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39화 (39/241)
  • #39 아이 씨 유(6)

    파앗―

    마치 내 몸의 모든 감각들이 세포 단위로 분해되었다가 재구성되는 듯한 기분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카페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중환자실.

    창밖이 어둡고 약한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시간은 밤인 것 같다.

    그런데 환자 한 명이 흰 포에 쌓여 옮겨지고 있다.

    마스크를 쓴 검은색 정장을 입은 사람이 이동용 베드를 끌고 밖으로 나가려 한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호자 몇 명이 울면서 베드를 따라가고, 그 뒤로는 변규남 선생님이 보인다.

    그 옆에는 차유리 간호사가 보이는데, 왜인지 눈시울이 붉어져 있다.

    나는 곧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익스파이어(expire, 사망).’

    중환자실에서 누군가 죽은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환자일지도 모른다.

    나는 천천히 환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다가갔다.

    하지만 흰색 천에 덮여 있는 환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스윽―

    나는 천을 들춰 보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 손은 마치 투명한 홀로그램이라도 된 것처럼 맥없이 사물들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파앗―

    나는 찬물을 얻어맞은 듯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 * *

    "원래 의사들은 환자랑 너무 가까워지면 피곤해지는 법이야. 나처럼 적당히 거리를 둬야……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냐?"

    카페에 마주 앉은 변 선생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예."

    나는 변 선생에게 적당히 대답하면서, 한편으로는 방금 내가 본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외과 중환자실>.

    <환자의 사망>.

    정리하자면, 밤에 누군가가 죽어서 흰 천에 덮여 실려 나갔다. 그리고 그걸 변 선생과 차유리 간호사가 지켜보았다.

    끝.

    젠장, 장난해?

    겨우 이 정도 단서만 가지고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

    정확한 날짜도, 시간도 모른다.

    누가 어떻게 죽는지 아무런 힌트도 없다.

    한두 명도 아니고 10명이 넘는 환자들이 다 중환자인데…….

    "미치겠네."

    "응?"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고 말았다. 얼른 적당히 얼버무려 대화를 회피했다.

    잠시 후.

    나는 스테이션으로 올라와 근무표를 살폈다.

    생각해 보자.

    분명 꿈속에서, 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변규남과 차유리 간호사가 함께 보였다.

    즉 변규남 선생님의 당직과 차유리 간호사의 나이트(night, 밤) 근무가 겹치는 날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5월 11일과 22일.’

    나는 달력을 체크했다.

    일단 이날에 당직을 확보해 놓자. 어쩌면 내가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전화를 들었다.

    "아 윤성아, 바쁘지? 혹시 통화 괜찮아? 당직 좀 바꿀 수 있을까 해서……."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11일 아침이 다가왔다.

    * * *

    저벅저벅.

    나는 퀭한 눈으로 출근했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어떤 환자가 어떻게 죽게 될지, 온갖 상상을 하느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MI(심근경색)?

    PTE(폐동맥색전증)?

    수술 후 나타날 수 있는 합병증을 여러 가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의대생 시절에 배운 내용만 가지고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CPR 방송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다가 빨리 달려가야 하나?

    아니면 외과 중환자실에서 아예 밤을 새워 볼까…….

    변규남 선생님한테 말하면, 이 사람이 도와줄 수는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나는 밤새도록 숙소 침대에서 뒤척여야 했던 것이다.

    "선한 쌤,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안 좋으신데!"

    중환자실로 들어가는 길에 마주친 차유리 간호사가 놀란 듯 묻는다.

    나이트 근무를 마치고 퇴근 중이었는지, 사복 차림이다.

    나는 대충 인사하고 좀비처럼 어기적어기적 그녀를 지나쳤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미래를 막아야 하는데…….’

    나는 스테이션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에서 환자 차트를 열람했다.

    딸깍, 딸깍―

    입술을 뜯으며 초조하게 마우스를 눌렀다.

    분명 이 중에 한 명은 죽는 위기에 처하게 될 텐데,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일단은 한 명씩 살펴보는 수밖에.

    <다발성 외상으로 입원하여 인공호흡기 치료를 받고 있는 23세 남자 환자>

    이 환자는 빠르게 호전되고 있다고 어제 회진에서 그랬었고…….

    <위암 수술을 받은 54세 여자 환자>

    이 환자는 고혈압, 고지혈증의 기저질환이 있긴 한데…….

    <대장암 수술 후 한 달째 중환자실에 있는 뇌졸중 환자>

    이 환자가 설마 오늘 밤에……?

    나는 그렇게 환자 한 명, 한 명의 차트를 넘기다가 멈칫했다.

    <김혜정 할머니>.

    솔직히 가능성이 높다.

    이미 상태가 안 좋을 대로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만약 김혜정 할머니가 사망하게 된다면,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환자에게 다가갔다.

    오늘따라 할머니의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

    "할머니, 오늘은 좀 어떠세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손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킨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는 걸까?

    나는 펜을 들어 종이와 함께 할머니의 손에 쥐여 주었다.

    < 갠 찬 아 >

    할머니는 꼬불꼬불한 글씨로 그렇게 썼다.

    언제나처럼 귀여운 할머니.

    하지만 몸 상태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차트를 보니,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도 몇 번 바이탈이 흔들린 기록이 보인다.

    며칠 전 찍은 CT의 판독 결과도 좋지 않다. 대장암이 복막 전체에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힘내세요. 제가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나는 할머니의 작고 주름진 손을 꼭 쥐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빙긋 웃었다.

