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6화 (26/241)

#26 강남역(5)

"의사?"

"의사래, 저 사람!"

의사라는 한마디에, 마치 홍해처럼 인파가 갈라진다.

타닥!

그렇게 사고 현장 한가운데로 들어왔지만, 막상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이는 것이 느껴진다.

쿵쾅쿵쾅―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응급실에서 심정지 환자를 볼 때보다 더 강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이 느껴졌다.

‘배운 대로 하자, 침착해!’

나는 병원에서 교육을 받았던 걸 떠올려 보았다.

일단은 신고가 먼저다.

"거기, 파란 옷 입으신 분! 119에 신고 좀 부탁드립니다!"

"예…… 예!"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남자가 정신을 차린 듯 구조대에 전화를 건다.

이럴 때는 불특정 다수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한 명을 지목하는 것이 빠른 신고에 도움이 된다.

"환자 수는 총 9명이고 중환자도 포함입니다!"

내 말에, 119에 전화를 걸던 남자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다.

자, 이제 뭘 해야 하지?

원칙대로 가자.

‘119는 불렀고, 그다음은 ABC!’

A― Airway, 기도가 잘 열려 있는지.

B― Breathing, 숨을 잘 쉬는지.

C― Circulation, 심장이 잘 뛰고 몸에서 피가 잘 돌고 있는지.

응급 환자를 평가할 수 있는 빠르고 즉각적인 방법이다.

나는 주위에 외쳤다.

"부상자들 가까이 서 계신 분들이 좀 도와주세요! 만약 숨을 쉬지 않거나 힘들어하는 환자가 있으면 바로 저한테 알려 주셔야 합니다!"

곧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몇 명의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부상자들을 살핀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누구나 돕고 싶어 한다.

다만, 방법을 모를 뿐이다.

내가 의사라는 것을 밝히자,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내 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1개월간 여봉철 선생에게 배운 리더십이다.

물론 응급실에서 배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트리아지(triage).’

응급 환자 분류.

현실적으로 모든 환자들을 케어할 수 없으니 냉철하게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그때 뇌리를 스쳐 가는 ‘두 단어’ 가 있었다.

[과다출혈]

[심낭압전]

‘그래…… 다른 환자들은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위중한 상태까지 가지 않아. 이 두 환자를 먼저 찾아야 한다!’ 1초가 중요한 이 상황에서, 내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단 과다출혈 환자부터 찾자. 빨리 지혈을 해 줘야 돼!’

나는 가장 먼저 의식을 잃고 널브러져 있는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50대로 보이는 여성분이었다.

"아주머니, 정신이 드세요?"

"으…… 총각. 이게 무슨 일이야."

다행히 아주머니는 놀라서 쓰러진 것처럼 보였고, 뒤로 넘어지면서 팔꿈치와 손바닥에 찰과상만을 입었다.

‘스스로 눈을 뜨고 말을 하는 50대 아주머니…… 이 환자는 GCS score(의식 평가 점수)는 낮지 않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좀 더 살펴보았지만, 몸에 큰 출혈 부위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아주머니는 뉴스에서 말했던 <그 환자>가 아니야!’

나는 냉정하게 다음 환자로 눈을 돌렸다.

철 구조물에 다리가 깔려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남자!

주위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철 구조물을 옮기려 하고 있었다.

타닥―

나는 그 남자 환자를 향해 뛰어갔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통째로 떨어진 철제 구조물이 환자 오른쪽 정강이를 짓누르고 있다.

"으아악…… 내 다리."

30대 직장인으로 보이는 환자가 고통에 울부짖는다.

"제가 보이시나요?"

"다리……."

남자는 의식은 있어 보였으나, 고통에 말을 잇지 못하였다.

철제 구조물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하나, 둘, 셋!"

"아아악……!"

여러 명의 사람이 모여 철제 구조물을 들어 옮기려 시도했으나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도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려 하는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비켜 주실래요?"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근욱몬 등장이다.

지금 이 순간, 천군만마보다 든든한 지원군이다.

"선한아, 옆으로 좀만 가 봐라."

처억!

