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아이 씨 유(3)
쓰읍!
선 채로 졸던 변규남이 입가를 닦으며 황급히 교수에게 변명한다.
"아, 아닙니다. 환자 ECG(심전도)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요."
그러자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ECG는 이상 없는데? 알람도 안 울렸고."
"에 그게 그러니까…… 착각이었나 봅니다."
변규남이 머리를 긁적인다.
맙소사, 회진 중에 졸다니…….
상상 초월이다.
게다가 아까부터 교수님 질문에 대답도 잘 못하고, 환자 파악도 잘 안되어 있는 모습이다.
교수가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5번 베드 환자를 보더니 말한다.
"이 환자 ventilator setting(인공호흡기 설정)을 이렇게 하면 안 돼. 이렇게 inspiration time(흡기 시간)을 설정한 이유가 있나?"
"……네?"
변규남은 딴생각을 하다 질문을 놓쳤다.
교수가 재차 묻는다.
"규남아, 이거 세팅 왜 이렇게 했냐고."
"아 네, 환자가 대충 숨 쉬기 편해 보여서……."
"대충?"
교수가 황당한 듯 되묻는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들도 할 말을 잃고 먼 산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Auto PEEP이 이렇게 걸리고 있는데,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니? 너 지금 그게 3년 차가 할 소리야?"
"어, 그게……."
교수는 이미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Auto PEEP(자가 호기말 양압)은 인공호흡기를 잘못 세팅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로, 이 상태가 유지되면 환자의 폐는 손상을 받게 된다.
몇 번의 질문에 하나도 답을 내놓지 못하자, 결국 질문은 나에게까지 넘어왔다.
"그럼 우리 인턴에게 물어볼까?"
"예?"
"인턴에게 어려운 질문일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세팅에서 auto PEEP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잠깐.
지금 내가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레지던트 3년 차가 대답 못 한 질문을 인턴이 대답한다면…….
내 옆의 변규남 선생은 쪽팔림을 당하는 거잖아?
‘어떡하지?’
대답을 해도 곤란하고, 못 해도 곤란한 상황이다.
과연 슬기롭게 이 상황을 헤쳐 갈 수 있을까?
잠깐 망설이다, 나는 대답했다.
"Respiratory rate(호흡 속도), inspiration time(흡기 시간), pressure(압력) 중에 조절해야 할 것 같은데…… 학생 때 배웠던 것 같은데 완벽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자 교수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하하. 지금 네가 말한 거는 벤틸레이터(ventilator, 인공호흡기)에서 조절할 수 있는 모든 걸 얘기한 거잖아."
교수님은 계속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좋아. 딱 인턴다운 대답이었어."
휴우.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적당히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대답이었다.
"이참에 설명해 줄 테니 잘 알아 두도록 해. 이런 경우에는……."
즉석 강의가 진행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집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변규남 선생님은…….
여전히 영혼 없는 대답과 리액션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의욕이 없을까, 이 사람은?
답답해 죽겠네!
보는 내가 다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다.
"휴우."
그렇게 길고 길었던 회진이 끝났다.
나는 겨우 숨을 돌리며 드레싱 준비를 했다.
회진이 정말로 2시간이나 걸릴 줄이야…….
변 선생이 혼나는 시간만 적었어도 더 빨리 끝났을 것이다.
‘이렇게 교수님한테 많이 혼나는 레지던트 선생님은 처음 보네.’
실제로 변 선생은 거의 5분마다 한 번씩 혼났다.
그렇게 쉬지 않고 2시간 동안 탈탈 털렸으니, 그의 멘탈도 말이 아니겠지…….
아마 인턴인 내 앞에서 혼난 것이니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변규남 선생이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짚는다.
"인턴 쌤."
"예?"
"커피 한 잔 고고씽?"
그러면서 넉살 좋게 눈을 찡긋한다.
……뭐지, 이 사람은?
맷집이 무한인가?
어떻게 그렇게 욕을 먹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거지?
마치 미지의 생명체를 만난 듯한 기분이다.
