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강남역(8)
"선한아."
누군가 했더니 근욱이었다.
뒤늦게 연국대병원으로 온 근욱이도 여기저기 피가 묻고 더렵혀진 얼굴이다.
"근욱아!"
나는 반갑게 다가갔다.
몇 시간 되지 않았는데도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까 다리에 출혈 심한 환자는 어떻게 됐어?"
"한영대병원으로 갔어. 병원 도착할 때까지는 혈압도 괜찮고 의식도 괜찮았어."
"다행이네."
"그보다 네가 심낭천자한 환자는? 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지?"
근욱이가 다급히 묻는다.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근욱이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야, 다행이다. 혹시 잘못되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
"나는 오죽했겠냐."
내 말에 근욱이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튼 너는 내가 여태까지 본 놈들 중 제일 또라이 같은 놈이야."
"그러게. 나도 내가 뭔 짓을 했나 싶다."
나는 씁쓸히 웃었다.
조금 전까지 강남역에서 있었던 모든 일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근욱이는 힘내라는 듯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나저나 너 내일 응급실 근무잖아? 얼른 가서 자자."
"다리에 힘이 없다."
"업어 줄까?"
"됐다. 차라리 기어가련다."
나는 근욱이와 농담을 겨우 주고받을 정도의 기력을 간신히 회복했다.
그 난리를 함께 겪고 났더니, 근욱이와 좀 더 친해진 기분도 든다.
잠시 후.
우리는 녹초가 되어 인턴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하고 돌아와 누웠으나, 불안하여 잠이 오지 않는다.
"……."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또렷하다.
스윽.
나는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와 인턴 휴게실의 컴퓨터 앞으로 갔다.
이진우 환자의 차트를 조회해 보니, 각 과별로 노트가 적혀 있다.
이진우 (M / 15)
[TS Progress Note]
Blunt Trauma
cardiac tamponade
s/p PCC insertion
……
Chest CT상에서 관찰되는 lung contusion 에 대하여 앞으로 5일간 daily CXR으로 f/u 하겠습니다. delayed hemothorax 발생시 TS contact 주시기 바랍니다.
TS R3 마동섭
……어렵다.
나는 까막눈이 된 기분으로 더듬더듬 노트를 읽었다.
아직 인턴이기에 중간중간 모르는 단어들도 있다.
어쨌거나 흉부외과에서는 당장 수술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라고 보았나 보다.
딸깍딸깍.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다음 노트를 클릭했다.
[GS Progress Note]
복강 내에서 발견되는 Liver laceration 및 hemoperitoneum 심하지 않아 observation 하겠습니다. 입원 후 pf. 윤상일 앞으로 consult 부탁드립니다.
GS R2 김기운
다음은 외과 노트다.
외과에서도 복강 내 상처가 당장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심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외에 피검사 결과도 생각보다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
‘결국 심장 빼고는 큰 문제는 없다는 건가?’ 안도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방심할 수 없다.
김뱀의 말대로, 환자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때, 숙소의 문이 열리고 다른 인턴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직 친해지지 못한 인턴들.
그들이 나를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저들끼리 속삭이며 걸어간다.
"쟤 맞지?"
"어."
그들의 짧은 대화가 내 귀에 들어온다.
벌써 소문이 난 걸까?
하긴 그럴지도 모른다.
인턴이 그 난리를 쳤으니, 소문이 안 나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내가 강남역 한복판에서 무슨 짓을 한 걸까…….’
후우―
나는 소파에 앉은 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오늘만큼은 내가 얻게 된 능력이 원망스럽게 느껴진다.
"안 자요?"
투욱―
정수리에 뭔가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 보니 연서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당직 근무 중이었는지,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를 묶고 있다.
"연서야."
"내 이럴 줄 알았어. 우리 신선한 선생님, 보나 마나 잠 못 자고 있을 줄 알았지."
그렇게 말하며, 샐쭉한 표정으로 손에 든 것을 건넨다.
유리병에 담긴 차.
손에 쥐어 보니 아직 따듯한 온기가 남아 있다.
"고마워."
"얘기 다 들었어요. 강남역 한복판에서 드라마 한 편 찍으셨다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하여간, 우리 병원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야. 미팅하러 나갔으면 재밌게 놀기나 하지, 왜 사서 고생을 해요?"
풀썩―
그렇게 말하며 내 옆에 앉는다.
나는 연서가 준 유리병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연서야."
"네?"
"내가 괜한 짓을 한 걸까?"
연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내 목소리는 불안함과 떨림을 감추지 못한다.
"환자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만약 내가 했던 조치가 적절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감쌌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입 밖으로 속내를 말하니 감정이 북받쳐 오르려 한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괜찮을 거야."
연서는 내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내가 진정될 때까지, 가만히 내 옆자리에 있어 주었다.
그날 밤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 * *
다음 날 아침.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나는 퀭한 눈빛으로 일어나자마자 휴게실 컴퓨터 앞으로 가서 차트를 다시 열어봤다.
밤사이 특별한 내용이 추가된 것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엇."
나의 눈이 커졌다.
이진우 환자가 어디 갔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응급실 환자 목록에 보이지 않는다.
등골에 얼음장을 가져다 댄 것처럼 머리카락이 쭈뼛 솟는다.
환자 목록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설마…….
‘익스파이어(expire, 사망)?’
환자의 이름이 리스트에서 없어졌다는 것은 몇 가지 가능성을 뜻한다.
첫째. 환자가 죽었거나.
둘째. 퇴원했거나.
셋째. 혹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거나.