어느새 달려온 근욱이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자 다시 한번 해 볼게요. 하나, 둘, 셋! 우랴압!"

번쩍!

근욱이의 팔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오오―

주변에서 탄성이 울려 퍼진다.

근욱이의 헬스 사랑이 이렇게 빛을 보게 될 줄이야!

그렇게 철제 구조물을 옆으로 치우자, 환자의 환부가 노출되었다.

꿀럭꿀럭―

무릎 아래가 깊게 파여 선홍색 피가 올라오고 있다.

과다출혈!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 환자가 <그 환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을.

"히익……."

"피 좀 봐……!"

길바닥에 퍼져 나가는 피 웅덩이를 보고, 사람들이 기겁하며 물러난다.

나와 근욱이는 침착하게 환부를 들여다보았다.

인턴 2개월 차 풋내기인 우리는 아직 이 정도로 많은 출혈을 본 적이 없었다.

"어디 동맥 끊어진 거 아니고는 이렇게 피가 심하게 날 리 없지 않아?"

"무릎 약간 아래니까 popliteral artery(슬와동맥)? tibial artery(경골동맥)의 주행경로이려나?"

"bone bleeding(뼈에서 나는 출혈)도 상당한 것 같아."

복합적인 상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환자의 다리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왈칵왈칵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지혈을 해야 되지…….’

고민하던 찰나, 근욱이가 나를 쳐다보았다.

"전쟁 동영상 같은 거 보면, 지뢰 밟고 나서 지혈하려고 proximal(근위부, 몸 중심 쪽)에서 묶어 버리던데."

"지혈대로 묶는 것처럼 하자는 거지?"

끄덕.

우리는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행동에 옮겼다.

곧 근욱이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환자의 무릎 위를 힘껏 묶기 시작했다.

꽈악!

잠시 후, 출혈량이 확연히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내가 본 근욱이의 모습 중에 가장 멋진 모습이었다.

오늘 새로 산 근욱이의 옷에 피가 덕지덕지 묻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주저하지 않았다.

"근욱아, 이 사람 3층에서 떨어졌으니까 몸 안에 또 다른 출혈 부위가 있을지 몰라. 혹시 모르니까 펠빅 바인더(pelvic binder)도 하자."

"펠빅 바인더?"

응급실에서의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다.

나는 내 겉옷을 벗어 주며 근욱이에게 말했다.

"자, 이걸로 골반 부위도 강하게 조여 줘! 나는 다른 환자들도 한번 보러 갈게."

"알았어!"

근욱이는 고개를 끄덕인 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골반 압박을 시작했다.

타닥!

나는 재빨리 다음 환자를 찾아 움직였다.

<과다출혈> 환자는 찾았다고 치면, 그다음 <심낭압전> 환자는 어디 있을까?

쉽지 않다.

과다출혈은 눈으로 보고 알 수 있었지만, 이건 너무 어렵다!

<심낭압전>.

쉽게 말해 심장 근처에 피가 고이는 것을 뜻한다.

우리 몸의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심낭’이라는 막이 있는데, 만약 여기에 혈액이 고이게 된다면 심장이 압박을 받게 된다.

심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니,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

‘젠장, 이건 너무 어렵잖아!’

초음파 장비도 없는 강남 한복판에서 대체 어떻게 심낭압전 환자를 알아낼 수 있을까?

* * *

한편, 같은 시각―

119 안전센터.

신고가 접수된 지 30초도 채 되지 않아 스타렉스 구급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MDT 단말기에서 안내 음성이 들리자마자, 사고 지점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곧 다른 센터에서도 구급차가 출발했다는 무전이 들려온다.

왜애애앵―

운전대원은 액셀을 밟으며 사이렌과 함께 스피커로 음성을 틀었다.

<긴급 출동 중입니다. 좌우로 피양해 주십시오. 긴급 출동 중입니다. 좌우로 피양해 주십시오.> ‘피양’.

피할 피(避), 양보할 양(讓).

대원 스스로도 매번 느끼는 거지만, 왜 굳이 이렇게 어려운 단어를 써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시민들이 더 알아듣기 쉬운 단어를 쓰면 좋을 텐데!