    마치 메마른 고목나무에서 수액 한 방울을 쥐어짜듯, 힘겹고 희미한 미소였다.

    * * *

    저녁 7시 반.

    하루의 두 번째 면회 시간이 시작된다.

    곧 각 환자들의 옆에 마스크를 쓴 보호자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오늘도 김혜정 할머니 옆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할머니는 보호자가 면회 안 오시나요?"

    내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옆에 앉아 있던 변규남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무래도 오래 계시다 보니까, 처음에는 매일 오는 것 같더니 요새는 뜸하네?"

    "……그렇군요."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70여 일 동안 보호자가 계속 찾아오기는 쉽지 않겠지.

    하지만 일주일이 넘는 동안 한 번도 안 찾아오는 건 좀…….

    "너무하네요."

    "응?"

    "아무리 사정이 있더라도 가족을 저렇게 오랫동안 내팽개쳐 두다뇨.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

    나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변 선생이 픽 웃으며 말한다.

    "너, 가족 중에 중환자실 입원 오래 한 경험 없지? 원래 매일 찾아오기는 가족들이라도 쉽지 않아. 특히 저렇게 장환이 되고 나면 보호자가 매일 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거든."

    변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툭 쳤다.

    "근데 너 요즘 따라 신경이 왜 이렇게 날카롭고 예민해진 것 같냐? 릴랙스해, 릴랙스~ 네가 어찌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잖아."

    그러게.

    변 선생의 말이 맞다.

    내가 저쪽 집안 사정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멋대로 판단할 만한 입장은 아니다.

    그런데도, 괜히 화가 난다.

    왜일까?

    얼굴도 알지 못하는 보호자들에게 괜히 화가 났다.

    ‘만약 보호자가 찾아와 준다면 할머니도 정신적으로 조금이나마 힘을 얻을지도 모르는데…….’

    후우.

    나는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달랬다.

    오늘 밤, 부디 김혜정 할머니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 * *

    나는 그날 밤늦게까지 ICU를 지켰다.

    다른 콜은 빨리빨리 처리하고, 외과 중환자실에만 계속 머물러 있었다.

    변 선생이 묻는다.

    "오잉? 선한이 너 오늘 원래 당직이었냐?"

    "아,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날짜를 좀 바꿨습니다."

    "짜식. 이 선배님이 그렇게 좋냐? 오죽 좋으면 당직까지 바꾸면서 나랑 같이 있으려고 해?"

    변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는다.

    꿈보다 해몽이 좋구만…….

    가만 보면 이 사람은 언제나 성격이 한결같다.

    옆에서 보면 속 터질지 몰라도, 정작 본인은 천하태평이라 행복지수는 높을 것이다.

    "그나저나 중대한 고민이 있다. 고촌이 맛있을까, 넨네가 맛있을까?"

    그렇게 말하며 치킨 배달 전단지 두 개를 내 앞으로 슥 내민다.

    어이 상실이다.

    남의 속도 모르고…….

    지금 치킨이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이따가 레지던트들끼리 당직실에서 먹을 건데, 너도 같이 먹을래?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하긴 인턴이 레지던트들 사이에서 치킨 뜯으면 소화불량 생기지."

    변 선생은 히죽 웃으며 당직실로 사라졌다.

    나는 피곤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두 배로 피곤한 것 같다.

    "선한 선생님, 내려가서 잠 안 자세요?"

    나이트 근무를 위해 다시 출근한 차유리 선생이 다가와 물어본다.

    "아, 그냥 오늘은 여기 있고 싶네요."

    "걱정되는 거라도 있으세요?"

    "사실 김혜정 할머니가 좀 걱정이 돼서요. 아침에 CT 결과 나온 것도 봤는데 너무 안 좋으시길래."

    "아……."

    김혜정 환자의 이름이 나오자, 차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나에게 뭐라 말하려 한다.

    "사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예?"

    "사실 김혜정 할머니 보호자가 유선상으로 연락이 와서……."

    무슨 일이지?

    평소의 분위기와 다르다.

    원래 차유리 선생은 저렇게까지 뜸 들이며 말하는 성격이 아닐 텐데.

    그때.

    삐삐삐삐―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소리에,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어디지?

    5번 베드!

    ‘김혜정 할머니다!’

    타닥!

    나는 얼른 달려가 환자를 살폈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오늘 오전에 보았던 미소는 없었다.

    힘들게 숨을 들이켜고 있지만, 눈을 뜨지는 못했다.

    원래 90대를 겨우 유지하던 혈압은 80대로 떨어지고 있다.

    나는 차유리 간호사에게 황급히 소리쳤다.

    "김혜정 환자 바이탈(vital sign, 활력 징후) 이상한데요?!"

    "아, 저기……."

    "변규남 선생님한테 빨리 연락해주세요!"

    나는 가운을 벗어 던지며 심폐소생술을 할 준비를 했다.

    삐삐삐삐!

    그 와중에 모니터 속 환자의 혈압이 계속 떨어진다.

    70―

    60―

    김혜정 할머니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르게 빠져나간다.

    "이거 epinephrine(강심제) 써야 할 것 같은데…… CPR 방송도 얼른 해 주세요!"

    나는 심폐소생술을 하기 위해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때, 저 멀리서 변규남 선생님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선생님!"

    나는 변 선생을 애타게 불렀다.

    그가 빨리 뭐라도 해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변 선생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무심하게 말했다.

    "선한아, 내려와라."

    "예?"

    "심폐소생술 하지 말라고."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가 죽어 가고 있는데 손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하지만 변 선생은 평소와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환자 DNR이야."

    "……!!"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바닥까지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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