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9화 (19/241)
  • #19 트리아지(4)

    함소담.

    소심하기로는 아마 둘째가라면 서러운 녀석일 것이다.

    지난 한 달 동안 소담이가 보여 준 모습이라고는, 자신 없이 움츠러드는 모습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평소와는 달리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보호자들의 앞을 가로막은 채 노려본다.

    소담이한테 저런 면도 있었나?

    여러모로 충격적인 일의 연속이다.

    "넌 또 뭐야?!"

    "보호자분 자식만 귀한 거 아니에요."

    "뭐?"

    소담이의 분노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여기 다친 사람들, 다 누군가의 귀한 자식들이에요. 그리고 그중에서 한 명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생명이 위급하기까지 했고요!"

    "아니……."

    "이거 다 그쪽에 앉아 있는 아드님 책임이잖아요! 죄송하다고 주위에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지금 뭐 하는 짓이세요!"

    "……."

    부부의 얼굴이 벌게진다.

    팩트로 두들겨 맞아서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소담이가 침착히 말했다.

    "물론 아드님도 치료받으실 거예요. 그러니까 순서 기다려 주세요."

    "너 감히…… 얻다 대고!"

    사모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휘이익!

    기어이 소담이를 향해 손을 올린다.

    으아악!

    혹시 아침드라마에서나 보던 광경이 펼쳐지는 건가?

    주변에서 기겁하며 뜯어말리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소담이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응급의료법 12조 아세요?"

    "뭐…… 뭐?"

    "누구든지 응급의료종사자를 폭행, 협박, 위계로 방해하는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어요."

    "……."

    보호자가 슬며시 손을 내린다.

    그 와중에 징역이라는 단어는 무서운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부부가 나란히 씩씩대며 소담이에게 손가락질한다.

    "뭐 이딴 병원이 다 있어, 감히 인턴 따위가 보호자를 겁박해?"

    "야 이 싸가지 없는 년아, 우리가 누구인 줄 알아? 나 정식으로 연국대병원에 진정서 넣을 거야!"

    그러자 소담이가 침착하게 대답한다.

    "넣으세요."

    "뭐?"

    "진정서 넣으시라고요. 제 이름 함소담입니다."

    소담이는 그렇게 말한 뒤 몸을 홱 돌렸다.

    "야, 이 싸가지……!"

    보호자들은 씩씩대며 외치려 하다가, 곧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의식하고 마지못해 제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와…….

    소담이한테 저런 면이 있었던가?

    속이 다 시원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차마 말은 못 하지만, 다들 사이다 한 사발을 들이켠 듯한 표정이다.

    소담이가 돌아오자 나는 슬쩍 물었다.

    "괜찮겠어? 진짜로 진정서 넣을 것 같은데."

    "상관없어, 나도 빽으로 어디 가서 안 꿀려."

    "뭐?"

    "로얄이잖아."

    나는 피식 웃었다.

    하긴, 소담이가 빽으로 어디 가서 남들한테 질 만한 녀석은 아니지.

    항상 위축되어 있기만 했던 소담이가 오늘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때 산도적 같은 여봉철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함소담이."

    "앗……."

    소담이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어느덧 다시 평소의 소심한 모습이다.

    응급실 한가운데서 보호자와 한바탕 싸워 버린 셈이니, 틀림없이 혼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응급실에서 큰 소리 내고, 뭐 하는 짓이고!"

    여봉철이 남들 들으라는 듯이 으름장을 놓는다.

    하지만 곧 여봉철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소담이의 어깨를 툭 짚은 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이쓰."

    처억.

    그렇게 말하며, 남몰래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린다.

    처음으로 받은 칭찬에 함소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저 학생까지 꼼꼼하게 검사해야 된다. 어쨌든 응급실에 찾아온 환자니까. 무슨 말인지 알제?"

    "예."

    "자, 빨리 움직이라! 갈 길이 태산이다."

    툭툭, 여봉철이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아직 응급실에는 우리의 손이 필요한 환자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 * *

    두 시간 후.

    검사를 마치고 퇴원할 환자들과 입원할 환자들이 겨우 구분되었다.

    응급실은 여전히 북새통이었지만, 그나마 조금씩 정리가 되고 있는 듯하다.

    음주 운전을 했던 고등학생들도 검사를 받았지만 별다른 이상 없이 퇴원했다.

