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강남역(12) "진우야~"
"면회 왔다!"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면회를 왔다가 나를 발견하고 놀란다.
"어, 그때 그 형이다!"
"선생님!"
"와아!"
학생들이 쪼르르 달려온다.
강남역에서 볼 때만 해도 울고불고하던 녀석들이, 지금은 얼굴에 천진한 웃음이 가득하다.
순식간에 밝은 에너지가 병동에 가득 찬다.
"친구 면회하러 온 거야?"
"네!"
"근데 너희 몇 학년이니?"
"중학교 3학년이요!"
변함없이 짹짹이들처럼 한목소리로 대답한다.
귀여운 녀석들.
"선생님 근데 몇 살이에요?"
"무슨 과 의사예요?"
"선생님 진짜 개멋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초롱초롱한 눈빛들로 나를 올려다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활기찬 기운이 전해진다.
문득 어릴 때 학창 시절 생각도 나고.
그때, 때마침 병동에 누군가가 고개를 불쑥 내민다.
"얘들아, 혹시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 아저씨는 여기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기념사진 한 장만 찍자."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살펴보니, 카메라를 든 홍보팀장이다.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오셨대?
파파라치도 아니고.
"네, 좋아요!"
"야, 비켜! 내가 의사 선생님 옆에 설 거야!"
"나도!"
곧 학생들이 내 주위로 우르르 모여든다.
나는 진우 학생의 옆에 섰다.
좋은 그림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홍보팀장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자, 찍는다!"
찰칵찰칵!
셔터가 빛난다.
아마 이 사진은 병원 홈페이지에 전시되거나, 사보에 실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나에게도 평생 추억거리가 될, 잊지 못할 사진 한 장이 되겠지.
그때, 홍보팀장이 다시 한번 예술혼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얘들아, 뭔가 더 크리에이티브한 포즈 없을까? 역동적이면서도 프레시한 이모션이 담긴……."
그만해, 이 양반아!
나는 이번에는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무난한 포즈를 취했다.
물론 학생들은 신나게 괴상한 포즈를 짓느라 바빴고, 한동안 병동은 녀석들이 뿜어내는 부산스러운 활기로 가득 찼다.
* * *
잠시 후.
정신없는 병실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학생들이 나를 붙잡고 인증 샷을 올리겠다고 셀카를 찍네 마네 난리였다.
학창 시절 교생 선생님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의사 가운이 거의 찢어질 뻔했다.
"휴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한숨 돌리고 있는데, 홍보팀장이 슥 다가온다.
"우리 인턴 선생님, 인기도 많네? 하루아침에 벼락스타가 된 기분이겠어."
나에게 건네는 말투가 사근사근하다.
"그런데, 혹시 내일 시간 좀 되겠어?"
"내일이요?"
내일은 좀 바쁜데.
응급의학과 인턴 마지막 날이다.
순환 배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음에 올 인턴들에게 인계를 넘기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과에는 내가 얘기해 둘 테니, 시간 좀 내."
"예. 그런데 무슨 일로?"
"SBC 뉴스에서 인터뷰하기로 했거든."
헉…….
인터뷰라니?
더군다나 공중파 방송?
황당하다.
이 비현실적인 꿈같은 상황은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왜 그렇게 놀라?"
"사실 이렇게까지 주목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당연하지. 이 정도까지 전 국민적인 이슈가 됐는데 방송국에서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
끄응.
물론 가끔 이런 일이 있다.
선행으로 뉴스에 나와 주목받는 시민들.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한 사람, 평생 모은 돈으로 남들을 도와준 사람 등등…….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별로 주목받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인터뷰, 꼭 해야 됩니까?"
"엥?"
"좀 부담스러운데요."
나는 뺨을 긁적거렸다.
그러자 홍보팀장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남들은 하지 못해서 안달인 것을 왜 마다하냐는 듯한 표정이다.
"이름 알리고 좋잖아?"
"아직 인턴인데, TV까지 나오는 건 좀……."
