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4화 (24/241)
  • #24 강남역(3)

    첫 대화는 언제나 조금 어색하다.

    하지만 이럴 때는 내 이름이 치트키다.

    "예?"

    "이름이 신선한이에요?"

    "대박!"

    술집에 마주 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통성명이 시작되었다.

    독특한 이름을 지어 준 아버지에게 오늘만큼은 감사해야 하나?

    내친김에 우리 누나 이름들까지 알려 줬더니 웃음이 더욱 커진다.

    "죄송해요. 너무 웃었나?"

    "죄송하긴요. 저도 제 이름이 웃겨요."

    내 말에 여자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웃음이 번진다.

    일단 시작은 괜찮은데…….

    별것 아닌 대화에도 이 정도 반응이라면, 일단 우리의 첫인상이 좋았다는 소리다.

    이 기세를 놓치지 않고 중원이 형이 볼을 이어받는다.

    "자, 통성명 끝났으면 술 한잔하고 시작하실까요?"

    "벌써요?"

    "아까부터 연우 씨가 소주잔만 애타게 붙잡고 있길래."

    "헐, 나 이거 왜 잡고 있지."

    여자 2호가 자신의 손을 황당한 듯 내려다보고, 다시 한번 웃음이 번진다.

    생각해 보니 중원이 형은 은근 말발이 좋다.

    살짝 까진 머리와, 술만 들어가면 나오는 능수능란한 티키타카 말발…….

    그래서 연국대 동기들 사이에서는 <술자리의 이니에스타>라고 불려 왔다고 한다.

    오늘 그 진가를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자, 반갑습니다!"

    "짠!"

    술잔이 경쾌하게 테이블 위에서 부딪친다.

    곧 서로에 대한 궁금증이 담긴 질문들이 활발히 오간다.

    "의사분들이시면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에이, 너무 일찍 물어보셨다. 저희는 아직 인턴이라 전공이 없어요."

    "아, 그렇구나. 사실 저희도 인턴이에요."

    그녀들의 말이 이어진다.

    입사 후 2년간 인턴 생활이 이어지는데, 첫 비행 이후 6개월 이내에 퇴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환상을 가지고 직업을 선택했지만, 막상 생각보다 일이 고되고 힘든 탓이다.

    "어휴, 듣고 보니 보통 일이 아니네요. 비행기 탈 때는 승무원분들이 그렇게 고생하는 줄 몰랐는데."

    중원이 형이 적당한 리액션으로 맞장구를 친다.

    그때, 근욱이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저…… 이거 진짜 궁금했는데, 승무원들은 비행기에서 어디서 자요?"

    뜬금없는 질문에, 여자들이 뻘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약간 서툴러 보이는 근욱이의 모습이 귀엽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게 그렇게 진지하게 궁금할 일이에요?"

    "어릴 때부터 비행기 탈 때마다 진짜 궁금했거든요."

    "저희 벙커에서 자요."

    "벙커가 있어요?"

    "네. 장거리 때 교대로 잠깐씩 가는데, 당연히 편하게 쉬지는 못해요. 복장이랑 머리 스프레이 한 거 그대로 유지하고, 선배들 눈치도 봐야 되구요."

    "아아."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대화를 나눠 보니 의외로 우리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양쪽 모두 인턴이라는 점.

    조직문화가 강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일이 힘들다는 점.

    비록 서로 다른 필드에서 일하고 있지만, 사회 초년생들끼리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순간이다.

    물론 그녀들도 우리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진짜로 의사들은 매일 밤새우고 막 그래요?"

    "아 그쵸, 응급실 인턴 돌 때는 24시간을 쉬지 않고 일해요. 24시간 근무 끝나 갈 때는 거의 뭐 좀비 상태가 되죠. 크…… 그래도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쩌겠습니까."

    "와, 진짜 멋있으시다……!"

    여자 1호가 중원이 형의 말에 감탄을 터트리고 있을 때, 근욱이와 나는 웃음을 꾹 참았다.

    응급실 근무 중에 틈만 나면 초음파실로 자러 가던 <뺀질이> 중원이 형…….

    지금 이 순간, 그는 병원에서 제일 힘들게 일하는 숭고한 의느님으로 포장되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일하면 엄청 다양한 일들이 있겠네요?"

    "그럼요, 어제만 해도……."

