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강남역(11)
<부원장 함경일>
함경일 교수.
말로만 듣던 소담이의 아버지였다.
……세상에.
소담이의 빽이 튼튼한 건 알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부원장님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고 보니, 작고 둥글둥글한 인상이 묘하게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인턴생활 하면서 내 부족한 딸을 많이 도와주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웃는다.
나는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오히려 제가 소담이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보다 훨씬 똑똑하고 잘하는 친구여서요."
"그래?"
"예."
"거짓말도 잘하는구만. 어차피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겠지만."
부원장님이 빙긋 웃는다.
말 한마디에 은근히 뼈가 있는 타입이다.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가 가득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조목조목 관찰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을 받아 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뒷목이 뻣뻣해진다.
"언제 한번 밥이나 먹지."
"……네, 알겠습니다."
"자, 그럼 홍보팀에서 고생 좀 해 주시고."
"예, 부원장님!"
"우리 병원 이름 달고 언론에 나갈 친구인데, 기왕이면 신경 좀 써 줘야지."
찡긋!
그렇게 말하며, 부원장이 익살스레 윙크를 한다.
이제 보니 햄스터같이 생기셔서 부녀가 꼭 닮은 모습이다.
그때 문득 소담이가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어떻게든 너 도와줄 수 있는 길을 찾아볼게.
그게 이런 뜻이었나?
어쩌면 소담이가 아버지에게 내 편을 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을지도 모른다.
‘……기분 묘하네.’
내가 미래를 보고 난 뒤 했던 행동들이, 모조리 나비효과가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 같다.
<소담이가 실수하지 않도록 신경 쓰며 도와준 것>.
<강남역에서 환자를 구한 것>.
등등…….
많은 결정들이 절묘하게 얽혀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환자들의 미래는 눈앞에 보이는데, 정작 나 자신의 미래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 * *
1층 로비.
‘서울 연국대병원’의 로고 앞에, 나와 근욱이가 나란히 서 있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홍보팀장이 답답하다는 듯 말한다.
"자, 그렇게 뻣뻣하게 있지 말고 포즈 좀 취해 봐."
"포즈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사에 실리는 걸 텐데, 멋대가리 없게 나오고 싶어?"
"어, 음……."
어색하다.
손이 갈 곳이 애매하다.
근욱이와 나는 뻘쭘하게 서로를 쳐다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양팔을 가슴 앞에 교차시켰다.
그동안 왜 인터뷰 기사들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같이 팔짱 포즈인지 의아했었는데, 직접 겪어 보니 알 것 같다.
그것 말고는 딱히 취할 포즈가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에이, 재미없게시리…… 긴장 좀 풀지."
홍보팀장이 아쉽다는 듯 말한다.
나는 어색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징계위원회에서 혼나고 있던 입장 아니던가!
갑자기 홍보 모델이라도 된 듯 사진을 찍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찰칵찰칵찰칵―
"쓰읍. 좀 아쉬운데."
홍보팀장은 사진을 찍으며 계속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는 듯한 표정이다.
"뭔가 더 싱그러우면서도 멋진 포즈는 없을까? 너무 엘리트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시크한…… 그러면서도 사회 초년생들의 퓨어함과 청량함이 느껴지는 듯한……."
무슨 말이야, 저게?
요구 사항이 난해하다.
나와 근욱이가 멀뚱히 눈을 깜빡이고 있자, 홍보팀장이 한 줄 요약을 해 준다.
"젊은 의사들답게 패기 넘치는 느낌 말이야!"
"이렇게요?"
근욱이가 오랑우탄처럼 팔에 힘을 준다.
"오, 좋아!"
홍보팀장의 얼굴이 활짝 밝아진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본다.
"자네도 같이해야지?"
에라 모르겠다.
나는 근욱이와 함께 다양한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오, 좋아좋아!"
찰칵찰칵찰칵!
홍보팀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셔터를 누른다.
"너무 이상하게 나온 사진은 지워 줄 테니까, 좀 더 과감하게 해 봐!"
