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37화 (37/241)

#37 아이 씨 유(4)

<선생님, 언제쯤 오실까요? 선생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이 많은데…….>

콜폰 너머로 간호사의 재촉이 들려온다.

"금방 가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첫날부터 땡땡이치는 이미지로 각인되면 곤란하다.

엘리베이터가 ICU가 있는 3층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변 선생에게 말했다.

"그럼 저는 일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

"선배님은 어디로 가시나요?"

"난 좀 더 쉬려고."

변 선생은 히죽 웃더니 당직실 쪽으로 설렁설렁 걸어갔다.

보나 마나 어딘가에 틀어박혀 핸드폰 게임을 하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소파에 누워 있거나.

"에휴."

나는 한숨을 쉬었다.

변 선생의 불성실한 모습이 실망스럽다.

특히 저번 달 함께 일했던 여봉철 선생을 생각하면 더욱 비교되는 모습이다.

여봉철은 첫날부터 인턴들에게 업무를 꼼꼼히 알려 주기까지 했는데…….

아무래도, 이번 달에는 그런 것까지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쩔 수 없지. 나 혼자 알아서 잘하는 수밖에.’

스윽―

나는 주머니에서 프린트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일명 <인계장>.

인턴들 사이에서 매달 전해져 내려오는 업무 노트다.

이번 달에는 오로지 이 노트에 의지해서 인턴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SICU 인계장]

A. 스케줄

출근 : 오전 7시

퇴근 : 오후 6시 (주말은 12시 오프)

당직 : PICU와 MICU와 같이 3일에 한 번씩 (퐁퐁당)

B. 수기 후 물품 정리

1) 모든 철제 (D―set, poly set, stapler remover) 등은 버릴 건 다 버리고, 손 씻는 곳에 놓기

2) 바늘은 환자 앞 데스크에 바늘 넣은 통에 넣기

3) 메딕스나 스킨 포어 같은 특수 드레싱 세트를 새로 까서 썼으면 담당 간호사 선생님에게 무엇을 얼마나 썼는지 말해 주기

4) …….

기타 등등.

항목이 끝없이 이어진다.

A4 용지로 무려 20페이지에 달하는 업무 지침과 주의 사항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나는 종이를 넘기며 중요한 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긴 뒤 발걸음을 떼었다.

‘이번 달은 자력 생존이다!’ 삑―

IC 카드를 태그하자 중환자실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

복도를 중심으로 왼쪽은 흉부외과 중환자실(C03T), 오른쪽은 외과 중환자실(C03S)이 보인다.

앞으로 1달간 내가 지겹도록 보게 될 풍경이다.

‘어디 보자…… 일단 아까 콜 왔던 ECG랑 루틴(routine) 드레싱부터 오전에 끝내 놓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외과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려고 하는 순간.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콜폰이 다시 한번 울린다.

따르르르르!

<인턴 선생님, 여기 C03T인데요, 8번 자리 환자 열이 나서 blood―culture(혈액배양검사) 있습니다. 검사를 해야 안티(antibiotics, 항생제) 바꿔서 들어갈 수 있어서, 급하게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급한 콜이다!

전화를 끊은 뒤 발을 왼쪽으로 돌리는 순간, 다시 콜폰이 울린다.

따르르르르!

<인턴 선생님, C03S인데요, A―line, foley removal(도뇨관 제거) 있어요. 환자 곧 병동으로 올라가야 해서 빨리 와서 해 주세요.>

젠장!

이것도 급한 콜이잖아?

역시 아침에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인턴 혼자서 한꺼번에 두 곳을 커버해야 하기 때문에, 업무가 쌓이는 건 순식간이다.

마치 테트리스 게임을 하다가 잠시라도 손을 놓으면 순식간에 블록이 꼭대기까지 쌓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왼쪽 먼저냐, 오른쪽 먼저냐…….

