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2화 (22/241)
  • #22 트리아지(7)

    조진기.

    그는 선배들 비위 맞추기의 달인이다.

    명문고와 연국대 출신인 그에게, 선배들과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동문들이 가득한 연국대병원이니, 당연히 인턴 생활도 탄탄대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조진기는 불안함에 몸을 떨고 있다.

    응급실 옆 비상계단.

    아까부터 자신을 따로 불러 놓고 아무 말 없이 노려보고 있는 여봉철 때문이다.

    분위기가 왠지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다.

    조진기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무슨 일이신지……."

    "조진기."

    "예?"

    "니가 잘못한 걸 말해 봐."

    여봉철이 스산한 기운을 뿜으며 말했다.

    응급실에서의 실수를 다시 한번 혼내려는 것일까?

    ‘제기랄, 거 더럽게 뭐라고 하네. 실수 한 번 가지고…….’

    속으로는 불평불만이 가득했지만, 조진기는 최대한 뉘우치는 표정을 지어내며 말했다.

    "TA 환자들 들이닥치면서 너무 정신없어서 제가 그만 엑스레이 확인을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것뿐이야?"

    "예?"

    "다 들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후우―

    여봉철은 열을 식히려는 듯 한숨을 쉰 뒤 말했다.

    "환자한테 실수한 거, 모른 척 넘어가자고 했다며."

    "헉!"

    조진기가 헛숨을 삼켰다.

    심지어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일을 지적받으니 머리가 순간적으로 하얗게 변했다.

    "환자의 기흉이 작으니까 모른 척 넘어가자고 했다는 게 사실이야?"

    "그, 그게……."

    "이 새끼 미친 새끼 아이가!"

    콰앙!

    여봉철이 조진기가 서 있는 비상문을 발로 걷어찼다.

    움찔!

    조진기가 몸을 움츠렸다.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의 여봉철인데, 진심으로 화를 내자 정말로 사람을 때려죽일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호, 혹시…… 선한이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병원 안에 비밀이 있을 것 같나? 지나가던 간호사들이 다 들었단다, 새끼야."

    "가…… 간호사들이요?"

    "의사들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 엉?"

    조진기는 머리를 굴렸다.

    ‘젠장, 망했다. 하필 그 말을 간호사들이 듣다니……!’

    눈앞이 캄캄하다.

    지금으로서는 어떻게든 변명해서 위기를 모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 빨라졌다.

    "그…… 그때는 너무 당황해서 그랬어요. 원래 사람이 당황하면 아무 말이나 하게 되잖아요."

    "진심이 아니었다?"

    "당연하죠! 저도 의사인데 환자를 죽도록 내버려 뒀을 리가 없잖아요! 선한이가 없었어도 결국 제가 알아서 잘 처리했을 거라고요!"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한다.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기는커녕 변명하기만 바쁜 모습에 여봉철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그랬겠지. 니도 인간이라면 설마 진심은 아니었겠지."

    "물론이죠!"

    "그래. 어찌 됐든 이것까지는 교수님한테 말 안 할게."

    "감사합니다."

    조진기의 얼굴이 환해진다.

    하지만 여봉철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신 니는 이번 달 인턴 평가 최하점이다."

    "최…… 최하점이요?"

    조진기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진다.

    인턴들의 월말 평가는 흔히 A, B, C로 나뉜다.

    하지만 평가가 빡빡하기로 소문난 연국대에는 D도 존재한다.

    레지던트들이 보기에 완전히 자격 미달로 판단되는 경우다.

    물론 아무리 모자란 인턴이라 할지라도 D 점수를 받는 것은 드문 일이다.

    D를 받으면 다른 과에도 소문이 날 것이 뻔하며, 그렇게 한 번 망가진 평판은 되돌릴 수 없다.

    "저만 실수한 거 아니잖아요. 왜 저만 최하점입니까?! 따지고 보면 소담이가 저보다 실수도 훨씬 많이 했잖아요!"

    조진기가 욱하고 외친다.

    불이익이 눈앞으로 다가오니, 마음속 본심이 튀어나오는 모습이다.

    하지만 여봉철의 대답은 냉정했다.

    "물론 의사도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도 있지. 문제는 그다음 행동이다."

    목소리가 착 가라앉는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조진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소담이는 자기 실수를 깨닫자마자 다른 부서에 연락해 가지고 끝까지 환자를 책임질라 캤어. 근데 니는 그 기본적인 것도 안 할라 했던 기다."