"예!"
정확히 2시간 후.
나는 포털 사이트 뉴스 사회면에 뜬 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인생의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기사에 나올 사진은, 절대 이상한 포즈로 찍지 말자.
* * *
카톡―
카톡―
카톡―
알림음이 울려 퍼진다.
오전에 사진을 찍자마자 녹초가 되어 곯아떨어졌고, 저녁이 되어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신함에 쌓여 있는 수십 개의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한주] 이거 너냐?
[영준] ㅋㅋㅋㅋㅋㅋ 사진 좀 멀쩡하게 찍지 그랬냐
[준화] 오 ㅋㅋㅋ 선한이 멋있어~ 누군가 했더니 내가 아는 얼굴이라서 깜놀했다
[수경] 야 선한아 오랜만이다 잘 지내썽??
가족.
친척.
동네 친구.
동창, 선생님.
심지어 단골 미용실 주인까지.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던 지인들에게서 모조리 연락이 오고 있다.
이게 정말 현실인가?
어제부터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널리 퍼질 줄 알았다면 멀쩡하게 사진을 찍었으면 좋았을 텐데.
사진이 워낙 웃기게 나와서 창피하지만, 뒤늦게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
[둘째 누나] 야 사진 이게 뭐냐 ㅋㅋㅋ
[큰누나] 우리 막내 잘생겼다~~
[아버지] 아들 정말 자랑스럽구나! 역시 가락시장의 명물이다!
가족들도 난리다.
좀 민망하긴 하지만, 가족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휴게실에서 근욱이와 나란히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는데, 연서가 다가온다.
"와아, 슈퍼스타들이다! 사인해 주세요!"
"하지 마."
나는 얼굴을 붉혔다.
반면 근욱이는 희희낙락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야, 연서야. 오늘 인터넷에 하루 종일 우리 얘기밖에 없더라. 이러다 우리 완전 유명해지는 거 아니냐?"
근욱이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포털 사이트에 기사가 떴고, 심지어 TV 메인 뉴스에도 보도되었다.
동영상 채널에 들어가면, 급상승 인기 목록 최상단에 우리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하루 이틀 정도 있다가 잠잠해지겠지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다.
살면서 이런 날도 있구나.
"안 그래도 동영상에 재미있는 댓글 엄청 많더라고요. 선한 오빠 댓글 제가 읽어 줄까요?"
"아니, 하지 마."
"1분 15초 의사분 미모 실화냐? 우리 집에도 심정지 환자 있는데 빨리 와 주세요…… 당신을 본 제 심장이 멈춘 것 같으니까."
"하지 마……."
나는 괴로워했다.
요새 유행하는 ‘주접 댓글’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과장되게 호감을 표현하는 걸 뜻하는데, 그중에는 재치 있는 표현들이 많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저항력이 딸려서 잘 못 듣겠다.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괴롭다고!
곧 근욱이가 관심을 보이며 고개를 내민다.
"내 댓글은? 내 댓글은 그런 거 없냐?"
"한번 보실래요?"
연서가 댓글을 보여 준다.
―근육맨 ㄷㄷ
―형 멋있어요!!
―2분 12초에 나오는 팔근육 실화냐 ㅋㅋ 3대 운동 500은 치실 듯 ―여러분 데드리프트 운동이 저렇게 중요합니다. 다들 헬스하시길 바랍니다!
"뭐야, 나는 왜 남자들밖에 없어? 댓글에서 땀 냄새 나네."
"억울해요?"
"야, 똑같이 주목받아도 누구는 심장이 멎는다 어쩌구 하는 소리까지 듣고, 누구는 남자들밖에 안 들러붙고……. 서럽다!"
근욱이가 투덜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칭찬을 받아서 기분 나쁜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도 마찬가지다.
비록 몇몇 댓글들이 민망하긴 하지만, 솔직히 기분은 정말 좋다.
하루 동안 감정이 지하 밑바닥부터 구름 위까지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다.
따르르르―
그때 내 콜폰이 울린다.