"여기 C03T 일 금방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가장 급한 일부터 처리하기 위해 흉부외과 중환자실로 향했다.

괜히 카페에 따라갔다가 오전 업무가 밀리고 말았다.

앞으로 변 선생에게 휘말리지 않으려면, 제대로 정신줄을 붙잡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앞으로 한 달간 정신 바짝 차리자!’

* * *

오전 10시 10분.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급한 일을 처리했다.

열심히 움직이다 보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휴우."

겨우 한숨 돌렸다.

그때, 나이가 지긋한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인턴 선생님, 인계는 받으셨죠? 김혜정 환자 소어 드레싱(sore dressing, 욕창 소독)은 원래 매일 아침 10시입니다. 면회 전에 항상 하거든요."

"아, 10시 욕창……."

그제서야 인계를 받으면서 전해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5명이 달라붙어서 해야 하는 대박 드레싱이 있다고.

오전의 일과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클라이맥스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회진도 길어지고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다 보니, 원래 시간보다 약간 밀려 버렸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네. 인턴 쌤 잘 부탁드려요~!"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간호사들 중에서는 경력이 오래된 사람들이 많다.

당장 나와 대화한 간호사 선생님만 하더라도 경력 10년이 넘는 베테랑이라고 들었다.

그런 간호사들 앞에서 무시받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어디 보자. 욕창 드레싱 물품이 있는 곳은 이쪽이었던가……?’

나는 인계장에 적혀 있는 내용을 살피며 바쁘게 걸었다.

아무래도 첫날이다 보니 익숙하지 않아서 헤매야만 했다.

그렇게 막 코너를 돌던 중.

와락!

몸에 부드러운 충격이 느껴진다.

"엇."

"앗!"

간호사가 휘청인다.

나는 황급히 간호사가 넘어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노트를 살펴보면서 걷느라 전방을 주시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아 깜짝이야. 괜찮아요, 괜찮아요!"

나와 부딪힌 간호사는 쾌활하게 웃으며 머리를 정돈했다.

나이는 내 또래일까?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목소리다.

그녀의 목에 걸린 IC 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간호사 차유리>

"새로 오신 인턴 선생님이시구나. 뭐 찾던 중이세요?"

"아, 드레싱 준비를 하려고……."

"아~ 김혜정 할머니요?"

차유리 간호사는 내 말만 듣고 금방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중환자실은 오늘 처음이실 텐데, 물건들 어딨는지는 아세요?"

"5번 베드 앞쪽에 있다고 하던데요."

"맞아요. 여기!"

덜컹―

차유리 간호사는 스테이션 한쪽의 서랍을 열며 말한다.

"웬만한 드레싱 도구들은 여기 있는데, 만약 모자라면 저희한테 말씀하시면 비품 창고실에서 채워 드릴게요."

"예,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궁금한 거 있으면 뭐든 물어보세요!"

차유리 선생이 밝게 웃는다.

워낙 에너지가 넘치다 보니,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다.

중환자실에서 힘든 일을 하면서 저렇게 긍정적인 기운을 내뿜을 수가 있다니?

‘생기가 넘치는 분이시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차유리 간호사는 서랍에서 드레싱 도구들을 꺼내 내 손에 쥐어 두더니 씩씩하게 말했다.

"그럼 드레싱하시러 가 볼까요?"

* * *

김혜정 할머니는 74세 할머니였다.

몸은 깡말라 있으며 배에는 ileostomy(장루)를 달고 있었고, 그곳을 통해 나오는 대변 같은 물질들이 비닐봉지에 담기게 되어 있었다.

목에는 인공호흡기가 연결되어 있었고, 코에는 L―tube가 들어가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라인들이 몸에서 나와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할머니~ 저희 왔어요!"

차유리 간호사가 밝게 인사를 건넨다.

마치 손녀딸이 안부 인사를 하듯 따스한 말투였다.

"어디 보자~ 우리 할머니 밤 동안 별일 없으셨어요?"

