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3화 (23/241)
  • #23 강남역(2)

    곧 뉴스 화면에,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 나온다.

    ―우리 아들이 지금 다친 거 안 보여?! 당장 치료 안 해 주고 뭐 하는 거야?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알아?!

    ―당장 책임자 데려와!

    얼마 전, 응급실에서 난동을 부리고 간호사들을 밀치던 안하무인 부부다.

    <호룡식품 회장 부부, 응급실 갑질 파문>

    <고등학생 아들 음주 운전 후 대형사고, 부모는 ‘안하무인’>

    <대국민 사과 후에도 반응은 싸늘, 불매운동 이어져>

    알고 보니 그들은 유명한 식품회사를 경영하는 부부였던 모양이다.

    그때 중학생이 찍어 올린 영상의 조회수가 200만 건이 넘어가면서 일이 커졌다.

    불매운동으로 난리가 나며 주가가 곤두박질쳤다는 소식이다.

    "나 응급실에 있을 때 저 사람들 봤어."

    "진짜로?"

    "응."

    나는 사과를 반듯한 모양으로 자르며 말했다.

    "왜 자기 아들부터 치료해 주지 않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데? 내 동기는 뺨까지 맞을 뻔했어."

    "세상에."

    큰누나가 입을 가리며 놀라고, 둘째 누나가 혀를 쯧쯧 찬다.

    "아무리 자기 자식이 귀해도 그러면 안 되지."

    "그러게…… 우리 집에도 저기 건강식품 몇 개 있었는데 싹 다 버려야겠다."

    "쯧쯧. 부모가 저 모양이니 아들놈 인성도 망가진 것이여."

    가족들이 한마디씩 거들며 손가락질을 한다.

    전국적으로 욕을 먹고 있으니, 저 부부는 오래 살지 않을까?

    물론 욕먹는 걸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불매운동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앞으로 뼈저리게 깨닫게 되겠지.

    <국민 여러분들과 의료진들께 죄송할 따름…….>

    TV에서 갑질 부부가 굽신굽신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세상에 정의가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든다.

    아삭아삭.

    나는 그들의 대국민 사과 영상을 보며 사과를 씹었다.

    오늘따라 사과가 꿀맛이다.

    * * *

    오후 4시.

    한숨 푹 자고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멍하니 누워 있자, 둘째 누나가 핀잔을 준다.

    "넌 하루 종일 잠만 자다 가냐?"

    "누나도 24시간 근무 해 봐. 하루 종일 잠 안 자면 못 버틴다니까."

    "으이구. 모처럼 쉬는 날인데 운동이라도 좀 해. 의사가 몸 망가지면 누가 치료해 주냐?"

    퍼억.

    둘째 누나가 내 엉덩이를 발로 차고 지나간다.

    아파.

    "산책이라도 하고 올까."

    나는 누운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둘째 누나의 말이 맞다.

    앞으로 1년간 버텨야 하는데 건강관리 잘해야지.

    몸이 유일한 재산이니까.

    더군다나 오늘 같은 날,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활력이 점점 떨어질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전화가 온다.

    [발신자 : 근욱몬]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욱이가 이 시간에 웬일이지?

    혹시 내가 없는 동안 병원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야, 선한아. 큰일 났다. 나 좀 도와줘라!>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마치 지구 종말이라도 맞이한 듯한 기세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미팅 한 명 빵꾸 났다.>

    "미팅?"

    김이 팍 샌다.

    그게 오늘이었던가?

    예전에 근욱이가 언급했던, 항공 승무원들과의 3 대 3 미팅이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원래 이날을 대비하여 근욱이가 꾸렸던 3인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갑자기 과민성 대장증후군으로 폭풍 설사를 하며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난 또 무슨 큰일이라고."

    <큰일이지, 이 자식아! 이게 큰일이 아니면 뭐가 큰일이야? 내가 오늘만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아냐?>

    어휴, 귀찮아.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걍 둘이서 가."

    <어떻게 2 대 3 미팅을 하냐! 짝은 맞춰야지. 그렇다고 아무나 데려갈 수는 없고.>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 봤자 나는 안 가요."

    <젠장…… 그렇다면 이건 어때?>

    곧 근욱이는 비장한 목소리로 제안을 시작했다.

    <너 운동 배워 보고 싶다 했었지?>

    "응?"

    <만약 오늘 미팅 도와주면, 앞으로 인턴 1년간 네 퍼스널 트레이너가 돼 준다!>

    솔깃.