‘사망한 건 아니겠지?’
나는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다급히 마우스를 움직였다.
제발 아니기를!
그리고 잠시 후.
곧 나는 다른 탭에서 이진우 환자의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마도 밤사이에 응급실에서 순환기내과 중환자실로 옮겨졌던 모양이다.
"휴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놀랐잖아!
방금 몇 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내 수명이 1년 정도 줄어든 기분이다.
EMR(전자의무기록)을 열어 환자의 바이탈을 확인해 보니, 생각보다 괜찮다.
랩(Lab, 피검사)도 어제와 비교하여 호전 추세이고, 의식 평가도 정상으로 보인다.
‘다행이네.’
이 정도라면 일단 안심하고 출근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부리나케 씻은 뒤 출근 준비를 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회의실로 향하자, 먼저 도착해 있던 중원이 형이 나를 보고 일어선다.
"선한아!"
"형."
"얘기 들었다. 어젯밤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중원이 형이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사고 현장을 지나치게 됐어요."
"헉, 그랬구나…… 나도 너희들이랑 같이 있었다면 도움이 됐을 텐데."
중원이 형이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어제 미팅이 끝나자마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출발했던 모양이다.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택시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져서 그 뒤로는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한다.
"참. 근데 너 수진 씨랑 전화번호도 교환 안 했냐?"
"안 했는데요."
"왜?"
"어제 급하게 헤어지느라……."
"하이고, 매정한 놈. 그래서 나한테 문자가 왔구나? 수진 씨가 너한테 말 좀 꼭 전해 달래."
"뭐라고요?"
"앞으로 대원항공 여객기 함부로 타지 말란다. 네 얼굴 보면 기내식에 독극물 넣을 수도 있다고."
……헉.
무섭다.
이게 바로 원한이라는 건가?
하긴, 그렇게 적극적으로 대시를 한 상대에게 대놓고 망신을 줬으니 원한이 생길 법도 하다.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나저나 너, 어제 길바닥에서 환자 가슴 찔렀다는 게 진짜야? 저번 응급실 환자처럼 기흉 환자였어?"
"이번엔 렁(lung, 폐)이 아니라 하트(heart, 심장)였어요."
"헐 미친…… 심장?! 너 혼자 그럼 심낭천자를 한 거야?! 괜찮겠냐?"
"일단 다행히 환자 상태는 나쁘지 않아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중원이 형이 끄응 하고 머리를 긁적인 뒤 말한다.
"환자가 아니라 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아무래도 병원 사람들은 안 좋게 볼 게 뻔하거든."
중원이 형이 설명을 덧붙인다.
"적당히 잔소리만 듣고 넘어갈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하필 인터넷에 기사까지 났으니……."
기사?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라뇨?"
"몰랐냐?"
중원이 형이 스마트폰을 꺼내 나에게 무언가를 보여 준다.
"오늘 아침에 나온 기사인데 너도 봐 두는 게 좋을 거야. 너무 충격받지는 마라."
나는 중원이 형이 내민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사회] 의사 면허 딴 지 3개월 된 Y병원 인턴, 만취 상태에서 외상 환자에게 실험 강행?
……뭐야, 이게?
제목부터 황당하다.
내가 무슨 사이코패스 의사인 것처럼 적어놓았다.
표현이 너무 악의적이잖아!
물론 황당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스크롤을 내리던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술에 취한 병원 인턴, 강남 번화가에서 환자 가슴 찔러…… 환자는 ‘중태’―Y병원 응급실로 이송된 환자, 상태는 심각한 것으로 알려져…… 회복 여부는 미지수젠장!
무슨 기사가 이따위야?
기사만 읽어 보면, 마치 나의 행동 때문에 환자가 위중해진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디테일한 내용들도 엉망진창이다.
나는 만취하지도 않았었고, 기사에 적힌 의료적인 상황 묘사는 엉터리였다.
하지만 이미 기사에는 좋지 않은 댓글이 잔뜩 달리고 있었다.
댓글(108)
―헐 인턴이?
―또라이네 ㅋㅋㅋ
―의사 면허 따면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았나 보네.
―Y병원이 어디인가요? 앞으로 저 병원은 안 가는 게 좋겠네요.
―연국대병원?
―연국대병원 맞는 듯.
―환자의 목숨을 파리처럼 생각하는 버러지 같은 의사! 벌써부터 싹수가 보인다.
……악플을 받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마치 보이지 않는 돌멩이로 얻어맞는 듯한 기분이다.
반면, 나를 옹호하는 댓글들도 있었다.
―기사 내용이 좀 이상한데?
―현장에서 본 사람들 말이랑 좀 다르네요.
―저거 실제로 병원에서 하는 치료이긴 합니다. 일단 중립기어 놓고 지켜봅시다.
―환자가 살면 영웅 되는 거고 죽으면 역적 되는 거 아님?
―그건 맞지ㅋㅋㅋ
여론이 팽팽하다.
뜨거운 감자라고 해야 할까.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중원이 형이 혀를 차며 말한다.
"이거 어떻게 수습해야 하냐. 분명히 신승우 교수님 귀에도 들어갔을 텐데……."
신승우 교수.
응급의학과 과장.
권위적이고 엄격한 성격이다.
물론 첫날 인사할 때 빼고는 말을 섞어 본 적 없지만, 쉽지 않은 성격이라고 알고 있다.
"아무튼 오늘 하루는 눈치껏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교수님이 이런 대외적인 이미지 신경 많이 쓰시는 타입이라……."
저벅, 저벅―
그때 중원이 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회의실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