    중원이 형이 병원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썰을, 약간의 과장을 섞어 가며 풀기 시작한다.

    여자들은 넋을 잃고 중원이 형의 입만 쳐다보고 있다.

    물론 이런 대화가 너무 길어지면 지루해질 수 있으니, 나는 적당한 시점에 끼어들었다.

    "일 얘기는 나중에 하고 한 잔씩 더 해요."

    "그럴까요?"

    "저희 오늘 다 같이 재밌게 놀려고 나온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잔을 들어 올린다.

    "그래요, 반갑습니다!"

    "짠!"

    호감 섞인 시선들이 오가며 좋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술기운이 올라오면서 대화가 많아지고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오늘 밤, 왠지 분위기가 좋다.

    * * *

    미팅 1시간 반 경과.

    벌써 술이 여섯 병째 비워지고 있다.

    모두들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오늘 이 자리에서 남김없이 풀고 갈 기세다.

    "하얀 옷 입은 사람 접어!"

    "남자 접어!"

    "횟집 아들 접어!"

    다들 신나게 외친다.

    일명 <손병호 게임>.

    다섯 개의 손가락이 모두 접히는 사람이 술을 마시게 되는 게임이다.

    모두 돌아가며 한마디 할 때마다 손가락이 접힌다.

    이미 초면의 어색함은 사라진 지 오래고, 즐거운 텐션이 유지되고 있다.

    그때 여자 1호가 도발하듯 중원이 형에게 외친다.

    "여기서 나이 제일 많은 사람 접어!"

    "와, 너무하는구만!"

    중원이 형이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복수심을 활활 불태우며 외친다.

    "나보다 머리 작은 사람 접어!"

    "자기 빼고 다 접으란 소리잖아요, 그건!"

    중원이 형의 말에 여자들이 일제히 폭소하며 쓰러진다.

    서로 머리둘레를 재네 마네 한동안 실랑이가 이어졌다.

    분위기 최고다.

    다들 즐겁게 웃고 떠들기 바쁜 걸 보니, 미팅은 이미 반쯤 성공이다.

    곧 내 차례가 왔다.

    이쯤에서 일부러 분위기를 띄워 주기로 했다.

    "나는 이 중에 호감 가는 사람이 있다. 접어."

    "오……."

    다들 감탄을 내뱉었다.

    시기적절한 멘트에 술자리가 훅 달아오른다.

    모두 눈치껏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는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더니, 여자 3호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생긋―

    여자 3호가 눈을 마주치며 손가락을 접는다.

    ……아무래도 오늘 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잠시 후 여자들이 화장실을 간 사이.

    근욱이와 중원이 형이 헤벌쭉 웃으며 말한다.

    "야, 대박이다."

    "저도 이 정도로 재밌을 줄 몰랐어요."

    "그냥 예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다들 엄청 적극적인데?"

    아마 여자들도 우리 얘기를 실컷 하고 있겠지.

    치열했던 전초전이 끝났으니 이제 슬슬 작전을 세우는 타이밍인 것이다.

    "나는 연우 씨가 좋던데요. 단아한 스타일이라서."

    "나는 민아 씨가 좋더라. 털털한 게 딱 내 스타일이야."

    그렇게 서로 마음에 드는 상대를 지목한다.

    그러다 갑자기 근욱이가 불쑥 묻는다.

    "그나저나 신선한, 너는 진짜 연애 생각 없냐?"

    "그러게, 특히 수진 씨는 아까부터 너만 계속 쳐다보던데?"

    수진.

    여자 3호.

    아까부터 과감하게 눈빛을 보내던 장본인이다.

    "한번 잘해 보지 그러냐?"

    "그래 인마 신선한! 너 오늘 같은 기회 놓치면 고자 인정이다!"

    나는 픽 웃었다.

    고자라니?

    무슨 섭섭한 소리!

    물론 나도 연애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턴 기간 동안은 한눈팔지 않고 일에만 집중하고 싶을 뿐이다.

    그저 오늘 하루 재밌게 노는 것으로 충분하다.

    "난 생각 없어. 적당히 분위기만 맞추고 도와줄 테니까, 두 분이서 열심히 잘해 보세요."

    "진짜냐?"

    "하여간 신선한, 고집 하나는 진짜 알아줘야 돼."