    나는 귀를 쫑긋했다.

    근욱몬의 1 대 1 트레이닝이라…….

    안 그래도 혼자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면서 한계를 느끼던 참이다.

    앞으로 건강을 위해서라면 나쁘지 않은 딜이다.

    게다가 근욱이는 거의 프로에 가까운 트레이너다.

    만약 의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헬스장을 차렸을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녀석이니까.

    "나쁘지 않네."

    <그치?>

    "못 이기는 척 받아 볼까?"

    <야, 솔직히 너 오늘 할 일도 없잖아! 우리가 오늘 같은 날 놀아 보지 언제 또 놀겠냐?>

    맞는 말이다.

    솔직히 재밌을 것 같긴 하다.

    두 달 동안 병원 일에만 푹 빠져 있었으니, 오랜만에 하루 정도는 놀아 보는 것도 좋겠지.

    "강남역 몇 시라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 * *

    토요일 저녁.

    강남역은 활기로 가득하다.

    한껏 차려입은 사람들이 바삐 지하상가 사이로 움직이고 있다.

    나는 지하철에서 내려 거울에 비친 모습을 슬쩍 살펴보았다.

    ……나쁘지 않은데?

    급한 대로 꾸민 것치고는 나름 괜찮다.

    오랜만에 집 앞에서 머리도 잘랐고, 니트와 슬랙스를 입었더니 깔끔한 모습이다.

    역시 가끔은 스스로를 꾸미는 것이 자존감에 도움이 되는군.

    <선한, 벌써 도착했어?>

    "어디야?"

    <금방 간다. 중원이 형도 거의 도착했대. 좀만 기다려!>

    "나보고는 일찍 오라며."

    <5분 뒤 도착!>

    근욱이의 들뜬 목소리가 스마트폰 너머로 들린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퍽퍽한 병원 생활에 시달리다가 오랜만에 찾아온 특별한 이벤트니까!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그러고 보니 미팅은 대학교 1학년 이후로 처음이다.

    너무 오랜만이라 감이 안 잡히는데…….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기도 해서 유머사이트에 들어갔다.

    ‘미팅’이라는 키워드로 몇 개의 게시물을 검색해 보았더니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미팅은 처음인데 너무 설레요, 혹시 준비할 게 있나요?]

    ―못생겼다고 욕먹을 준비

    ―혹시 모르니까 혼인신고서 준비 ㄱㄱ

    [직장인 초년생인데 미팅 가서 무슨 얘기 해야 하나요?]

    ―할 얘기 많죠

    ―정치 증권 대북정책 핵문제 종교 군대얘기 축구얘기 ―추천 멘트 : 반다이크 쩔지 않냐?

    ―ㅋㅋㅋ

    ―ㅋㅋㅋㅋㅋㅋ

    "진짜 도움 안 되네."

    나는 픽 웃었다.

    설마하니 이런 남자들만 가득한 사이트에서 제대로 된 조언을 구하는 사람은 없겠지?

    만약 여기 적혀 있는 대로만 한다면 틀림없이 그날 미팅은 망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선한아!"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남자 1호]

    오중원

    특 : 머리 까짐

    오늘 중원이 형의 외모는 평소와는 달리 단정하다.

    까진 이마를 헤어스타일로 적절히 커버했고, 피부도 뭔가 열심히 발랐는지 말끔하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형, 그 옷 뭡니까?"

    "어, 너무 과한가?"

    나는 황당한 눈빛으로 중원이 형을 위아래로 바라보았다.

    흰 셔츠까지는 좋다.

    하지만 문제는 흰 바지다.

    세상에.

    위아래 올백이다.

    앙드레김 선생님의 작고 이후 대한민국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는 바로 그 패션인 것이다.

    "왜 위아래 깔 맞춤을 했어요?"

    "어, 그게……."

    중원이 형이 멋쩍게 뺨을 긁적거렸다.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물어보니까, 의사인 걸 어필하기 위해서 하얀 옷을 입고 가라고 하더라."

    "예?"

    "그래서 코디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래서 인터넷에 조언을 구하면 안 된다!

    중원이 형은 누군가의 낚시에 당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절망하고 있는데.

    잠시 후, 아직 진정한 재난은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 다들 일찍 왔구나!"

    근욱이가 등장했다.

    [남자 2호]

    김근욱

    특 : 3대 운동 500kg

    "너는 옷이 또 왜……."

    위아래로 총체적 난국이다.