    다만 퇴원하기 전, 경찰관이 학생들을 불구속입건 처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놈들, 제대로 처벌받을까?"

    "글쎄요."

    "아무리 미성년자라도 저런 놈들은 콩밥 좀 먹여야 되는데. 저것들 때문에 지금 다친 사람이 몇 명이야?"

    나는 중원이 형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나라의 법은 미성년자에게 한없이 관대하니, 아마 가벼운 처벌로 끝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듣기로는 주범자 학생의 가족이 준재벌에 가까운 재력가인 모양이다.

    소위 ‘있는 집 자식’이니 더더욱 솜방망이 처벌을 받게 될 확률이 높겠지.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저기요, 선생님."

    "응?"

    "이거 인터넷에 올려도 돼요?"

    불쑥.

    보호자와 함께 응급실에 찾아온 중학생 여자아이가 스마트폰을 내민다.

    영상을 재생하니, 아까 보호자 부부가 응급실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소리 지르는 장면.

    간호사를 밀치는 장면.

    소담이의 논리정연한 말을 듣고 당황하는 장면까지 고스란히 나온다.

    나는 픽 웃었다.

    "이건 언제 찍었어요?"

    "아까 이 사람들이 소리 지르는데 어이없어서 찍었어요. 병원에서 선생님들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오…… 잘 찍었네."

    중원이 형이 옆에서 보며 고화질로 찍힌 영상에 감탄한다.

    확실히 요새 애들은 대단하다. 학교에서도 부당한 일이 일어나면 녹화부터 한다더니.

    나는 잠시 고민한 뒤 말했다.

    "최대한 자극적으로 올려 주세요."

    "어떻게요?"

    "응급실에서 갑질하다 참교육당하는 재벌 부부, 어때요?"

    "아하."

    학생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슈가 된다면 조회수가 꽤 나올 것이다.

    이미 학생의 머릿속에는 섬네일 이미지부터 제목 어그로까지 모든 것이 한 번에 그려지는 모양이다.

    "이거 제 채널인데, 좋아요랑 구독 부탁드려요!"

    그렇게 말하며 깨알같이 홍보까지 하고 간다.

    이게 요새 애들이구나.

    새삼스레 세대 차이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요새 애들 무섭네요."

    "난 너도 무서워 인마."

    "왜요?"

    "최대한 자극적으로 올려 달라고? 가만 보면 너도 순진한 얼굴로 음흉한 구석이 있어."

    중원이 형이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갔다.

    나는 피식 웃었다.

    만약 영상이 이슈가 된다면, 제대로 처벌받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갈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서는 한 번이라도 폭발적으로 관심을 받게 되면 전 국민이 알게 될 테니까.

    * * *

    잠시 후.

    나는 여봉철 선생과 마지막 TA(교통사고) 환자의 진료를 마쳤다.

    다행히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단순 부상에 그친 환자들이 많았다.

    몇몇 환자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보호자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휴, 이제 숨 좀 돌리겠다."

    "내과 병동에서 일할 때는 몰랐는데, 여기서 일해 보니까 병원이 참 다이내믹하네요."

    "당연하지. 응급실이 괜히 응급실이가."

    그렇게 말하는 여봉철 선생이 진이 빠진 얼굴로 웃는다.

    너덜너덜한 옷에 아직도 묻어 있는 핏자국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아마 지금 내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뭐, 그래도 병동에 비해서 재밌잖아. 내 손으로 직접 응급 환자들을 살리는 재미도 있고. 그게 우리 EM(응급의학과)만의 자부심이지."

    "매력 있네요."

    "와, 관심 있나?"

    여봉철 선생이 장난스럽게 묻는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응급의학과>.

    확실히 매력 있는 곳이다.

    장기적인 질환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모여 있던 내과 병동과는 다르게, 훨씬 더 액티브하다.

    그리고 내 손으로 직접 긴급한 환자들을 소생시키는 짜릿함을 맛볼 수도 있다.

    게다가 업무 외적인 장점도 있다.

    스케줄의 온오프(on/off)가 확실하기에 개인 시간을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괜찮기는 한데.’

    솔직히 받아 준다면 감지덕지다.

    연국대병원의 어느 곳이든, 내 입장에선 넙죽 절을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아직 시간이 있으니 찬찬히 생각해 보려 한다.

    "여봉철 선생님이랑 일할 수 있다면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습니다."