    "……."

    "듣자 하니 연국대에서 성적이 좋았던 모양인데…… 니가 학교 다닐 때 얼마나 공부를 잘했든 상관없다. 내 기준에서 니는 빵점짜리 의사다."

    "……."

    "할 말 있으면 해 봐."

    조진기는 고개를 푹 숙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미 결론을 내린 여봉철에게 어떤 변명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죽빵 한 대 갈기고 싶었는데, 니 표정 보니까 그래는 못 하겠고."

    "……."

    "아직 인턴 초기니까 다른 과에서 좋은 성적 받을 기회는 남아 있을 기다. 남은 기간 동안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잘 생각해 봐."

    여봉철은 그렇게 말한 뒤 비상계단 문을 열고 사라졌다.

    잠시 후.

    조진기는 홀로 남아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기보다는 당장 분한 마음이 치솟아 올랐다.

    ‘제기랄…….’

    문득 머릿속에 한 녀석이 떠올랐다.

    신선한.

    그 녀석이 미웠다.

    물론 이번에 자신의 실수를 발견하고 도와준 것은 다름 아닌 선한이다.

    당연히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지만, 조진기의 기분은 그렇지가 않았다.

    왠지 일이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선한의 탓인 것만 같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무엇보다, 고작 지방대학교 출신인 그 녀석보다 낮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아, 진짜. 개 같네!"

    콰앙!

    조진기는 비상문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물론 성질을 부려 봤자, 아직 다 낫지 않은 자기 손만 아파서 끙끙댈 뿐이었다.

    "끄아으……."

    조진기는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주먹을 감싸 쥐었다.

    손목 전치 2주 추가.

    그의 다음 달 인턴 생활도 망하는 순간이었다.

    #강남역(1)

    4월 마지막 주 아침.

    까칠한 둘째 누나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살아는 있냐?

    나는 숙소의 침대에 파묻힌 채 졸린 눈으로 깨작깨작 답문을 보냈다.

    ―죽지는 않은 듯?

    ―가끔 집에 와라

    ―넘 피곤쓰

    ―까불지 말고 얼굴 좀 비쳐. 의사 됐다고 비싼 척 오져 그냥!

    "비싼 척 아닌데."

    나는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응급실에서의 생활은 하루 일하고 하루 쉬고의 반복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부지런하다.

    쉬는 날엔 운동도 하고 바깥 활동도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첫 주의 희망찬 계획일 뿐!

    현실은 다르다.

    결국 오프 날이 되면 숙소에 틀어박혀 잠밖에 자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전날에 24시간 풀타임 근무를 했으니까!

    과장을 조금 보태서 표현하자면, 이틀마다 한 번씩 지구 반대편에 온 듯한 시차 적응을 겪게 되는 것이다.

    ―집에서 밥이라도 먹고 가. 아빠랑 언니가 너 보고 싶단다.

    "그래. 가끔 얼굴은 비쳐야겠지."

    나는 몸을 일으켰다.

    생각해 보니 인턴을 시작하고 나서 두 달 동안 집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 토요일이고 하니, 오랜만에 가족들에게 가 봐야겠다.

    * * *

    대충 씻고 버스에 올랐다.

    밤샘 업무가 끝나자마자 아침에 출발한 것이니, 나에게는 24시간의 여유 시간이 있다.

    부우웅―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오랜만에 바깥 구경을 했다.

    꿉꿉한 방에 환기를 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오랜만에 여유롭네.’

    한낮의 풍경들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고, 곧 익숙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낡은 아파트 단지.

    20년 동안 변한 게 하나도 없다.

    우리 집은 그리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다.

    그냥 딱 남들만큼 사는 가정이랄까?

    빠듯한 가정 형편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다.

    다만, 앞으로는 조금 여유가 있어지길 바랄 뿐이다.

    의사가 되었으니, 돈 벌어서 아버지 차 한 대 뽑아 주는 게 나의 원대한 꿈이다.

    가능하다면 조카 양육비도 좀 보태고.

    내 집 마련도 하고.

    그리고…….

    "……열심히 벌어야겠구만."

    첫 월급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마음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사회 초년생의 마음이란 게 이런 것일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문 앞이다.

    "다녀왔습니다."

    "동생 왔어?"

    벌컥!

