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30화 (30/241)

#30 강남역(9)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레지던트들의 시선들이 곱지 않다.

다들 말없이 냉랭한 표정으로 회의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불편한 기운이 감돈다.

아무래도 내가 벌여 놓은 짓에 대한 소문이 벌써 돌았던 모양이다.

저벅, 저벅―

응급의학과의 사람들이 모두 모인다.

곧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회의가 시작되려 한다.

그때, 갑자기 교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한다.

"잠깐."

"예?"

"회의 시작하기 전에 필요 없는 인원은 내보내지."

그렇게 말하며, 레지던트들을 슥 쳐다본다.

"병원 외부에서 건방지게 제멋대로 진료 행위 하는 인턴, 우리 과에 필요 없는 것 같은데."

"……!"

교수는 내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누가 들어도 나를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치프(chief)들이 눈치를 주자, 여봉철이 내 옆으로 다가와 속삭인다.

"선한이. 일단 오늘은 좀 나가 있그래이."

"……예."

꾸벅.

나는 고개를 숙인 뒤 회의실 문을 나섰다.

등 뒤로 십여 개의 시선이 비수처럼 꽂힌다.

철컥―

문을 닫음과 동시에 헛웃음이 나왔다.

어젯밤에 김뱀이 나에게 경고하듯이 말했던 게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조직에서 일 못하는 사람만 싫어하는 줄 알아?

―천만에. 남들 안 하는 짓 하면 그게 바로 말리그인 거야.

―너는 앞으로 병원생활 힘들어질 거다.

김뱀의 말이 맞았다.

분명 나는 조직에서 ‘선’을 넘는 행동을 했고,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뭐, 받아들여야지.’

나는 씁쓸히 웃었다.

튀어나온 못이 얻어맞는다고?

좀 맞지 뭐.

애초에 이 정도 각오도 안 하고 있던 건 아니었으니까.

* * *

시간이 흘러간다.

1분 1초가 고역이다.

레지던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뎌 내며 오전 업무를 보았더니 진이 쭉 빠진다.

"후우."

나는 모니터 앞에 서서 한숨을 돌렸다.

주위의 눈총?

사실 별거 아니다.

그보다, 아직 환자의 상태가 미지수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괜한 짓을 한 걸까?

내가 어제 했던 행동이 정말 잘못된 것이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로 인해 마음이 괴로웠다.

"저기."

"?"

그때,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햄스터를 닮은 소담이의 얼굴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소담아."

"나 그거 써야 되는데……."

"어, 미안."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모니터에서 몸을 비켰다.

소담이는 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시무룩해 보이네. 너답지 않게."

"그런가."

나는 씁쓸히 웃었다.

소담이도 어제 있었던 일을 모두 들었겠지.

아마 지금쯤이면 병원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퍼졌을 테니까.

"어제 한 일이 후회돼?"

소담이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후회?

천만에.

후회는 하지 않는다.

아마 시간을 되돌려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할 테니까.

다만 머리가 복잡할 뿐이다.

"후회는 안 하는데, 내가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는 헷갈리네."

그러자, 소담이가 모니터의 버튼을 누르다 말고 불쑥 말했다.

"대한민국 언론사 개수 1만 8천 개야."

"응?"

"그중에 몇 개가 이상한 소리 한다고 해서 신경 쓰지 마."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소담이를 바라보았다.

조금 어색하고 서툰 말투였지만, 소담이 나름대로 나를 위로해 주는 방식이었던 모양이다.

"넌 의사로서 네 나름대로의 최선의 판단을 한 거잖아. 난 네가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

놀랍게도, 그 말에 기분이 풀린다.

그래, 까짓것!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나는 내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다.

내 의지대로 선택을 했으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당히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단순명료해졌다.

"고마워, 소담아."

"그리고……."

소담이는 발돋움을 하더니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어떻게든 너 도와줄 수 있는 길을 찾아볼게. 내가 힘들 때 너도 나 도와줬잖아."

그렇게 말하는 소담이의 표정이 진지하다.

그만큼 친구로서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 말만이라도 고맙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소담이가 했던 말은 잊어버렸다.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 같은 인턴끼리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나는 두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첫째. 소담이는 평범한 인턴이 아니었다.

둘째. 소담이는 한 번 말한 것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지키는 성격이었다.

* * *

"둘 중에 하나 골라라."

"둘이요?"

"좋은 소식, 나쁜 소식. 뭐부터 들을래?"

여봉철 선생이 대뜸 묻는다.

오늘 오전 내내 한마디도 없다가, 점심시간이 끝난 뒤 나를 불러내 처음으로 하는 말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기왕이면 좋은 소식부터 듣고 싶네요. 안 좋은 소식은 어제부터 많이 들어서요."

"환자 밤새 많이 좋아졌다 카드라."

나는 여봉철 선생에게 반갑게 되물었다.

"진우 환자 말씀입니까?"

"그래. 오늘 오후나 내일쯤에 익스투베이션(extubation, 기도관 제거) 한다 카더라."

휴우…….

다행이다!

나는 안도하며 의자에 앉았다.

기도 삽관을 제거한다는 것은, 그만큼 환자의 상태가 좋아졌다는 뜻이니까.

비록 내 상황은 곤란하게 흘러가고 있지만, 환자가 건강해지고 있다니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앓던 이가 빠진 듯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물었다.

"그럼 나쁜 소식은 뭡니까?"

"내일 징계위원회 열린다 카더라."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제멋대로 의료 행위를 한 것 때문에, 아무래도 교수에게 단단히 찍혀 버린 것 같으니까.

