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강남역(4)
과다출혈.
심낭압전.
사망.
그런 단어들이 아직도 머리에서 빙글빙글 맴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오랜만에 마셨더니 술기운이 좀 올라서요."
일단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자 연우 씨와 민아 씨가 농담을 하며 거든다.
"선한 씨 보기보다 술 약하시네."
"아니면 진짜로 우리 욕하고 있다가 찔려서 그러는 거 아녜요?"
그러자 중원이 형과 근욱이가 대신 대답한다.
"어휴, 욕하긴요."
"사실 저희끼리 누가 마음에 드는지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야 인마, 그런 걸 너무 솔직하게 말하면 어떡해!"
두 남자의 만담에, 여자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린다.
근욱이의 솔직한 태도가 재미있게 느껴진 모양이다.
"그래서, 누가 누구를 마음에 들어 하는데요?"
"그건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고. 2차 가실까요?"
"와, 괜히 사람 궁금하게 만드네?"
"이러면 안 갈 수가 없잖아!"
즐거운 대화들이 이어진다.
한편, 나는 슬쩍 폰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8시 30분―
분명 뉴스에서는 사고가 일어난 시각이 9시경이라고 했다.
즉 사고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30분 후라는 뜻이다.
젠장, 너무 촉박하다!
"그럼 일어날까요?"
"가시죠!"
"아, 저는……."
나는 뭐라 말하려다 문득 입을 다물었다.
……잠깐.
어차피 가려고 해 봤자, 사고 현장이 어디인지도 모르잖아?
게다가 나는 고작 2개월 차 인턴일 뿐이다.
혼자 사고현장에 간다 한들 뭘 할 수 있을까?
고작해야 학생 때 모형 마네킹에 해 봤던 응급처치? CPR(심폐소생술)?
과다출혈이나 심낭압전은, 나 같은 인턴 나부랭이 혼자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더군다나 의료시설이 아무것도 없는 강남역 한복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래, 냉정하게 생각하자. 이건 내가 손을 댄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미래야.’
나는 애써 울렁거리는 마음을 잡았다.
앞으로 모든 미래에 개입하려 한다면 몸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 * *
우리는 거리로 나섰다.
둥, 둥―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 그리고 붉고 노란 네온사인 빛으로 거리가 가득하다.
"혹시 저희가 잘 아는 와인 바로 가도 될까요? 택시 타고 5분이면 가는 곳인데."
웬일인지 여자들 쪽에서 먼저 장소를 제안했다.
곧 우리는 택시를 나눠 탔다.
중원/근욱/민아/연우가 자연스럽게 택시에 먼저 올라탔다.
곧 네 명이 먼저 출발하고, 수진 씨와 나만 남게 되었다.
"와인 바 위치가 어디라고 했죠?"
나는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를 향해 손을 들었다.
석연찮은 기분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빨리 강남역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옷자락이 살짝 당겨진다.
고개를 돌아보니, 수진 씨가 내 소매를 슬며시 붙잡고 있다.
"저희, 따로 빠질까요?"
"예?"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수진 씨가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인가?
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친구분들이랑 짜고 일부러 둘이 남은 거예요?"
"네."
"왜요?"
"선한 씨 마음에 들어서."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다.
와…….
이건 예상 못 했다.
어쩐지 네 명이 먼저 출발할 때부터 친구들끼리 묘하게 눈치를 주고받는 것 같더라니.
어쩌지?
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수진 씨. 죄송한데, 저 사실 인원수 맞추려고 나온 거예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연애를 할 생각이 없어서……."
"애인 있어요?"
"그런 건 아니고."
"게이예요?"
"아뇨!"
"그럼 됐네, 뭘."
그렇게 말하며, 수진 씨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온다.
"오늘 재밌게 놀려고 나왔다면서요? 나도 놀려고 나온 거예요."
스윽―
얼굴이 가깝다.
거의 서로의 옷자락이 맞닿고 숨결이 느껴질 정도다.
아찔한 향에 코끝이 간질간질하다.
"저희 어디 가서 한 잔 더 할까요?"