슬슬 부담스럽다.
아닌 게 아니라, 인터넷에는 나를 ‘의느님’이라고 부르는 사람까지 있다.
의학적인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본다면 코웃음을 칠 일이다.
게임 캐릭터로 표현하자면, 아직 나는 레벨 99 중에서 7 정도의 초보 캐릭터나 다름없다.
아직 미숙한 햇병아리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홍보팀장은 절실한 표정으로 나를 설득했다.
"그러지 말고, 나 좀 도와주는 셈 치고 하자. 응?"
"제가 인터뷰를 하면 병원에 도움이 되나요?"
"사실 올해 들어 병원 홍보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거든."
아하.
어쩐지 아까부터 나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이 이유가 있었군.
홍보팀장의 입장에서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가슴에 연국대병원 마크 달고 그림 한번 만들어 주라! 얼굴 아껴서 뭐 할래?"
"그럼 딱 인터뷰 한 번만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홍보팀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에휴. 자네도 알겠지만 병원이라는 게 잘해야 본전이고, 몇 번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이름값이 깎이는 건 순식간이거든. 그나마 백의신 교수님이 계셨을 때는 평판이 유지가 됐었는데, 은퇴를 하시는 바람에……."
나도 기억난다.
대략 3년 전.
백의신 교수의 돌연 은퇴.
50대 후반으로 정년이라기에는 이른 나이였고, 그 뒤로는 행적이 묘연해졌다.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고, 다만 소문이 무성할 뿐이었다.
‘병원장과 싸웠다더라.’
‘의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쫓겨났다더라.’
‘하도 수술을 많이 해서 지쳤다더라.’
‘늦은 나이에 연인을 만나 사랑을 찾아 떠났다더라.’
등등…….
물론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어쨌거나 백의신의 은퇴 이후, 연국대병원의 명성은 한풀 꺾였다고 한다.
물론 여전히 대한민국 의료계 최고의 병원이긴 하지만.
아직도 ‘백의신’이라는 커다란 이름 세 글자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 질문 목록은 대충 알려 줄 테니까, 그 근욱이라는 친구랑 인터뷰 준비 잘하고."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 이런 경험을 몇 번이나 해 보겠냐.
아마 뉴스 인터뷰까지 하면 며칠 동안 화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곧 다른 뉴스들에 묻혀 잊히겠지.
그런데…….
‘가만. 공중파 뉴스에 나온다면, 어쩌면 백의신 교수가 볼 수도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만약 그가 듣는다면.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를 만나게 된다면 꼭 전하고 싶었던 말.
* * *
쏴아아―
캘리포니아의 해안가 마을.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에 햇볕이 잘게 부서진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건물의 테라스에, 해풍을 맞으며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나이는 50대 후반쯤 되었을까?
머리는 희끗희끗한 백발이다.
오랜 시간 누적된 피로로 깡마른 얼굴이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매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각, 사각―
그는 조용히 연필을 깎고 있다.
아까부터 그의 앞에는 캔버스가 놓여 있지만, 정작 종이는 텅 비어 있다.
딱히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앉아 있다기보다는 흡사 참선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선생님."
그의 등 뒤로 누군가 외투를 들고 나타난다.
얼굴이 보기 좋게 그을린 늘씬한 혼혈 미녀다.
"뭐 하고 계세요? 바람이 아직 찬데."
"……."
"이제 나이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요?"
여자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외투를 덮어 준다.
사각, 사각―
남자는 말없이, 연필을 깎는 손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녀가 캔버스를 슬쩍 들여다보며 말한다.
"와, 설마 작품명이 백지예요? 아직 아무것도 안 그렸네요."
"그릴 거야."
"언제요?"
"그릴 게 생각나면."
남자는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흐음~ 저번 달까지는 낚시 삼매경이시더니, 이번에는 왜 갑자기 그림이에요?"
"업종을 바꿔 보려고."
"이제 와서요?"
