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34화 (34/241)
  • #34 강남역(13)

    <저는 어릴 때부터, 백의신 교수님을 동경해서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움찔.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백의신이 반응했다.

    그의 시선이 화면 속 청년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어릴 때 봤던 다큐멘터리에서, 백의신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훌륭한 외과의사가 되려면 필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그게 뭐죠?>

    <매의 눈, 여인의 손, 사자의 심장.>

    <아주 멋진 말이군요.>

    <예.>

    청년은 고개를 끄덕인 뒤, 힘을 주어 말했다.

    <언젠가는 꼭, 백의신 교수님이 말했던 그런 외과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백의신은 픽 웃었다.

    겨울철 나뭇가지처럼 메마른 조소였다.

    하지만, 옆에 서 있던 여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백의신의 미소였던 것이다.

    "선생님, 웃는 얼굴 오랜만에 보네요."

    "……그런가."

    백의신이 중얼거렸다.

    다시 평상시의 무감정한 듯한 얼굴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백의신의 눈가에는 일종의 따듯한 감정이 배어났다.

    그것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치 아주 오래전 자신이 떼어 놓고 온 무언가를 다시 만난 것 같은, 그런 반가움이었다.

    #아이 씨 유(1)

    4월의 마지막 날.

    내가 응급실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물론 새벽까지 일이 이어졌고, 오늘의 마지막 환자는 젊은 커플이다.

    "선생님, 손가락에 반지가 꼈는데 도저히 안 빠져서 왔어요."

    "우리 자기 손가락 썩는 거 아녜요?"

    여자가 울먹이며 손을 내밀고, 그 옆에서 남자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오늘 밤에 남자 쪽이 프러포즈를 하며 반지를 선물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이즈를 잘못 계산했던 모양이다.

    억지로 반지를 낀 탓에, 여자의 손가락은 이미 탱탱 부어 있다.

    "에헤이. 반지를 너무 작은 걸로 주문하셨네."

    여봉철이 혀를 찼다.

    그러자 여자가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린다.

    "이상하다. 예전에는 분명 10호 맞았는데……."

    "자기야…… 그래서 야식 좀 작작 시켜 먹으라고 했잖아."

    "야 이 모지리 새끼야,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할 말이야?!"

    여자가 성질을 버럭 낸다.

    프러포즈를 한 날에 바로 커플 깨지게 생겼다.

    "싸우지 마시고, 가만있어 보이소."

    두둥!

    여봉철이 전기 절단기를 가져온다.

    허억!

    딱 봐도 무시무시한 외관에, 여자와 남자의 숨이 멎는다.

    "선한이, 니가 꽉 잡고 있그래이."

    "네."

    나는 여자의 손을 꽉 잡았다.

    이제 나는 여봉철 선생과 호흡이 척척이다.

    마치 도박장에서 ‘장난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아가는 거 안 배웠어?’ 같은 구도가 완성되었다.

    왜애애앵―

    "으아아아아."

    여자가 겁을 먹고 눈을 질끈 감는다.

    남자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뚜욱!

    여봉철의 절단기는 놀랍게도 여자의 손가락을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반지만을 절단했다.

    역시 응급의학과 에이스 여봉철 선생다운 깔끔한 솜씨였다.

    "드가이소~"

    "네……."

    여자와 남자는 뺨이 홀쭉해진 채 응급실을 나섰다.

    새벽 6시.

    이제 더 이상의 응급환자는 없는 것 같다.

    오늘로 정들었던 응급실도 바이바이다.

    "선한이,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나는 여봉철의 말에 멋쩍게 웃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친해질 줄은 몰랐는데.

    막상 그와 헤어지려고 하니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

    "아 참. 그리고 말해 줄 게 있었는데."

    여봉철이 손짓을 하더니 귓속말로 나에게 속삭인다.

    "니 인턴 평가 점수 말인데."

    "아."

    그러고 보니, 이번 달 평가가 남아 있었지?

    잠깐 잊고 있었다.

    예전에 여봉철 선생이 내게 A+를 주겠다고 했었지.

    그러다 막판에 나의 돌발 행동 때문에 일이 난감하게 되었다.