"……."
"선한 씨가 가고 싶은 데로 갈게요."
쿵, 쿵.
가슴이 뛴다.
순간적으로 유혹에 휩쓸릴 뻔했다.
"선한 씨,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요. 오늘 그냥 집에 가면 후회할 것 같지 않아요?"
수진 씨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데 ‘후회’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다.
30분 후―
가까운 곳에서 사람이 죽는 사고가 일어난다.
그리고 오직, 나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만약 이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 외면한다면…… 과연 나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두 갈래 길 위에 서 있다.
한쪽은 안락의 세계.
다른 한쪽은 고난의 세계다.
‘젠장!’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길?
답은 명확했다.
나는 의사다.
그리고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도울 수 있는 환자가 가까운 거리에 생길 예정이다.
"수진 씨. 미안해요."
"예?"
"정말 급한 일이 생겨서."
타닥!
나는 등을 돌려 강남역 거리로 나섰다.
수진 씨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고가 일어날 만한 장소를 찾아보자!’
늦은 시각이지만, 번화가엔 아직도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아니, 오히려 이제부터 밤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까?
토요일 밤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계속해서 역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나는 정신없이 홀로 인파를 헤치며 나아갔다.
생각해 보자.
무언가 단서가 있을 것이다.
강남역에 널린 게 술집이라지만, 분명 꿈속에 힌트가 하나라도…….
"……!"
그 순간, 머릿속에서 영상 속 장면이 떠올랐다.
사고 현장 맞은편에, 분명 익숙한 실루엣이 하나 있었다!
비록 뉴스 화면에는 흐릿하게 블러(blur)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초록색 간판은 대충 봐도 어떤 브랜드인지 명확했다.
‘스타커피!’
즉, 사고는 스타커피 근처에서 일어난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지도 앱을 검색하다가, 곧 머리를 쥐어뜯으며 욕을 내뱉었다.
"젠장!"
화면 속에는 나를 비웃듯 십여 개의 마크가 찍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강남역에는 스타커피가 너무 많다.
검색 결과만 15개가 넘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커피를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나는 아무도 듣지 못할 외침을 삼킨 뒤, 이를 악물고 가까운 매장으로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스타커피 근처, 3층 테라스가 있는 술집.
반드시 찾아야 한다!
* * *
같은 시각.
멀지 않은 곳의 한 술집에서 심상치 않은 대화가 오가고 있다.
"매니저님, 여기 아직 수리 안 됐어요?"
"뭐?"
"테라스 흔들린다고 며칠 전부터 얘기했잖아요."
"에헤이…… 점장님한테 얘기하는 거 또 깜빡했네. 일단 사람들 못 나가게 창문 닫아 놔."
"아 씨, 청소할 때마다 불안해 죽겠네."
알바생이 투덜대며 폴딩도어형 창문을 닫는다.
드르륵―
곧 3층 오픈형 테라스의 문이 닫힌다.
"손님들 못 나가게 뭐 붙여 놓기라도 해야 되는 거 아녜요? 가끔 담배 피우러 여기 나가는 사람들 많은데."
"야 됐어. 의자로 대충 막아 놔. 지금 15번 테이블 토하고 난리 났다!"
"어휴, 오늘은 벌써부터 시작이네."
알바의 얼굴이 구겨진다.
하지만 곧 시급 만 원의 노동량을 채우기 위해 걸레를 들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쏟아지는 손님들.
강남역 일대의 유동 인구는 하루 100만 명이 넘고, 오늘 같은 토요일에는 더욱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
삐걱―
그러는 동안에도 테라스의 난간이 불안한 소리를 울려 대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 * *
타다닥!
허억, 허억!
내 발걸음이 점점 다급해진다.
하지만 인파로 가득 찬 강남역 번화가를 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작 세 군데를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체력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젠장. 여기도 아니고…….’
나는 턱 밑으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남은 시간 12분.
벌써 황금 같은 시간의 반이 넘게 날아가 버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무작정 달리기만 하다가는 사고현장을 찾아내기도 전에 탈진해 버릴 것이다.