"칼 쥐던 손으로 다른 걸 쥐려니, 쉽지 않네."
"칼 쥐던 손이 허전하니까, 뭐라도 쥐어야 성이 풀리는 거겠죠."
장난기 섞인 여자의 말에, 남자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사각, 사각―
계속해서 연필을 깎는다.
그의 앞에는, 마치 나무공예처럼 세밀하게 깎인 연필만 십여 자루가 놓여 있다.
누가 보면 기계로 깎은 줄 알 것이다.
그만큼 그의 손길은 정교했다.
캔버스 아래에 놓인 그의 고풍스러운 가죽 가방에는 금수로 이니셜이 수놓여 있다.
E.S.BAEK.
백의신.
수술대 위의 거장.
그는 지금, 의료 현장을 떠나 평범한 자연인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칼 쥐는 자세가 여전히 살아 있으시네. 수술대가 그립진 않으세요?"
"전혀."
백의신은 선을 그었다.
다시 의료 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마치 용도를 다한 도구가 조금씩 녹슬어 가듯이…….
혹은,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집에 하얗게 먼지가 쌓이듯이…….
그는 그렇게 세상에서 조금씩 자신을 지워 내고 있는 듯했다.
사아아―
바다로부터 짠 내가 섞인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한껏 기지개를 켜던 여자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그나저나, 한국에서는 요새 선생님 이름이 다시 핫하던데요."
"……?"
"백의신 워너비(wannabe) 라고 요새 유명하던데…… 한번 보실래요?"
여자가 그렇게 말하며, 스마트폰 화면을 내민다.
백의신은 고개를 저었다.
"한국 소식에는 관심 없……."
그러다가 문득, 그의 귀에 흥미로운 소리가 들어온다.
<무엇보다 두 번째 환자의 증상이 발견하기 쉽지 않았던 ‘심낭압전’. 이걸 현장에서 발견하셨던 것이 또 굉장히 화제인데…….>
백의신의 시선이 화면에 고정되었다.
뉴스 화면 속에서, 왼쪽에 위치한 앵커가 말하고 있다.
그러자 오른쪽에 위치한 수련의 두 명 중 하나가 대답한다.
<예, 운이 좋았습니다.>
화면 속 청년은 2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인다.
눈빛이 맑고 얼굴이 앳되다.
마치 갓 알을 깨고 나온, 따사로운 봄볕에 노출된 병아리 같다고 해야 하나?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인상이다.
물론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의 특이한 이름이다.
신선한 (수련의, 27).
화면 아래의 자막이 그의 나이와 신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혹시 어떻게 진료하셨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청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략하게.>
<환자가 떨어지는 낙재에 맞아 가슴에 크게 멍이 들어 있었고, 의식이 흐려졌습니다.>
신선한의 설명에, 백의신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혈압이 떨어지고 목을 확인해 보니 경정맥이 확대되어 있어…….>
"페리카디오센테시스(pericardiocentesis)."
신선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의신이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현장의 상황이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라면 아마…….
‘현장에서 조치했겠지.’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정확한 판단력과 손 기술, 무엇보다 담력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결정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화면 속 수련의가 말한다.
<병원에 데려가면 늦겠다고 판단해서, 현장에서 바로 조치했습니다.>
"그렇지."
백의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는 몰입하고 있었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백의신은 천성이 외과의사였다.
그런 그를 옆에서 보고 있던 여자는 말없이 웃었다.
뉴스 인터뷰는 슬슬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 질문을 드릴까요.>
<넵!>
<두 분은 앞으로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지……? 일단 김근욱 씨부터.>
<저는 국밥 같은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국밥이요?>
<예. 국밥은 언제든지 믿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죠! 환자에게 친근하고 든든한…… 아무튼 그런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앵커의 입에 미소가 걸린다.
체격이 큰 근욱이라는 청년은 다소 긴장해 있었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정감을 자아냈다.
<다음으로 신선한 씨의 말씀을 들어 볼까요.>
<저는…….>
선한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