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35화 (35/241)
  • #35 아이 씨 유(2)

    "……그래요, 제가 너무 앞서갔네요."

    녀석은 술잔을 들어 입매를 감춘다.

    웃기는 녀석일세.

    나는 대수롭지 않게 피식 웃고는 술잔을 들었다.

    경험상 이런 타입의 녀석들은 처음부터 적절히 선을 그어 줘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서로 편해질 수 있다.

    "50점! Bull’s eye!!"

    "와아아!"

    옆에서는 여전히 다트 게임이 한창이다.

    "그나저나, 스물네 살이라면 우리 인턴 중에서 최연소 아니야?"

    나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아마 학교를 일찍 들어왔다든가 했겠지.

    "설곽 출신이라 2년 만에 조기 졸업했거든요."

    "설곽?"

    "서울과학고요."

    "아아."

    가끔 이런 녀석들도 있다.

    마치 추월 차선을 탄 듯, 인생의 진로가 논스톱인 경우다.

    아득바득 삼수까지 해서 지방 의대에 합격했던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녀석이다.

    "그런데 선한이 형은 다음 턴 어디 돌아요?"

    "ICU."

    "중환자실이요?"

    류명인은 입맛을 다셨다.

    "아쉽네요. 선한이 형이랑 꼭 같이 인턴생활 해 보고 싶은데…… 누가 더 잘하나 경쟁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서요."

    경쟁이라.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대충 이 녀석의 성향이 어떤지 감이 왔다.

    "다 같이 배우는 입장인데 경쟁이라 할 게 있나?"

    "와, 순진한 척하시네요."

    류명인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뭔가 꺼림칙한 웃음이다.

    대놓고 적대감이 느껴지지는 않은데,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는 타입이다.

    "뭐, 그래도 언젠가는 스케줄 겹치는 날이 있겠죠? 기대할게요."

    그렇게 말한 뒤, 명인은 다른 자리로 사라졌다.

    ……기묘한 녀석이네.

    쾌활한 말투와는 달리, 사회성이 없는 녀석이다.

    악의는 없는 것 같은데, 하는 말들이 굉장히 자기중심적이다.

    녀석이 사라진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중원이 형이 슬쩍 다가와 말한다.

    "쟤는 성격 여전히 특이하네."

    "누군데요?"

    "류명인이라고, 우리 학교에서 유명했던 애야."

    중원이 형의 설명이 이어진다.

    공부를 독하게 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단순히 경력을 늘어놓기만 해도 화려하다.

    ―고교 시절 국제 생물 올림피아드(IBO) 금메달

    ―서울과학고등학교 조기 졸업

    ―연국대 의대 수석 입학, 선서식 대표

    ―연국대 의대 수석 졸업, 졸업식 대표

    ―등등…….

    "내가 왜 독한 놈이라고 하는지 알겠지? 오죽하면 대학교 때 별명이 <학점 괴물>이었어. 아마 이번에도 <올해의 인턴> 자리 노리고 있을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어떤 타입인지 알 것 같다.

    남에게 지고는 못 사는 성격.

    이야기를 들어 보니 도를 지나치는 성취욕이 거의 집착증에 가까워서, 친구는 별로 없다고 한다.

    "나 쟤 싫어."

    어느새 나타난 소담이가 볼멘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술 몇 잔 마셨는지, 햄스터를 닮은 볼에 홍조가 발갛게 떠 있는 모습이다.

    "왜 싫어?"

    "성격이 좀 뭐랄까…… 기 빨린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언젠가 겪어 보면 알게 될 거야."

    소담이는 그렇게 말하며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다.

    뭔가 귀엽다.

    얘는 술 마시니까 더 햄스터 같네.

    "물론 저런 놈보단 낫지만."

    소담이의 말에, 우리 세 명의 시선이 구석으로 옮겨졌다.

    "제가 왜 최하점이냐고요! 으헝헝!"

    와장창!

    "야, 저 새끼 또 시작이다!"

    "누가 쟤 술 줬냐?!"

    "선배님들 너무 섭섭합니다! 흐어어엉!"

    술집 한구석에서 조진기가 울면서 술병을 깨트린 모양이다.

    하여간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인간들이 많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 하루다.

    그렇게 4월의 마지막 날이 지나고, 본격적인 5월이 시작되었다.