순간, 달콤한 유혹이 스친다.
‘……포기할까?’
포기하면 편해질 것 같다.
남은 시간 동안 모든 곳을 돌아다니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때, 문득 어렸을 때 보았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집도의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당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우상, 백의신.
그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니 마음이 순식간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모든 사람의 아나토미(anatomy, 해부학적 구조)는 같지 않고 예상치 못한 상황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죠. 아무리 위급한 상황일지라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 그것이 서전(surgeon, 수술의)의 기본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우."
나는 걸음을 멈춘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생각해 보자.
만약 백의신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나처럼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작정 달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급할수록 계획을 세워야 한다.
‘구급차가 들어가기 힘들어서 구조가 늦어졌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일단 큰길은 제외.
만약 대로변이었으면 구급차가 진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을 테니까.
‘차가 진입하기 힘들었다고 한다면, 좁은 골목 안쪽이었을 거야.’
나는 지도 앱을 유심히 살펴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다면 목적지는 대략 세 군데로 좁혀진다.
셋 중에 하나를 찍어야 되는 상황!
나는 예전부터 찍기에는 재능이 없었다.
시험문제를 풀 때도, 하나를 찍으면 무조건 틀리기 일쑤였다.
만약 이번에도 틀린다면, 사망자를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영영 사라지고 마는데…….
‘아, 잠깐.’
생각해 보니 지도 앱에는 ‘거리 뷰’라는 기능이 있다.
이런 멍청한 놈!
왜 진작 떠올리지 못했지?
나는 재빨리 사진으로 나와 있는 거리 뷰를 조회했다.
‘여기다!’
곧 뉴스에서 본 화면과 흡사한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여기라면 10분 내에 도착할 수 있다!
나는 비로소 확신을 가진 채 달리기 시작했다.
―따르르르!
정신없이 달리며 걸려 온 전화를 받으니, 황당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인마, 갑자기 그렇게 도망가 버리면 어떡해?>
근욱이다.
녀석이 따지듯 말한다.
<너 수진 씨 바람맞혔다며? 그 말 듣고 분위기 싸해져서 우리까지 다 쫑 났어 인마! 어떻게 된 일이야?>
"근욱아, 지금……."
<아무리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여자를 그렇게 짐짝처럼 내팽개치고 도망치면 어떡하냐? 너답지 않게…….>
"야, 미안한데 길게 말할 시간이 없다. 나 좀 도와줘라!"
<왜, 뭔데?>
"여기……."
콰앙!
그때, 앞쪽에서 굉음이 들린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십여 미터 앞의 건물에서 3층 테라스가 뚝 떨어져 무너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너무 비일상적인 광경이라, 순간 컴퓨터그래픽을 보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와장창!
"꺄아악!"
곧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강남 거리 한복판에 소란이 일어난다.
젠장, 생각보다 빨리 사고가 발생했다!
나는 황급히 말했다.
"스타커피 강남 DW타워점 맞은편! CPR 방송 울렸다 생각하고 빨리 여기로 와 줘!"
타악!
나는 전화를 끊고 인파를 헤치며 현장으로 향했다.
"으으으……."
"아악……."
끔찍한 광경이다.
철제 난간과 유리 막이 그대로 뚝 떨어져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이마의 상처에서 흐른 피가 얼굴을 덮고 턱을 따라서 뚝뚝 흐르고 있는 사람…….
부러진 난간에 깔린 다리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람…….
부러진 난간 파편이 사방으로 날아가면서 여기저기 찰과상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널브러진 채 의식을 잃고 있는 사람도 있다.
"뭐, 뭐야?"
"건물에서 떨어졌어!"
"어떡해!"
주변 행인들은 놀라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고, 그중 몇몇은 스마트폰을 꺼내서 동영상 촬영을 시작하고 있다.
"다들 비키세요!"
나는 큰 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이 와중에 동영상을 찍다가 밀쳐진 사람이 당황하며 말한다.
"뭐, 뭐야, 당신 뭔데?"
"의사입니다!"
크게 외치며, 나는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