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중환자실의 해병대(2)
"네, 이 환자분은 딱 봐도 섬망기가 있네요. 사리 분별력이 떨어지는 혼잣말을 하시는 것 보니……."
"아아……."
차유리 간호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섬망(delirium).
급성 의식장애.
주로 큰 수술을 마친 노인 환자에게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섬망에 빠진 환자들은 갑자기 환각을 보거나 망상에 빠지게 되고, 헛소리를 하게 된다.
"중환자실에서 일하면 딱 봐도 감이 오거든요. 이 환자 곧 섬망이 올 것 같다,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차유리의 목소리에는 전혀 당황함이 없다.
하긴, 섬망은 의외로 흔한 증상이다.
중환자실 환자 세 명 중 두 명은 섬망을 겪게 된다는 통계도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섬망 환자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물론 ICU(중환자실)에 섬망 환자가 많다는 건 얼핏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나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환자분. 지금 올해가 몇 년도인지 아시겠어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환자가 TPP(Time 시간, Place 장소, Person 사람)를 올바르게 인식하는지 파악하기 위함이다.
이를 ‘지남력’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곧 할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일천구백…… 칠십 년……."
1970년?
아이고, 맙소사.
무려 50년 전이다.
아무래도 환자는 지남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는 상태인 듯하다.
"섬망 맞죠?"
"맞네요."
나는 차유리 간호사와 조용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의 상태는 어찌 보면 치매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치매>와 <섬망>은 엄연히 다르다.
꾸준히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치매와는 달리, 섬망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증상이 격렬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어느 날 갑자기 증상이 사라지기도 한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혼자 전쟁터에 나온 것처럼 얘기하고 계시는 게 심상치 않더라구요."
"에구구…… 오늘 밤에는 긴장 좀 해야겠네요."
"밤이요?"
"이런 환자분들은 보통 밤이 되면 증상이 더 심해지거든요."
섬망은 보통 밤에 더 많이 발생한다.
왜인지 정확한 이유는 의사들조차 모른다.
이 때문에 보호자들은 섬망 환자를 두고 ‘귀신에 들린 것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과장 같다고?
절대 아니다!
실제로 증상을 직접 눈으로 보면, 그런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푸캇산에 가면…… 숲속을 조심해…… 부비 트랩이 있을지 몰라……."
중얼중얼…….
할아버지는 계속 혼잣말로 횡설수설하고 있다.
지금은 인지 기능이 저하된 채 헛소리를 하는 정도이지만, 심한 경우 행동장애까지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밤에 악화되어 수면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만약 액팅 아웃(acting out, 반사회적인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는 행위)까지 하게 된다면 중환자실이 꽤나 시끄러울 것이다.
‘중환자실에서는 정말 다양한 일이 일어나는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차유리 간호사는 능숙하게 당직 흉부외과 레지던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C03S인데요. 어택중 환자가 지남력이 떨어지고 이상한 소리를 하네요. 와서 한번 봐주셔야 할 것 같아요!"
곧 차유리 간호사는 전화를 끊고 수액을 준비한다.
주먹만 한 크기의, 초록빛을 띠는 노란색 20% 알부민(albumin) 병을 꺼내 수액 라인을 꽂으려 한다.
그러다, 실수로 손이 미끄러져 병을 떨어트렸다.
"에구!"
탁, 데구르르―
유리병이 침대 프레임에 부딪혀 환자의 발치로 데굴데굴 굴러간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어택중 할아버지가 날다람쥐처럼 펄쩍 뛰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호 안에 수류탄!!"
"엄마 깜짝이야!"
화들짝!
차유리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환자가 갑자기 요동을 치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난다.
"환자분, 움직이시면 안 돼요!"
간호사들이 다들 기겁하며 달려왔다.
할아버지는 가슴에 흉관뿐만 아니라, 팔에도 여러 라인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몸부림을 치다가 라인이 빠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하지만 어택중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비장한 표정으로 외치고 있다.
"수류탄이야! 다들 피해!!"
아니, 이게 무슨…….
전쟁영화도 아니고.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수류탄을 피하기 위한 할아버지의 몸부림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환자분, 수류탄이 아니라 약병입니다 약병!"
나는 약병을 보여 주며 환자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한동안 수류탄, 수류탄을 중얼거리다가 곧 잠잠해졌다.
"……휴우."
상황이 진정되자, 우리는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식은땀을 닦으며 스테이션으로 돌아오니, 변 선생이 나를 보며 낄낄댔다.
"당황했냐?"
"예. 섬망 환자 보는 건 처음이라서요."
"크크…… 근데 저 할아버지는 좀 독특하긴 하네. 살다 살다 중환자실을 전쟁터로 착각하는 분은 나도 처음 봤다."
변 선생은 낄낄대며 웃더니 다시 핸드폰 게임에 열중했다.
그때 차유리 간호사가 다가와 말했다.
"어휴, 큰일 날 뻔했네."
"괜찮으세요?"
"예. 아까 간호정보조사 기록지 보니까, 실제로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신 환자래요."
"아…… 그래서 섬망 이벤트 때 군대 관련 용어를 쓰셨구나."
"그랬어요?"
"저를 위생병이라 부르더니, 우측 참호를 우회해서 전진하라고 하던데요?"
"푸핫, 귀여우신 할아버지네요."
내 말에 차유리가 웃음을 지었다.
나는 업무가 비는 틈을 타 차트를 열어 보았다.
곧 어택중 환자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이네. 50년 전 참전 기록…….’