    * * *

    째앵―

    5월의 따뜻한 햇살이 병원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창문 넘어 보이는 산들이 푸르게 변해 가는 지금, 나의 이번 달 스케줄은 <중환자실>이다.

    연국대병원은 그 큰 규모답게 많은 중환자실을 가지고 있다.

    각각 내과, 외과, 소아과, 신경외과, 흉부외과에서 나누어 쓰고 있다.

    총 10개의 중환자실에 6명의 인턴이 배정되었고, 나는 암센터의 외과 중환자실과 흉부외과 중환자실을 맡게 되었다.

    이번 5월은 어떤 달이 될까?

    또 어떤 미래가 보이게 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번에도 내가 잘 해결할 수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뭐든 해결해 주마!’

    그동안의 경험 때문일까.

    내 안에서는 자신감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새벽 6시 반.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첫날이니까 간호사들에게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아침 회진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상하다.

    주치의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다.

    중환자실 담당 약사가 황당한 표정으로 간호사에게 묻는다.

    "변 선생님 아직도 안 오셨어요?"

    "네."

    "나 참, 이번에도 늦으면 교수님한테 엄청 깨질 텐데."

    "누가 아니래요."

    간호사가 한숨을 푹 쉰다.

    "안 그래도 엊그저께 교수님보다 늦어서 회진 내내 탈탈 털리시더니."

    "그래서 그날 회진 2시간 넘게 걸렸잖아요."

    "오늘도 그러면 안 되는데……."

    간호사와 약사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사이에서 눈을 깜빡였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아침 회진 돌기 전에 주치의가 환자 파악을 미리 해 놓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3월의 김뱀도, 4월의 여봉철도 그랬다.

    그런데 이 시간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니?

    7시부터 회진인데, 벌써 5분 전이다.

    덜컹!

    그때 문이 열리며, 헐레벌떡 등장한 남자가 우렁차게 외친다.

    "어휴, 똥 싸느라 늦었슴다!"

    외과의사 변규남.

    앞으로 한 달간, 내 사수가 될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둔한 인상.

    게으른 듯한 눈빛.

    덥수룩한 머리, 홍조가 낀 불그스레한 얼굴.

    변규남 선생의 첫인상이었다.

    그가 땀을 닦으며 말한다.

    "어우, 변비 때문에 늦을 뻔했네."

    "변 선생님, 제발 지각 좀 하지 마세요……."

    "또 교수님한테 한 소리 들으시면 어쩌려구요. 옆에서 보는 저희가 다 조마조마합니다."

    약사와 간호사가 애원하듯 말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태평한 표정으로 히죽 웃는다.

    "의사들도 화장실 갈 시간은 있어야죠. 의사들이라고 뭐 볼일 안 보고 살 수 있답니까?"

    "어휴, 정말……."

    간호사는 한숨을 쉬었다.

    한편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앞으로 이 사람과 한 달간 붙어서 지내야 하는데, 첫인상이 그닥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어, 새로운 인턴인가?"

    "네, 신선한입니다."

    "이야~ 네가 말로만 듣던 신선한이구나! 반갑다!"

    그렇게 말하며, 변규남 선생이 반갑게 손을 내민다.

    덥석!

    손바닥에 와닿는 감촉이 흥건하고 축축하다.

    원체 땀이 많은 사람인 건지…….

    그때 간호사가 묻는다.

    "변 선생님, 화장실에서 손은 씻고 온 거죠?"

    "어, 내가 손을 씻었던가? 기억이 잘 안 나네."

    아이 씨…….

    드러워 죽겠네!

    곧 변규남 선생은 중환자실에 설치되어 있는 세면대를 향해 손을 가져간다.

    쏴아아―

    자동 센서가 작동하며 물이 나왔다.

    그러자 손을 한번 살짝 가져다 대더니 손 씻기를 끝낸다.

    2초는 걸렸을까?

    ……저러면 손을 씻으나 마나잖아!

    명색이 외과의사인데, 손 씻는 방법이 가히 충격적이다.

    내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변규남 선생이 내 발 쪽을 보며 말한다.

    "근데 너, 신발 그거 신고 다니려고?"

    "예?"

    "후회할걸. 우리 교수님 회진 겁나 오래 걸리거든. 발바닥에 피 쏠리고 땀 차서 못 버틴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발을 슬쩍 들어 올린다.