    과연 내 점수는 어떻게 처리될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 다행히 TV 인터뷰 이후에 교수님 기분도 풀린 것 같으니, 밉보여서 점수 깎이지는 않을 기다."

    "다행이네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물론 최종 점수가 몇 점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선방할 수 있을 것 같다.

    "다 여봉철 선생님 조언 덕분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말했다.

    사실 어제 뉴스 인터뷰를 할 때, 여봉철 선생이 나에게 조언한 것이 있었다.

    가급적 교수님들을 위한 립서비스를 많이 하라고.

    그래서 시킨 대로 했다.

    <훌륭하신 교수님들이 계신 연국대병원 응급실에서 가르침을 받은 덕분에 환자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던 걸까?

    다행히도 응급의학과 안에서 내 평판은 회복된 것 같다.

    이렇게 또 사회생활을 배워 가는가 싶다.

    "이번에야 운 좋게 수습됐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하그라. 알았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로만?"

    "언제 저희 횟집 오시면 가장 싱싱한 놈으로 대접하겠습니다."

    "응? 너 횟집 아들이가?"

    여봉철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가락시장에 위치한 우리 횟집 이야기를 해 주니, 그의 표정이 밝아진다.

    "이야, 조만간 함 놀러 가야겠네! 벌써 침 고이네."

    "언제든 오세요."

    "그래. 아무튼 어딜 가든 인턴 1년 동안 생활 잘하고."

    "넵!"

    나는 씩 웃었다.

    여봉철은 첫날 그랬던 것처럼, 내 등짝을 손바닥으로 짝 치고 설렁설렁 사라졌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을 가려낼 수 있게 된다고.

    인생을 돛단배에 비유하자면, 순풍이 되는 사람이 있고 역풍이 되는 사람이 있다고.

    여봉철은 어느 쪽일까?

    단연 순풍일 것이다.

    앞으로 병원생활을 하면서 나에게 힘이 될 사람과 인연을 만들었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 * *

    그날 저녁.

    한 달을 마무리하는 페어웰(farewell) 회식이 열렸다.

    장소는 병원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맥주 브루어리.

    그런데, 공교롭게도 많은 팀의 쫑파티 일정이 겹쳤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들로 술집이 북적거리고 있다.

    "야, 여기 오늘 우리 병원에서 전세 낸 거야?"

    "연국대병원 사람들 왜 이렇게 많냐?"

    "아까 외과랑 마취과 사람들도 있더만!"

    시끌시끌.

    서로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끼리도 반갑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다.

    나는 바에서 술을 가져오며 내 옆의 중원이 형에게 물었다.

    "여기가 연국대병원에서 유명한 장소인 모양이죠?"

    "그럼. 나 대학생 때도 선배들 따라서 온 적 있었거든. 젊은 의사들 사이에서는 제일 핫 플레이스라고 보면 돼!"

    하긴, 그럴 만하다.

    테이블도 넓고 분위기도 활기차다.

    너무 조용하지도, 너무 시끄럽지도 않아 여럿이서 식사를 겸한 맥주를 마시기에 적절한 장소다.

    "무엇보다 맥주 맛이 좋아서 인기가 많거든. 대신 치명적인 단점도 있지."

    "단점이요?"

    "혹시라도 여기서는 병원 사람들 흉보면 안 돼! 사방에 연국대병원 사람들이니까."

    중원이 형의 말에 나는 픽 웃으며 맥주잔에 입을 대었다.

    홀짝.

    오오?

    꿀꺽꿀꺽꿀꺽.

    크으!

    순식간에 반 잔을 비웠다.

    맥주 맛이 기가 막히다. 알싸한 청량감에 가슴이 뻥 뚫린다.

    이것은 마치 보리밭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내 혀의 돌기 하나하나를 감싸는 것처럼…….

    에라, 관두자. 내가 무슨 음식 평론가도 아니고.

    "술 맛있네요."

    "그치?"

    내 담백한 평가에 중원이 형은 미소를 지었다.