    일단 상의는 꽉 끼는 티셔츠를 입고 있다.

    헬스 중독자인 걸 과시라도 하려는 걸까?

    터질 듯한 P.major(대흉근)이 윤곽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하우 두 유두’ 하고 인사를 한다.

    게다가 청바지도 너무 작다.

    신체의 민망한 포인트들이 아주 전투적으로 튀어나와 있는 부담스러운 패션이다.

    "왜 그렇게 입었어?"

    "인터넷에서 헬스 커뮤니티에 물어보니까 남성미를 과시해 보라고 하던데?"

    "야이 씨……."

    나는 욕을 삼켰다.

    인터넷이 이렇게 무섭다!

    곧 근욱이와 중원이 형은 서로의 패션을 보며 빵 터졌다.

    "야, 너는 뭔 옷이 그러냐?"

    "크크, 그러는 형은요?"

    "근육 자랑하고 싶으면 아예 상의 탈의하고 오지 그랬냐?"

    "형은 의사 가운까지 입고 오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세트 효과 더 올라갔을 거 같은데."

    "그럴 걸 그랬나?"

    둘은 그렇게 서로를 보며 낄낄거렸다.

    못난 사람들끼리는 얼굴만 봐도 흥겹다더니…….

    나는 홀로 절망에 빠진 채 얼굴을 쓸었다.

    어떡하지?

    이대로라면 미팅은 멸망이다.

    ‘아니, 아직 늦지 않았어.’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인 것이다.

    [남자 3호]

    신선한

    특 : 그나마 제정신

    "우리 30분 남았나?"

    나는 손목시계를 힐끗 보았다.

    이 인간들에게는 당장 응급수술이 필요하다.

    "옷 사러 갑시다."

    다행히 강남역 거리에는 큰 의류 브랜드가 많다.

    급한 대로 매장에 진열되어 있는 옷을 구입해서 입혔다.

    그렇게 허겁지겁 코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10배쯤 나아 보인다.

    중원이 형은 나름 댄디한 훈남이 되었고, 근욱이는 체격이 좋은 듬직한 쾌남이 되었다.

    이 정도면 선방이다.

    "와, 훨씬 낫네."

    "역시 잘생긴 놈이 코디도 잘하는구만!"

    그들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잘하는 게 아니라 당신들이 최악인 거야!

    나는 단단히 일러두었다.

    "이럴 때는 잘 입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상하게 안 입는 게 중요한 겁니다."

    "오케이."

    "알겠습니다, 신선한 선생님."

    덤 앤 더머 2인조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전투에 나서기 직전의 병사들처럼 비장한 표정들이다.

    어쩌다 보니 내가 대장 역할을 맡게 된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얘네는 늦네?"

    "첫 만남에 15분씩이나 늦다니, 이거 도착하면 한 소리 해 줘야겠구만!"

    중원이 형과 근욱이가 그렇게 말하며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있을 때.

    누군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죄송해요. 저희가 좀 늦었죠?"

    "……!"

    방금 전까지 불만을 표하던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자들이 기대감에 차 있는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다.

    화려한 강남 거리 위에서도 눈에 확 띄는 외모들이다.

    바람에 실려 어렴풋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수 향이 남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여자 1호]

    [여자 2호]

    [여자 3호]

    특 : 다들 예쁨

    ……벌써 재밌네.

    나오길 잘했다.

    아직 말 한마디 섞어 보지 않았지만 느낌이 좋다.

    옆을 슬쩍 보니 두 명의 남자들은 입이 아주 귀에 걸릴 것 같은 표정이다.

    "어휴, 저희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근욱이가 헤벌쭉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조금 전에 여자들한테 한 소리 해야겠다고 으름장 놓던 분 어디 가셨습니까?

    "그럼 가실까요? 저희가 분위기 좋은 곳으로 미리 알아 놨습니다!"

    중원이 형이 질세라 나섰다.

    병원에 있을 때는 다 죽어 가던 양반이 갓 잡은 생선처럼 활기가 넘친다.

    잠시 후.

    술집으로 향하는 길.

    근욱이가 들뜬 표정으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야, 선한아…… 나 말주변 없으니까 네가 분위기 좀 만들어 줘! 알았지?"

    "알았으니까 진정해."

    기왕 여기까지 온 이상 나도 재밌게 놀 생각이다.

    그동안 퍽퍽하게 살았으니, 오늘만큼은 병원 일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왜 느낌이 싸하지?’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오늘 저녁, 강남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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