    나는 로퍼형 구두를 신고 있는 반면, 변규남 선생은 구멍이 숭숭 뚫린 샌들을 신고 있다.

    "앞으로 한 달간 ICU(중환자실)에서 일하려면 크록스 신발부터 사라! 이 선배님이 주는 꿀팁이다."

    "아…… 네, 알겠습니다."

    "어때, 고맙지?"

    변규남이 히죽 웃는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잠시 후.

    가운데 머리가 휑한 교수님이 등장했다.

    외과 엄서용 교수.

    나를 비롯하여 약사 선생님, 그리고 중환자실 파트장 간호사 선생님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응, 그래요."

    교수님은 인사를 받더니, 변규남 선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규남이, 환자 파악 좀 했니 오늘은?"

    변규남 선생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네, 뭐…… 대충 한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

    "어, 아니, 확실히 했습니다."

    마지못해 대답하지만, 영 자신감이 없는 듯한 모습이다.

    교수가 혀를 차다가 문득 나를 바라본다.

    "자네는 새로운 인턴인가?"

    "인턴 신선한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활기차게 꾸벅 인사했다.

    "자네가 얼마 전에 뉴스에 나온 그 인턴인가 보구만. 아주 용기 있고 결단력이 뛰어난 것 같던데."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 봐."

    교수는 내 어깨를 두드리다가, 갑자기 진지하게 말한다.

    "절대 방심해서 나태해져선 안 돼."

    "……?"

    "처음엔 똑똑하던 인간들도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점점 맛탱이가 가는 경우가 많거든."

    그렇게 말하며, 옆에 서 있는 변규남 선생을 힐끗 쳐다본다.

    마치 들으라는 듯이.

    변규남은 벅벅 머리를 긁었고,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회진 시작해 볼까?"

    "예!"

    그렇게 조금은 떨떠름한 느낌으로 5월의 첫 회진이 시작되었다.

    * * *

    ICU.

    의 약자로, 중환자실을 뜻한다.

    EM이 병원의 대문이었다면, ICU는 환자들의 생과 사가 결정되는 곳이다.

    말 그대로 병원에서 가장 위중한 환자들이 모여 있으니 말이다.

    갑작스럽게 병세가 악화된 환자.

    인공호흡기의 도움이 필요한 환자.

    막 대수술을 끝낸 환자.

    장기 이식을 받은 환자.

    등등…….

    환자의 상태가 심각한 만큼, 논의해야 할 문제들도 많다.

    "그럼 1번 방 환자부터 볼까? LAR 수술받은 지 피오디(POD, 수술 후) 이틀째 환자지?"

    "예."

    우리는 교수를 따라 움직였다.

    곧 환자 한 명, 한 명에 대해서 심도 있는 대화가 진행되었다.

    전날 하루 동안의 이벤트를 정리하고, 환자의 생체 징후와 피검사 결과, 영상 소견을 꼼꼼히 살펴본다.

    이 과정에만 기본적으로 15분이 소요된다.

    "수술 중에 EBL이 1300cc였고, 어제 RBC 2pack 들어갔지?"

    "네. 오늘 헤모글로빈 10.3입니다."

    "Creatinine level 높은 거에 대해서 IM5(신장내과)는 뭐라고 회신 왔지?"

    "지금 쓰는 안티(antibiotics, 항생제) 용량 조정하고……."

    그렇게 한참 동안 진지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물론 중간중간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옆에서 최대한 교수님의 말을 새겨들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1시간 후…….

    슬슬 발이 아파 오기 시작한다.

    왜 변규남 선생이 편한 신발을 신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힘드네.’

    집중력이 점점 떨어진다.

    그렇게 생각하며 옆에 있는 변규남을 슬쩍 쳐다보았더니, 그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 없다.

    허억.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서서 졸고 있는 건가?

    꾸벅, 꾸벅―

    변규남의 고개가 점점 위태롭게 기울어지다가 힘없이 툭 떨어지려 한다.

    저러다가 교수님한테 걸리면 엄청 혼날 텐데…….

    깨워야 하나?

    깨워야겠지?

    나는 교수의 눈을 피해 조심스레 손을 뻗어 변규남의 등을 쿡 찔렀다.

    "뜨허헙!"

    화들짝!

    변 선생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뜬다.

    그러자 환자에 집중하고 있던 교수가 화들짝 놀라며 우리를 돌아본다.

    "뭐, 뭐야? 무슨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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