"변 선생님, 인턴 너무 늦게 보내지 마세요! 우리 병동 올라갈 환자들 많단 말이에요."
"에이, 첫날이니까 금방 다녀오겠슴다."
간호사 선생님들의 말을 대충 받아넘기며, 변규남 선생은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 * *
지하 1층 커피숍.
나는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러 몇 번 와 본 적은 있지만, 업무 시간에 온 것은 처음이다.
"저, 업무 시간에 여기 있어도 되는 겁니까?"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땡땡이치는 것 같기도 하고.
"괜찮아, 괜찮아. 콜 받으면 올라가면 되지."
변규남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안락하고 편안한 자세다.
"첫날이니까 서로 인사라도 나누자고. 오케이? 앞으로 한 달 동안 동고동락해야 하는데."
"예."
"뭐 마실래?"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좋습니다."
"응, 나는 자몽 허니 아이스티."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 게임을 켠다.
<따라란~!>
……나보고 사 오라는 건가.
보통 이럴 때는 상급자가 사지 않나?
나는 부글대는 속마음을 꾹 눌러 담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엇, 네가 사 오게? 내가 사려고 했는데…… 그럼 어쩔 수 없이 얻어먹어 볼까?"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너스레를 떤다.
이쯤 되면 궁금하다.
대체 이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잠시 후.
변 선생은 허니자몽인지 자몽허니인지 하는 것을 행복한 표정으로 쪽쪽 빨아 먹고 있다.
너무 맛있게 먹으니까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만큼 얄밉다.
"야, 후배님이 사 주니까 더 달콤한 거 같구만~!"
"맛있게 드세요."
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까부터 왜 자꾸 "선배, 후배" 하는 거야?
우리 병원에서 나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그동안 없었는데.
물론 같은 연국대 출신끼리야 그렇게 부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타 학교 출신의 이방인이다.
적어도 선―후배 라인에 속할 일은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네 얘기는 많이 들었다. 연국대 출신이 아니라며?"
"예. 일운대 출신입니다."
"일운대."
변 선생은 씩 웃었다.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작년에 망해서 없어진 학교 말하는 거 맞지?"
"예."
"하아, 너도 참 골치 아프겠다. 그런 꼴통 학교 출신이라 어디 가서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그렇게 말하며 히죽히죽 웃는다.
왜 저렇게 웃지?
단순히 나를 비웃으려는 것 같지는 않다.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변 선생은 상체를 스윽 숙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나도 일운대 출신이야."
"네?"
나는 깜짝 놀랐다.
상상도 못 한 고백(?)이었다.
"변 선생님도 일운대 출신이라고요?"
"쉬잇."
내 목소리가 커졌던 모양이다.
변 선생은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올렸다.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에 일운대 출신이 나 말고 또 있었다니?
"전혀 몰랐습니다."
"당연하지,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질 않았으니까. 아는 사람 거의 없을걸?"
쪼로록~
변 선생은 아이스티를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일운대 졸업한 다음 서울광동병원에서 인턴 1년 하고 여기로 넘어왔거든. 그래서 사람들은 내 출신 학교를 잘 몰라."
"그랬군요."
"하, 내가 졸업할 때만 해도 일운대가 그렇게 막장 학교까지는 아니었는데…… 우리 모교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
"하하, 그러게요."
"어디 가서 일운대 나왔다고 쪽팔려서 말도 못 하겠고."
변 선생은 푸념을 늘어놓다가 문득 내게 물었다.
"야.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었는데. 학관 신관 짓던 거 마지막까지 완공 안 됐냐?"
"완공은커녕 3년째 방치되다가 엎어졌어요. 재단에 공사 잔금 치를 돈도 없었나 봐요."
"개막장이네."
"양아치 학교였죠."
"거기 공사판에서 애정 행각하다가 걸린 커플들 졸라 많았잖아. 도서관 건물에서 다 보이는 줄도 모르고. 크크크."
"맞아요."