곧 몇몇 차량들이 1차로를 비켜 주는 모습들이 보이지만, 주로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주말 저녁의 강남역.

사거리로 접근할수록 교통체증이 심각해지고, 강남대로는 모든 차로가 가득 차 있다.

빵빵―

도로가 혼잡하다.

끼어드는 택시들, 골목에서 나오려 하는 승용차들, 대로변에 임시 정차된 트럭들, 덩치 큰 광역버스들…….

온갖 차량들로 인해 완전히 사거리가 틀어막혀 있는 모습이다.

"젠장!"

운전대원이 욕설을 내뱉었다.

구급차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사고 지점까지 2km 남짓밖에 되지 않는데, 그 거리가 마치 천 리 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애앵―

<7245 차량, 오른쪽으로 피양해 주세요!>

구급대원은 마이크를 한 손에 쥐고 다급히 외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응급 환자의 수명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을 터였다.

* * *

"구급차 5분 뒤 도착이라고 합니다!"

119에 전화했던 남자가 나에게 달려와 말했다.

5분!

그렇다면 과다출혈 환자는 무사하지 않을까?

최대한 빨리 지혈을 했으니 병원으로 옮겨지면 괜찮아질 수 있다.

하지만 심낭압전 환자는 다르다.

빨리 이 환자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구급대원들이 도착한다 해도 미래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아…… 왜 이런 어려운 문제를 나한테 주시는 겁니까?!’

나는 의대생 시절 배웠던 내용들을 떠올려 보았다.

‘심낭압전이 심해지면 의식이 떨어질 거고…… 또 그 밖에 뭐가 있었지? 의식이 떨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텐데…….’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했다.

젠장, 제발 좀 떠올라라!

그리고 그때.

번뜩하고, 힌트가 떠올랐다.

‘벡스 트라이어드(Beck’s triad)!’

심낭압전을 알 수 있는 세 가지 의학적 신호를 일컫는다.

고안한 의사의 이름을 따서 저렇게 부른다.

의대생 시절, 노트에 삼각형을 그려 가며 외웠던 기억이 난다.

1. 저혈압

2. 경정맥 확대

3. 감소된 심음

청진기가 없으니 3번은 어렵지만, 지금 이 강남역 한복판에서도 1번과 2번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그래. 해 보자!’

타닥!

나는 환자들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서 저혈압으로 의식이 떨어져 있는지 확인하고, 손목의 동맥을 느껴 보았다.

"으으……."

3층에서 떨어진 20대 청년은 오른쪽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

갈비뼈 몇 개가 부러지고 폐에 멍이 들었을 것 같았지만, 손목 동맥은 강하게 뛰고 있었고 경정맥은 부풀어 있지 않다.

‘미안해, 도와주지 못해서. 당신은 <그 환자>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다음 환자를 향한다.

유리 파편에 몸 여러 곳이 찔린 채 널브러져 앉아 있는 아저씨였다.

내가 손목을 잡자, 아저씨가 의아한 듯 묻는다.

"뭐야…… 맥진하는 거야? 한의사 양반인가?"

"아니요, 그건 아니구요. 어지럽지는 않으세요?"

나는 한의사처럼 맥으로 오장육부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손목에 있는 동맥이 뛰는 강도를 통해서 혈압이 현저하게 낮은 환자만을 분별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환자도 아니고…….’

그렇게 한 명씩 체크하고 있을 때.

삐이오오―

저 멀리서 앰뷸런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속도가 늦다.

‘뉴스대로라면 차가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니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더 걸릴 거야.’

나는 다음 환자에게 뛰어갔다.

‘이대로 가만히 흐름을 따라가면 여기서 죽는 환자가 나온다! 찾아서 뭔가를 해 줘야 해!’

마음이 점점 더 다급해진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살펴보던 중.

누군가 내 손을 덥석 붙잡는다.

"저기, 선생님!"

"……?"

"의…… 의사라고 하셨죠? 제 친구 좀 빨리 봐주시면 안 돼요?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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