    두 사람은 혀를 쯧쯧 찼다.

    하지만 그들은 내 고집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더 이상 권유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우리 슬슬 2차 가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몇 시지?"

    "8시 반이니까 아직 여유 있네요."

    "자리 옮기자!"

    "알아본 곳 있어요?"

    "찾아보면 되지. 강남에 발에 차이도록 널린 게 술집인데……."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물 잔을 채웠다.

    그 순간.

    갑자기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강남…….

    술집…….

    중원이 형이 말했던 단어들이 묘하게 신경을 거스른다.

    시간이 조금 느릿하게 흘러가는 듯한 기분이다.

    이런 기분을 언젠가 느껴 본 적 있었던 것 같은데…….

    파앗―

    그때, 마치 극장 커튼이 닫히듯 시야가 캄캄해졌다.

    * * *

    구불텅―

    시야가 휘어진다.

    마치 시간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졌다가 배배 꼬이는 것처럼 현실감각이 사라진다.

    ‘뭐야. 이 타이밍에?’

    당황스럽다.

    미래예지가 무작위로 시작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미팅 도중에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도대체 이번에는 무슨 일이길래…….

    치지직―

    곧 눈앞에 거친 영상이 지나간다.

    <4월 26일 YTN 11 뉴스, 오늘의 사건 사고 소식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성경 기자, 강남역에서 사고가 있었다고요?>

    <네. 영상부터 보시겠습니다. 저녁 9시경, 강남역 인근의 한 선술집. 취객들이 흔들리는 테라스에 기대어 있습니다.>

    파앗―

    눈앞에 YTN 뉴스 화면이 나타났다.

    4월 26일?

    오늘이잖아?!

    차량의 블랙박스에서 멀찍이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영상이 재생된다.

    3층 야외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서 있던 몇 명의 남자들이 보인다.

    와지끈!

    갑자기 위태롭던 철제 난간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면서 남자들이 허우적거리며 추락한다!

    <돌연 난간이 부서지며, 아래를 지나던 행인들까지 휘말려 큰 사고가 일어납니다. 이 과정에서 십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곧 화면은 리포터가 출동해 있는 사고 현장으로 연결된다.

    <응급실로 이송된 환자는 총 9명. 이 중 2명의 중환자가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한 명은 중태에 빠지고 한 명은 사망하였습니다.>

    사망?!

    보통 일이 아니다.

    강남역 한복판에서 사망 사고라니, 뉴스에 대대적으로 나올 만도 하다.

    그런데…… 혹시 장소가 이곳이라는 뜻인가?

    ‘아니. 여기가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있는 술집은 2층인 데다 테라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사고가 일어나는 곳은 분명 다른 술집일 것이다.

    <강남역 좁은 골목길의 불법주차 차량들로 구급차 접근이 힘들었다고 하던데요?>

    <네, 그렇습니다. 토요일 저녁의 많은 인파와 불법주차 차량들로 환자의 이송이 늦춰졌다고 합니다. 응급실 담당의의 인터뷰 들어 보시겠습니다.>

    곧 응급의학과 의사의 인터뷰가 시작된다.

    저건…… 연국대병원 의사 가운이잖아?

    하긴, 강남역에서 중환자가 발생했다면 우리 병원으로 이송될 확률이 높겠지.

    <한 명은 과다출혈로 현재 의식이 없으며, 한 명은 심낭압전으로 사망했습니다. 만약 응급조치가 빨리 행하여졌거나, 병원으로 이송이 빨랐다면…….>

    과다출혈.

    심낭압전.

    분명 중요한 키워드다!

    나는 머릿속에 두 개의 단어를 재빨리 입력한 뒤 계속해서 화면을 응시했다.

    만약 사고가 벌어질 장소가 어디인지도 알 수 있다면…….

    * * *

    "무슨 얘길 그렇게 재밌게 해요?"

    "저희 욕하고 있었던 거 아니죠?"

    여자들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치 어두운 극장 속에 있다가 갑자기 바깥으로 머리채를 붙잡혀 끌려 나온 듯한 기분이다.

    사고현장에 몰입하고 있다가 현실로 돌아오려 하니, 전환이 잘 안된다.

    ‘미치겠네. 갑자기 이런 미래가 보이다니……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젠장!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 수진 씨가 쓱 다가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묻는다.

    "선한 씨,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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