끄덕끄덕―

환자가 고개를 겨우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오늘은 새로 오신 잘생긴 의사선생님이 드레싱해 주신대요. 좋으시죠?"

차유리 간호사는 그렇게 얘기하며 할머니의 손을 쥐었다.

그러자 찡긋 웃는 미소가 돌아온다.

힘들게 숨을 쉬면서도 웃는 얼굴을 잃지 않는, 귀여운 할머니였다.

"인턴 선생님, 욕창 어디에 있는지 들으셨죠?"

차유리 간호사가 나에게 슬쩍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욕창>.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중환자의 경우, 신체의 일부가 지속적으로 압박을 받게 된다.

그렇게 압력에 노출된 부위는 결국 괴사된다.

피부가 녹고 분홍색 근육들이 노출되면서 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를 욕창(sore)이라고 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 장기간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들은 간호사가 지속적으로 자세를 바꾸어 준다.

하지만 욕창이 생기는 것을 막기는 쉽지 않을뿐더러, 한 번 생긴 욕창은 관리를 잘해 주지 않으면 더욱 깊은 상처를 만들게 된다.

"저희가 환자분 몸 돌릴 테니까 그사이에 소독하고, 요걸로 덮어 주시면 돼요."

차유리 간호사는 처음 보는 드레싱 재료를 나에게 건넸다.

두껍고 푹신푹신한 게 딱 봐도 눌리는 압력을 덜어 줄 것 같다.?

"예, 시작할게요."

나는 가운을 벗었다.

그리고 환자에게 다가가려 하는데, 차유리 간호사가 갑자기 나를 막는다.

"잠깐만요!"

응?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차유리 간호사가 파랑색 비닐로 된 가운을 건넨다.

"이 환자분 VRE라서 이거 입으셔야 돼요."

"아. VRE……."

VRE란 vancomycin―resistant E. coli의 약자이다.

한마디로 강한 항생제에도 내성을 가지는 균이 환자의 몸에 있다는 이야기다.

이 균이 다른 환자들에게 퍼져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하니 보호 장구를 하나 더 입어야 한다.

뭔가 절차가 복잡하군…….

"하나, 둘, 셋!"

영차!

곧 간호사 4명이 동원되어 환자를 옆으로 돌려 잡았다.

그러자 환자의 욕창이 드러났다.

‘이런…….’

나는 숨을 삼켰다.

생각보다 상태가 안 좋다.

몇 개 월 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누워 있는 장기 입원 환자라서 그런 걸까?

피부는 이미 까져 있고 근육이 노출되어 있어 환자 등에 분홍색 구멍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얼마나 오래 중환자실에 누워 계셨길래…….’

나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간호사들은 매일 같은 광경을 보느라 익숙해서인지 표정 변화가 없다.

주위에는 환자를 돌려 잡고 있는 간호사들 4명뿐만 아니라, 내 옆에서 환자의 여러 라인을 잡고 있는 간호사도 있었다.

"영은아, 당겨져서 안 빠지게 조심해서 그것만 들고 있으면 돼. 알겠지?"

"예……."

차유리가 딱 봐도 초짜로 보이는 간호사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는 모습이다.

나는 소독을 시작했다.

‘후우…….’

생각보다 쉽지 않다.

VRE 보호 비닐을 껴입고 소독을 하려니 금세 등에 땀이 찼다.

환자를 잡고 있는 간호사들도 얼마나 힘들까…….

하지만 가장 힘든 건 환자 본인일 것이다.

내가 욕창을 소독할 때마다 아픈지 김혜정 할머니는 왼쪽 팔을 흔들고 있었고, 잠깐 올려 본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할머니 조금만 참으실게요. 다 됐어요."

나는 환자를 달래듯 말했다.

이때, 갑자기 공기를 뿜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슈욱―! 슈욱―!

잠깐.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리지?

삐삐삐삐!

온갖 모니터에서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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