우리는 일운대생들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타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난 여행자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무척이나 반가웠다.
잠시나마 상대방의 안 좋은 첫인상을 잊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우리 병원에 일운대 출신 선생님이 계셨다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선생님은 무슨 인마! 이제 우리끼리 있을 때는 선배라고 불러라!"
"네, 선배님."
"남들은 선배 후배끼리 챙겨 주고 밥도 먹고 하는데, 나는 후배 한 명 없으니까 쓸쓸하더라."
그 말이 이해가 간다.
나도 솔직히 병원에서 선후배들끼리 친목질을 하는 것이 부러웠다.
연국대 출신이야 말할 것도 없고, 타 학교 출신도 마찬가지다.
가령, 근욱이의 경우 타 학교 출신이지만 레지던트 중에서도 동문이 열 명이나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아무래도 선후배들끼리 서로 더 애정을 가지고 돕는 것이 사실이다.
변 선생이 내친김에 호언장담을 한다.
"선배 좋다는 게 뭐냐! 이번 달 인턴 평가는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점수 잘 줄 테니까!"
……정말일까?
솔직히 못 미덥다.
아까 본 바로는, 변 선생은 교수님의 불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 같던데…….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점수 잘 받으려면 제가 잘해야죠."
"크크, 자식. 점잔 빼기는."
"그나저나 슬슬 올라가 봐야 되지 않을까요? 아까 간호사 선생님이 할 일 많다고 하셨고, 다른 콜도 몇 개 쌓여 있는데……."
"야, 괜찮아 괜찮아! 만약 너한테 늦었다고 뭐라 하면 내가 책임진다!"
변 선생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호언장담을 했다.
아까부터 믿음직한 선배 노릇을 하려는 듯한 모습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못 미덥지?
그렇게 20분쯤 흘렀을까.
변 선생은 오랜만에 대화 상대를 찾은 듯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와 대학교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3층 중환자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띠잉!
엄 교수님과 마주쳤다.
"엇. 안녕하세요."
우리는 황급히 인사했다.
엄 교수가 우리를 보더니 대번에 눈살을 찌푸린다.
"커피? 아침부터 여유 있나 보다?"
"아, 첫날이다 보니 인턴한테 이것저것 좀 가르쳐 주느라……."
"의사 가운 입고 엘리베이터에 커피 들고 타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했어. 인턴한테 그런 거 안 가르쳐 줬나?"
엇?
나는 당황하여 우리가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 보았다.
교수가 지적하기 전까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구나!
몰랐다!
그때, 변 선생이 변명하듯 말한다.
"어, 죄송합니다. 인턴이 커피를 너무 마시고 싶어 해서……."
헉…….
뭐야, 이 양반?
갑자기 왜 나를 팔아?
카페에 가자고 꼬신 건 당신이었잖아!
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눈빛으로 변 선생을 바라보았고, 교수는 혀를 끌끌 찼다.
"엄한 인턴 핑계 대지 말고. 보나 마나 규남이 네가 꼬드긴 거겠지."
"아 그게……."
"인턴이 들어왔으면 하나라도 직접 보여 줄 생각을 해야지. 카페에서 수다 떨 시간에 ICU에서 조금이라도 더 가르치도록 해."
"네에."
변 선생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한편 나는 실망감을 느꼈다.
역시 변 선생은 전혀 믿음직스러운 인물이 아니었다.
<첫인상은 과학이다!>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다.
띠잉!
잠시 후 교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변 선생이 히죽거리며 말한다.
"크크. 너무 기죽지 마~ 엄서용 교수님 원래 저래."
하도 지적을 받다 보니 무뎌진 것인지, 변 선생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표정이다.
나는 한심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야. 근데 교수님 이름 너무 웃기지 않냐? 외모랑 딱 맞는 듯."
"예?"
엄서용 교수님이 왜?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변 선생이 말한다.
"머리카락이 엄서용~ 으하하하하!"
웃어 버렸다.
……젠장, 자존심 상해!
따르르르―
그때, 내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