    문을 열자마자 큰누나가 반갑게 다가온다.

    병원에서 일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마치 긴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다.

    나는 웃으며 거실을 둘러보고는 물었다.

    "매형이랑 윤아는?"

    "집에 있지. 너 온다고 해서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혼자 잠깐 들른 거야."

    "안 그래도 되는데."

    "오랜만에 동생 얼굴도 보고 좋지 뭐. 세상에, 얼굴 반쪽 된 거 봐!"

    "내 얼굴 원래 작았는데?"

    "으이구."

    큰누나가 내 볼을 살갑게 쓰다듬는다.

    히히.

    오랜만에 막냇동생 취급받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그때 둘째 누나가 추리닝 차림으로 다가온다.

    "이건 두 달 동안 코빼기도 안 비쳐. 아주 귀하신 몸이라 이거냐?"

    둘째 누나가 내 볼을 사납게 꼬집는다.

    아파!

    양쪽 볼이 비교 체험 극과 극이다.

    둘째 누나는 흔히 말하는 ‘주말 부부’다.

    매형은 창원에서 근무 중이고, 누나는 아버지와 함께 살며 횟집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결혼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 분가하지 않은…… 아니 못 한 이유는 서울 집값 때문이 아닐까.

    나는 얼얼한 볼을 만지며 물었다.

    "아버지는?"

    "안방에."

    나는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뭐에 정신이 팔리셨는지, 귀에 헤드폰을 끼고 열심히 모니터에 코를 박고 계신다.

    "아부지!"

    "어, 아들 왔는가!"

    내가 크게 외치자, 아버지가 헤드폰을 벗으며 반갑게 돌아본다.

    헤드폰에서 트로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뭐 보고 계세요?"

    "아, 뭐 별것 아니다. 그냥 가요 동영상……."

    "야, 말도 마라. 우리 아빠 저러다가 홍가연 팬클럽 가입하는 거 아닌가 몰라."

    "홍가연?"

    홍가연이 누구더라?

    아, 들어 본 적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유명해진 트로트 여신.

    웬만한 아이돌 못지않은 어마어마한 중장년층 팬덤을 자랑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요새 뒤늦은 ‘덕질’에 빠진 모양이다.

    이때다 싶어 누나들이 아버지를 놀려 댄다.

    "아빠, 홍가연이 그렇게 예뻐요?"

    "어험험, 예쁘기는. 그냥 노래가 좋아서 듣는 것이다."

    "아닌 것 같은데. 저번에 가요무대 나온 거 보니까 홍가연이 은근 또 몸매가 좋……."

    "어허, 그런 것이 아니라니깐!"

    아버지가 누나들과 투닥대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전쟁터 같은 병원에만 갇혀 있다가, 오랜만에 가족들과 섞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 * *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평화로운 일상이다.

    밥 먹고.

    TV 보고.

    과일 먹고.

    나는 사과를 깎으려는 큰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내가 깎을게."

    "됐어, 의사가 손 다치면 어쩌려고?"

    "내가 칼 쓰면서 손 다치는 거 봤어?"

    나는 허세 섞인 말투로 말했다.

    일종의 자부심이랄까?

    우리 집에서 나 외에 다른 사람이 과일 깎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그래, 오랜만에 솜씨 좀 보자."

    큰누나는 웃으며 내게 과일을 내밀었다.

    사각사각사각―

    나는 묘기에 가까운 속도로 사과 껍질을 한 줄로 얇게 벗겨 냈다.

    크으.

    완벽한 솜씨에 스스로도 감탄이 나온다.

    이런 게 바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는 것이 아닐까?

    "이야."

    "아직 막내 솜씨 살아 있네!"

    가족들이 새삼 신기한 듯 감탄하자 마음이 우쭐해진다.

    하루라도 빨리 이 손 기술을 의료 현장에서 백 퍼센트 활용할 날이 와야 할 텐데.

    아직 인턴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도 제한적이다.

    ‘수술 방에서 메스(mess)만 쥐여 줘 봐라. 아주 내가 날아다닐 테니까!’

    그렇게 내가 한참 자아도취에 빠져 있을 때, 둘째 누나가 발로 내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야. 저거 너네 병원 아니냐?"

    그렇게 말하며, 다른 쪽 발로 TV를 가리킨다.

    어? 정말이네.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이 화면 위로 지나가고 있다.

    우리 병원에 왜 뉴스에 나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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