오늘 오프인데, 누구지?
"예, 인턴 신선한입니다."
<선한 쌤, 오랜만.>
"수간호사님?"
익숙한 목소리다.
저번 달에 친해졌던 내과 병동 간호사 파트장님이다.
웬일로 연락을 하셨을까?
<지금 안 바쁘면 1705로 잠깐 올래요?>
"예. 갈 수 있긴 한데 무슨 일이죠?"
<이진우 환자가 선한 쌤 보고 싶대요.>
"엇, 정말요?"
나는 반색했다.
이진우 환자가 하루 만에 중환자실에서 벗어나 일반 병동으로 옮겨진 모양이다.
즉, 이제 완전히 위험한 상태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금방 올라가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서둘러 가운을 입었다.
* * *
타닥!
엘리베이터를 탔다.
두근, 두근.
이게 뭐라고 설렌다.
왜일까?
환자를 보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닌데.
아마도 내가 극적으로 발견해서 살려 낸 환자이기 때문에,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드륵―
병실로 들어서자, 환자복을 입고 있는 진우 학생이 보인다.
간밤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좋아진 얼굴이다.
"어, 선생님!"
진우 학생이 나를 보고 반갑게 웃는다.
나는 빙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제보다 훨씬 살 만해 보이네?"
"헤헤. 선생님 덕분이에요."
진우 학생은 밝게 웃더니 옆에 있는 보호자에게 말한다.
"엄마, 이분이셔!"
"아……."
보호자가 벌떡 일어나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거의 머리가 땅에 닿을 듯한 기세에, 나도 황급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희 진우 살려 주셨다고……."
"어휴, 아닙니다. 저는 응급조치만 했을 뿐이고 살려 주신 건 다른 의사분들이에요."
내가 얼른 덧붙였다.
하지만 보호자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한다.
"그래도 주치의 선생님한테 얘기 들었어요. 우리 진우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게 다 선생님 덕분이라고요. 그래서 너무 감사해요."
주치의?
누구를 말하는 걸까.
"주치의가 어떤 선생님이시죠?"
"성함이 뭐였더라. 눈이 이렇게 약간 무섭게 생긴 분이었는데……?"
보호자가 주치의의 인상을 설명하며 도깨비 눈 모양을 만든다.
아무래도 김뱀을 말하는 것 같다.
참 나.
내 앞에서는 무슨 대역죄인처럼 죽일 듯이 다그치더니…….
그래도 보호자들 앞에서는, 나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해 준 모양이다.
"진우야, 제대로 인사해야지."
"예."
보호자의 말에, 진우가 고개를 꾸벅 숙인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 진짜 죽는가 싶었는데, 그 순간 눈앞에 주마등이 확 지나가더라구요."
15세의 환자.
길지 않은 인생이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한이 없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자신을 되돌아보기 마련이니까.
"평소에 맨날 게임만 하고. 엄마 말 안 듣고 놀러만 다니고…… 진짜 후회가 많이 됐어요."
진우 학생은 볼이 쏙 들어간 얼굴로 활짝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런데 선생님이 살려 주셨으니까 두 번째 인생 살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퇴원하고 나면 진짜 열심히 한번 살아 보려구요!"
"……그래."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왠지 가슴이 뭉클하다.
내 손으로 직접 살려 낸 환자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것은 무척 특별한 경험이다.
의사로서, 지금 이 감정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어질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저 갑자기 장래 희망 의사 됐거든요. 성적 별로 안 좋은데 가능할까요?"
"너 성적이 어느 정도인데?"
"학교에서 중간 정도……."
"나는 중학교 다닐 때 성적 너보다 훨씬 안 좋았어."
"정말요?"
"응. 고등학교 때부터 마음잡고 겨우 의대 합격한 거야.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충분히 가능해."
그러자 진우의 표정이 밝아진다.
내 말에 희망을 얻은 듯했다.
"저 열심히 해 볼게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때, 병실 바깥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소리지?
드르륵!
곧 병실의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