    "새끼. 됐다 마. 마음에도 없는 얘기 하기는."

    여봉철 선생이 내 어깨를 퍽 쳤다.

    웃는 표정을 보니 진지하게 물어본 건 아닌 듯하다.

    "인자 퍼뜩 가서 환자나 마저 봐라. 아직 할 일 많이 남았잖아."

    "예."

    나는 여봉철을 지나쳐 다음 환자를 찾기 위해 걸어갔다.

    그런데…… 뭔가 찝찝하다.

    뭐라 해야 할까.

    자꾸만 머리 한구석에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여봉철 선생님."

    "와?"

    "혹시 TA 환자들 다룰 때 저희가 크게 실수할 만한 게 있었을까요? 의료사고라든가……."

    "사고?"

    여봉철 선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이다.

    "웃기네. 느그들이 책임질 만한 게 뭐 있다고? 끽해야 지혈하고 드레싱하고 피검사하고. 그것밖에 더 있어?"

    "그건 그렇죠."

    "샛병아리 인턴 주제에 실수해 봤자 뭘 얼마나 하겠노.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

    "알겠습니다."

    나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의 말이 맞다.

    애초에 인턴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환자의 생명과 직결될 만큼 중요한 시술은 교수나 펠로우, 레지던트들의 몫이니 말이다.

    오늘 하루의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우리 인턴들이 딱히 위험한 시술을 한 적은 없다.

    ‘그래. 이 정도면 됐어.’

    나는 마음을 놓기로 했다.

    할 만큼 했잖아?

    특히 가장 위급했던 환자는 수술 방으로 옮겨졌고, 그 이후의 일은 응급실의 영역이 아니다.

    ‘분명 미래도 바뀌었을 거야!’

    좀 찝찝하지만, 애써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 *

    자리로 돌아오니, 중원이 형이 스크린 앞에서 쌓여 있는 업무 리스트를 확인하고 있었다.

    "형. 지금 쌓인 일 많죠?"

    "어, 선한이."

    중원이 형은 이제 평소와 크게 다름없는 모습이다.

    처음에는 TA 환자들을 보고 잠시 패닉에 빠지긴 했지만, 이제는 평정심을 되찾은 듯하다.

    물론 만일을 대비해서, 오늘 밤은 중원이 형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을 생각이다.

    "TA 환자들 마무리됐으니까 저랑 같이 나눠서 처리해요."

    "그래…… 그런데 그동안 쌓인 리스트 많이 없어진 거 보니까, 조진기가 몇 개 했나 본데?"

    "진기가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걔 이름이 갑자기 왜 나와?

    분명 다친 손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할 텐데.

    "예정보다 회복이 빨라서 저녁에 깁스 풀고 왔다더라."

    "예?"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조진기가 저쪽 끝에서 의기양양하게 나타난다.

    "크크, 오랜만에 술기 좀 하니까 재밌네요."

    "아오, 얄미운 놈. 그동안 네 몫까지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아, 형님 섭섭합니다. 저도 그동안 답답하고 힘들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조진기의 양손이 멀쩡하다.

    ……손이 멀쩡해?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다.

    하필 오늘이 녀석이 깁스를 풀고 일을 시작하는 날이었을 줄이야.

    ‘설마……?’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느낀 불안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당장 위급한 교통사고 환자들만 신경 쓰느라, 기존 환자의 경우는 생각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확인해 보자.’

    나는 스크린에서 환자 목록을 열람하여 완료 처리가 되어 있는 항목들을 쭉 훑어보았다.

    조진기가 처리한 일들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체크해 본다.

    딱히 문제가 될 만한 어려운 치료는 없는데…….

    그때, 문득 한 가지 항목이 눈에 들어온다.

    ―thoracentesis

    흉수천자.

    간단히 말하자면 폐가 있는 흉강(thoracic cavity)을 찔러서 물을 빼 주는 시술이다.

    환자는 60대 노인이며, 폐렴으로 인한 호흡곤란 증상을 호소하며 응급실로 찾아온 모양이다.

    물론 흉수천자 자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인턴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술기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싸늘하지?’

    말로 설명하지 못할 불길한 느낌이 든다.

    이런 게 직감이라는 걸까?

    나는 정신없이 움직이는 인파들 사이를 헤치고 조진기를 찾아 불러 세웠다.

    "조진기!"

    "……?"

    녀석이 눈썹을 찡그리며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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