‘오히려 잘됐어.’

만약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차라리 속 시원하게 징계를 받고 끝나는 것이 훨씬 낫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여봉철이 황당하다는 듯 나를 보며 말한다.

"얼씨구. 웃음이 나오나?"

"그렇다고 진우 환자 좋아졌다는데, 울 수는 없잖아요."

"하이고. 임마 완전 또라이였네. 내가 첫날부터 딱 알아봤어야 했는데."

여봉철이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쯧쯧 차다가 말한다.

"남은 기간 동안 얌전히만 지냈으면 이번 달 인턴 평가도 잘 받고 넘어갔을 긴데, 와 굳이 그런 짓을 했노?"

"환자가 어린 학생이었습니다."

"뭐라꼬?"

"어린 친구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쇼크가 진행되고 있는데, 저밖에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

여봉철은 순간 할 말을 잃는다.

그 역시 환자가 눈앞에 있었더라면 나처럼 무엇이라도 하려 했을 테니까.

여봉철은 머리를 벅벅 긁고 한숨을 푹 쉰다.

"섀끼, 할 말 없게 만드네.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도 없고."

"신경 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됐고. 내일 징계위원회 가서도 그리 뻔지르르하게 대답 잘하그래이."

"무슨 대답을 준비해야 할까요?"

"내가 아나? 이런 일은 내도 처음 겪는다 아이가."

여봉철은 그렇게 말하다가,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괘안타.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그 말이 더 무서운데요."

"무서워?"

"예."

"구라 치고 앉았네. 그게 무서운 놈 표정이가?"

여봉철은 열받는다는 듯 나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으악!

땀 냄새 나!

그리고 다음 날.

나는 24시간 근무가 끝난 뒤 녹초가 된 상태로 대회의실로 불려 갔다.

* * *

지금 나의 심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대기업 신입 사원이 임원진에게 둘러싸여 압박면접을 보는 기분?

아니면 이등병이 별 달린 장성들 앞에서 취조당하는 기분?

나는 회사도 안 다녀 봤고 군대도 안 가 봤지만, 왠지 그런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어깨가 돌처럼 뻣뻣해지고 긴장이 된다.

[신승우 교수] 응급의학과 과장

[서민석 교수] 순환기내과 과장

[민형주 교수] 교육인재개발실장

등등…….

평소에는 대화를 나눌 수조차 없는 교수님들이 앉아있다.

그 외에도 의사가 아닌 직원도 있었는데, 아마도 법률팀에서 나온 듯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소화불량이 생길 것 같은 불편한 자리다.

당당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막상 교수들의 얼굴을 보니 입술이 바짝 마른다.

"다들 모인 건가?"

"그럼 슬슬 이야기 시작해 볼까."

교수들이 건조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눈다.

"잠깐. 아직 흉부외과 과장이 안 보이는데."

흉부외과 과장.

그 말을 듣는 순간, 교수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탄을 내뱉는다.

"하아. 그 친구 오면 정신 사나운데…… 그냥 우리끼리 하면 안 되나?"

"아무리 그래도 심장 쪽 관련된 이슈인데 저희끼리 진행할 수는 없지요."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교수들끼리 약간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친구’가 누구일까?

왠지 오가는 대화로 미루어 보면, 다른 교수들과 그리 친한 관계는 아닌 것 같다.

그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아이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상대적으로 젊어 보이는 40대 초반의 얼굴이 등장한다.

그런데 머리에는 수술 모자를 쓰고 있다.

그냥 평범한 모자가 아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토끼 캐릭터가 잔뜩 그려져 있는 앙증맞은 개인용 수술모다.

[허준임 교수] 흉부외과 과장.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허 교수, 수술 끝나고 오는 길인가?"

"어라,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네."

"아이고~ 이걸 아직 안 벗고 있었네! 어쩐지 머리가 가렵더라!"

허준임 교수가 실실 웃으며 수술모를 벗었다.

잔뜩 헝클어진 더벅머리가 드러난다.

……뭐랄까.

분위기가 특이한 사람이다.

정신없다고 해야 하나, 부산스럽다고 해야 하나?

시종일관 실없이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데 분명 익숙한 이름과 얼굴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아! 기억났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렸을 때부터 몇 번이나 돌려 보았던 백의신 다큐멘터리.

그중 ‘백의신 팀’에 속해 있던 심장외과 의사 중 한 명이 분명했다.

물론 세월이 지나 얼굴은 조금 달라졌지만, 특이한 인상은 그대로였다.

옛날부터 영상 속에서 자주 보던 사람을 실제로 만나니 기분이 묘했다.

"그나저나 간밤에 재밌는 일 있었다면서요?"

"재밌는 일?"

"재밌는 일이죠, 세상에 이보다 더 재밌는 일이 어딨습니까?"

허준임 교수가 실실 웃으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다.

"햐아~ 깡다구가 대단해요. 강남역 번화가 한가운데에서 페리카디오쎈테시스(pericardiocentesis)! 나도 그런 거 살면서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네. 완전 의사들의 로망 아닙니까? 예? 예?"

랩 하는 줄 알았다.

그야말로 속사포.

그러자 교수들이 불편한 듯 헛기침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준임 교수의 말은 끊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걸 새파랗게 어린 인턴이 초음파도 없이 성공시켰다면서요. 그 용감무쌍한 친구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저 친굽니까?"

그렇게 말하며 내 얼굴을 바라보는 두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