 이리 좀 빨리 와서 봐주세요. 저희도 죽겠습니다."
밤만 되면 섬망에 시달리는 어택중 환자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결국 다음 날, 어택중 환자는 일반 병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 * *
"크, 이제 속이 시원하네."
쪼로록.
변 선생이 카페에서 아이스티를 들이킨다.
골치 아팠던 환자를 눈앞에서 사라지게 했더니 후련하다는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나는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섬망이 심하던데, 병동에서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아직 산소 치료도 필요한 것 같던데요."
"그야 그쪽 사정이지. 내가 흉부외과 환자까지 신경 써야 되냐?"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잘못된 말은 아닌데.
왠지 변 선생에게 거부감이 든다.
"야 인마. 원래 자기 맡은 환자 관리하기도 벅찬 거야. 네 손에서 떠난 환자 신경 쓰지 마~"
변 선생이 하품을 하며 말한다.
그를 보다 보면 가끔 혼란스러운 기분이 든다.
그동안 내가 이상적으로 머릿속에 그려 왔던 의사의 모습은, 오로지 환자를 살리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변 선생은 달랐다.
그가 나에게 보여 주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의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가장 평범한 소시민적인 의사의 모습이기도 했다.
까다로운 일은 피하고, 적당히 편하게 살고 싶은 모습…….
어쩌면 그것이 가장 평균적인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변규남 선생은 왜 굳이 외과를 선택했을까?’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저런 성향의 사람이라면 더욱 잘 맞는 과가 있지 않았을까?
굳이 몸이 힘든 외과를 선택할 이유가 없었을 것 같은데.
"선배님은 왜 외과의사가 되셨습니까?"
나도 모르게 불쑥 물어보았다.
그러자 변 선생에게서 전혀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