환자는 1970년도에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2년간 전쟁터에서 복무하신 분이었다.
현재는 폐암이 발생하여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는 중이다.
‘참전 용사셨구나.’
베트남 전쟁…….
신문 기사에만 접했던 환자를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trauma, 정신적 외상)가 너무 컸던 것일지도 모른다.
오죽했으면 50년 전의 일을 잊지 못하고 여태까지 시달리고 있을까?
"그런데 저 환자분, 폐암 수술 받았으면 흉부외과 쪽으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쪽 중환자실에 베드가 꽉 차서 여기로 왔단다."
내 질문에 변 선생이 대답했다.
가끔 이런 일도 있다.
한쪽 중환자실의 베드가 가득 차면, 다른 중환자실의 베드를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어느 쪽에 있든 내 입장에서 별 차이는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외과 소속인 변 선생은 귀찮아하는 눈치다.
"에이. 하필이면 저렇게 시끄러운 환자가 우리 쪽으로 넘어오냐, 번거롭게시리."
변 선생이 투덜댔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귀찮은 나무늘보 같은 표정으로 등받이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쯧. 난 모르겠다. 어차피 내가 주치의도 아닌데 뭘~ 무슨 일 생기면 네가 알아서 흉부외과에 잘 노티(noti)해라."
그렇게 말하며 하품을 한다.
물론 이해는 간다.
변 선생의 입장에서, 자신의 책임도 아닌 환자에게 신경을 쓸 이유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왠지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들린다.
나라면, 적어도 내가 담당하는 장소에 있는 환자라면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일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어어, 또 시작하시는 것 같은데요……?"
차유리 간호사가 다급히 말한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다시 어택중 환자의 섬망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치 독수리처럼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시동을 걸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더니, 벌떡 상체를 일으킨다.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해병대~"
갑자기 군가를 우렁차게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자 겨우 잠들어 있던 다른 중환자들까지 하나둘씩 뒤척이며 깨어나기 시작한다.
"얼룩무늬 번쩍이며 정글을 간다~"
"할아버지, 진정하세요!"
우리는 환자를 말리려 했지만, 그 뒤로도 한참 섬망은 이어졌다.
결국 우리는 한 시간에 걸친 실랑이 끝에 환자에게 수면 진정제를 투여해야 했다.
70세 환자, 어택중.
이름부터 범상치 않았던 그는, 내가 만난 가장 특이한 환자 중 한 명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퀭한 눈빛으로 회진을 돌았다.
어젯밤 당직 때 섬망 환자 보랴, 다른 콜들 처리하랴 바빴기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탓이다.
반면, 해가 뜰 무렵.
어택중 환자의 정신은 거짓말처럼 멀쩡해졌다.
마치 간밤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한 모습이다.
심지어 젠틀한 말투로 아침 인사를 건네기까지 한다.
"어휴, 안녕하십니까. 선생님들. 이른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지킬 앤 하이드도 아니고…….
마치 두 개의 인격이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나는 환자를 소독해 주며 넌지시 물었다.
"환자분, 간밤에 편하셨어요?"
"어유, 그럼요."
"혹시 기억나는 일은 있으세요?"
"허허. 그냥 편히 잠을 잔 기억밖에 없어요. 선생님들이 잘 돌봐 주신 덕분인가 봐요."
그야 수면 약을 맞으셨으니까 편히 주무셨겠죠……?
"그런데 왠지 목소리가 좀 안 나오네요, 목이 좀 쉰 것 같기도 허고, 허허허."
그야 밤새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으니까 그렇겠죠……?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는 속으로 삼켰다.
어제 귀신에 홀린 것 같았던 모습에 비해, 오늘은 너무나도 정상적인 모습이다.
혹시 몰라서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오늘 며칠인지 아시겠어요?"
"가만 보자. 어제 수술받았으니까 오늘이 5월 17일이던가요?"
날짜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
이 정도면 완벽히 정상에 가깝다.
황당하긴 하지만, 어쨌든 안도감이 든다.
‘어쩌면 섬망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을지 몰라.’
생각해 보니 어제가 중환자실 첫날이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이 안 되니 환자의 심리가 불안정했을 것이다.
오늘부터는 괜찮아지지 않을까?
"환자분, 그럼 쉬세요. 불편한 거 있으면 말씀하시구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선생님."
다행히 낮 시간 동안 특별한 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곧 저녁 6시가 되어 나의 일과가 끝났고, 다른 인턴 동기와 교대를 했다.
인턴 동기인 윤성이는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을 듣더니 포복절도했다.
"푸하하, 수류탄이라고?"
"야, 웃지 마. 환자분 듣겠다."
"크크크…… 진짜 웃기네. 아무리 섬망이라도 그렇지, 뭐 그런 헛소리를 다 하신대?"
"아무튼 낮 동안은 멀쩡하시긴 했는데 밤 동안 어떻게 되실지 몰라."
내 말에 인턴 동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야야, 걱정 마. 중환자실 베드에 꼼짝없이 누워 있는 노인 환자가 사고를 쳐 봐야 얼마나 치겠어? 여차하면 힘으로 제압하면 돼."
나는 뭐라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쩌면 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향했다.
* * *
다음 날.
나는 출근을 하면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역시 가장 궁금한 것은 어택중 할아버지의 상태였다.
‘밤 동안 별일 없으셨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나는 간호사들과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뒤, 할아버지의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환자 시트에 붉게 물든 자국들이 여럿 보였던 것이다.
‘뭐야, 저건…… 설마 핏자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