    "너도 평소에 말 안 해 본 분들이랑 얘기 많이 나눠 봐! 타 학교 출신이니까 사람들이랑 더 친해져야지."

    "그래야겠네요."

    "그리고 오늘은 네가 주인공이나 다름없잖아, 인마! 인턴 때부터 뉴스에 나오는 의사가 얼마나 되겠냐?"

    중원이 형이 내 어깨를 감쌌다.

    안 그래도, 몇몇 레지던트들이 자리를 활발히 옮겨 다니며 나를 찾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 강남역 사고 때문에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어, 유명 인사가 여기 있었구만!"

    "너 이름이 뭐였지?"

    "신선한입니다."

    "어, 그래. 반갑다!"

    나는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다.

    세상이 넓어지는 기분이다.

    좁디좁은 대학 때와는 달리, 사회생활에서는 훨씬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재미있다.

    * * *

    타악!

    다트가 과녁에 꽂힌다.

    "30점!"

    "와아!"

    술집 한가운데의 다트 기계에서 기계음이 울려 퍼진다.

    주위에 모인 의사들이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호한다.

    평소에 아무리 어른스러운 사람들일지라도, 경쟁이 붙으면 이렇게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

    오늘의 다트 대결은 외과 vs 마취과 vs 응급의학과.

    무려 진 쪽에서 병당 2만 원짜리 맥주를 테이블마다 돌리는 내기였다.

    물론 돈뿐만이 아니라 자존심까지 걸려 있다.

    "화이팅!"

    "무조건 이겨라!"

    "다른 과한테 지면 일주일 동안 오프 못 나가는 줄 알아라!"

    "점수 제일 낮은 놈은 내일 프리옵(pre―op, 수술 전) 동의서 몰빵이다~!"

    각 과의 치프들이 협박에 가까운 응원으로 선수들에게 힘을 싣고 있다.

    나는 한 손에 맥주잔을 들고 경기를 흥미진진하게 관전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슥 내 옆으로 다가온다.

    "TV에 나온 인터뷰 잘 봤어요."

    누구지?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말끔하고 단정한 얼굴의 앳된 남자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어린 정도일까?

    아마 인턴 동기인 것 같은데, 초면에 친한 듯이 말을 건다.

    "그런데, 저라면 그렇게 안 했을 거예요."

    "……?"

    "일단 빨리 병원으로 이송했을 거예요. 이송 중에 혈압이 유지 안 되면 구급차 안에 있는 에피네프린(epinephrine, 강심제) 투여해서 혈압을 유지하고, 필요시 병원에서 심낭천자를 하는 게 더 안전하니까요."

    갑자기 초면에 훈수를 둔다.

    일단 시비를 거는 말투는 아니긴 한데…….

    내가 물었다.

    "저기, 미안한데. 우리 서로 아는 사이였던가요?"

    "저를 몰라요?"

    "초면인 것 같은데."

    그러자 녀석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왜 모르지. 연국대 출신 아니더라도 나 모르는 사람은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중얼한다.

    대체 뭐지, 이 녀석은…….

    연예인병인가?

    "하하하, 죄송해요. 자기소개를 먼저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불쑥 손을 내민다.

    "류명인입니다."

    이름 참 희한하다.

    나도 어디 가서 이름 특이한 걸로는 안 지는데.

    나는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신선한이에요."

    "아하하하. 이름 진짜 특이하시네요."

    네가 할 말이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손을 내려다보고 놀랐다.

    그냥 사교적인 의미의 악수라고 하기엔, 은근히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대체 뭐야?

    팔씨름하자는 것도 아니고…….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다.

    웃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느껴진다.

    "선한이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제가 스물네 살이라 삼수생인 형보다 어릴 테니까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래, 그러자."

    "어차피 동기끼린데 서로 말 놓을까요?"

    응?

    갑자기 선을 넘는다.

    호칭에 그닥 집착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 와중에 느껴지는 의도가 불쾌하다.

    나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서로 친해지기 전까지는 존대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

    그러자 녀석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인마.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이거 웃기는 놈이네.

    나는 녀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세 살 정도 차이면, 초면부터 말 놓는 건 좀 아닌 것 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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