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8화 (18/241)
  • #18 트리아지(3)

    "응? 왜?"

    중원이 형이 나를 돌아본다.

    딱 봐도 넋이 반쯤 나간 표정이다.

    평소에 요령이 좋을수록 유난히 위기 대응에 약한 타입이 있다.

    중원이 형이 그렇다.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교수에게까지 한 소리 듣고 나니 일종의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다.

    지금 이 사람한테 중요한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강하게 든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제가 피검사 돌리고 올게요."

    "네가?"

    "지혈대 누르는데 팔이 저려서, 검사기 돌리는 동안 숨 좀 돌리려고요. 그동안 손 좀 바꿔 주세요."

    "어…… 그래, 알았어."

    타다닥!

    나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실린지를 넘겨받은 뒤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문득 며칠 전 여봉철 선생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응급실에서 실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 병동이랑 다르게 매일 새로운 환자는 쏟아지지, 느그 인턴들은 24시간 일하려면 마지막 6시간은 거의 쓰러지기 직전일 거다. 까딱하면 정신줄 놓는 거야 그냥.>

    나는 동맥혈이 응고되지 않도록 실린지를 흔들며 검사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검사기에는 이전 환자의 검사에 사용되었던 결과지가 그대로 꽂혀 있었다.

    <특히 동맥혈 검사 같은 거 할 때 조심해라. 잘못하면 다른 환자 검사지를 착각할 수도 있어. 지금에야 당연히 안 그럴 것 같지만, 바쁘다 보면 평소에 안 하던 실수를 할 때도 있으니까.>

    ‘이거다!’

    꿈에서 언급되었던 실수가 바로 이것이었을까?

    실제로 검사지를 혼동하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동맥혈 검사 결과를 90초 만에 뽑아내는 CIBA 기계.

    이 기계에는 수동으로 환자 번호를 입력할 수도 있는데, 응급 상황에 정신없다 보면 이 번호를 잘못 입력하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영수증처럼 쭉쭉 밀려 나오는 검사결과지는 이전 환자 결과지와 섞일 위험도 있다.

    평소라면 모를까, 생과 사를 오가는 환자를 앞에 두고는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지이잉―

    나는 주의를 기울여 제대로 된 검사지를 뽑은 뒤 소생실로 달려갔다.

    이 모든 과정이 총 2분 남짓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ABGA 결과 여기 있습니다!"

    내가 내민 결과지를 교수가 받아 들고는 눈을 크게 뜬다.

    "헤모글로빈 7.8?"

    적혈구 수치가 너무 낮다.

    즉, 분명 어딘가에 또 다른 출혈이 있다는 경고였다.

    교수의 말이 빨라졌다.

    "밖으로 보이는 출혈 말고 다른 출혈 부위가 있어."

    "교수님, 그러면……."

    "내출혈이야."

    내출혈은 몸 안에서 일어나는 출혈이다.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기에, 일반적인 출혈보다 알아채기 어렵다.

    만약 중요한 장기에서 내출혈이 일어나고 있다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

    곧 의사들이 바빠진다.

    "지금 들어가고 있는 플라즈마 솔루션 1L 풀 드립(full drip)!"

    "RBC(적혈구 수혈) 3팩 처방 낸 거, 혈액실 전화해서 빨리 올려 달라 해 주세요!"

    "포터블(portable) X―ray 불렀는데 언제 온답니까!"

    드르륵!

    곧 기계가 도착하자 여봉철이 급한 목소리로 외친다.

    "C―spine, Chest AP, Pelvic AP(경추, 흉부, 골반부위 X-ray) 어서 찍어 주이소!"

    "알겠습니다. 물러나세요!"

    기계가 빠르게 준비된다.

    통상 X―ray를 찍을 때는 방사선에 노출되기 때문에 보호복을 입거나 멀찌감치 물러나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여봉철 선생은 환자 옆에 바짝 붙어 움직이지 않는다.

    "환자 죽게 생깄는데, 방사선 좀 맞으면 어때? 잔말 말고 빨리 찍어 주이소."

    "예?"

    "퍼뜩! 간호사 쌤들이랑 인턴들은 문밖으로 나가시고."

    곧 사람들이 환자 주위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나는 여봉철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신선한이, 뭐 하노?"

    "저도 괜찮습니다."

    나는 지혈하던 손을 놓지 않고 말했다.

    지금은 환자의 몸에서 새는 혈액 한 방울이라도 보존해야 한다.

    "어차피 비행기만 타도 맞는 게 방사선인데요, 뭘."

    "……그거랑 이거랑 같나?!"

    여봉철 선생이 황당하다는 듯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환자에게 집중했다.

    하긴 본인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더 이상 할 말은 없을 것이다.

    희생정신? 사명감?

    ……아니, 그런 거창하고 숭고한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몰입>.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일’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여봉철은 뼛속까지 워커홀릭(workaholic)이다.

    나 또한 한 달 동안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알게 모르게 그를 조금씩 닮아 가고 있었다.

    어쩌면 첫날부터 여봉철을 보며 느꼈던 동질감이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삑―

    삑―

    엑스레이가 여러 번 찍히고 응급의학과 교수가 결과를 확인한다.

    곧 교수의 날카로운 눈이 문제점을 찾아낸다.

    "골반이야."

    "……!"

    그 한마디만으로, 모든 의사들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고의 충격으로 인해 골반이 골절되어 뒤틀렸다는 뜻이다.

    이 경우 2,000ml까지의 내부 출혈이 동반될 수 있다.

    교수가 재빨리 다음 지시를 내린다.

    "펠빅 바인더(Pelvic binder, 골반 압박대) 가져오고 OS(정형외과) 컨택해."

    "예!"

    곧 응급구조사들이 환자의 골반에 압박붕대를 감았다.

    다행히 골반을 압박하고, 수액과 혈액이 들어가면서 혈압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삐익― 삐익―

    환자의 맥박에 맞춰 빠른 속도로 울려 대던 모니터의 알람 소리도 정상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곧 모니터의 혈압과 맥박수, 산소포화도 수치까지 모두 정상 범위에 들어오고, 환자도 눈을 깜빡이기 시작한다.

    "휴우―"

    그제서야 의사들은 한숨을 놓았다.

    일단 고비는 넘겼다는 뜻이다.

    환자의 vital sign(활력징후)이 안정되자 여봉철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교수님, 바이탈은 잡힌 거 같은데 CT 진행할까요?"

    "음… 그래. 그렇긴 하더라도 긴장 놓지 말아라, 봉철아. 나머지 수혈 진행하는 거 꼭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brain부터 해서 chest, abdomen, pelvis까지 CT 찍고 판독 받아 놓도록 해. 난 밖에 경증 환자들 한번 돌아볼 테니."

    "네, 교수님!"

    드르륵―

    환자는 바이탈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확인된 뒤, CT 검사를 받기 위해 이송되었다.

    이로써 응급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

    ‘……성공인가?’

    일단은 마음이 놓인다.

    긴장했던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진다.

    ‘일단 여기까진 문제없어.’

    나는 겨우 숨을 돌렸다.

    만약 중원이 형이 실수했다면, 내출혈의 발견이 늦어져서 위험했을 수도 있다.

    마치 눈덩이가 굴러가는 것처럼, 아주 작은 실수도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환자를 무사히 치료했으니 다행…….

    ‘잠깐, 아니지.’

    나는 퍼뜩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안심하긴 이르다.

    10명의 교통사고 환자가 남아 있기 때문에,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끝까지 방심하지 말자!’

    아직 모든 상황이 끝난 것이 아니니까.

    적어도 오늘 밤이 지나가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 * *

    "으으……."

    "선생님, 아파요."

    소생실도 정신없었지만, 소생실 바깥도 정신없기는 매한가지다.

    곳곳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골절 환자들을 도수정복 하는 처치실에서 환자들이 비명 소리를 낸다.

    "아아앜……."

    "선생님, 여기 좀 빨리 봐주세요."

    전쟁 통이 따로 없다.

    정형외과와 신경외과에서 내려온 의사들까지 포함해서, 응급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뒤늦게 소식을 들은 보호자들까지 모여들고 있으니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점점 늘어난다.

    응급실이 병원의 대문이자 최전선이라는 것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정신없네."

    "응."

    ABGA 검사 기계 앞에서 소담이와 잠시 마주쳤다.

    역대급 하루다.

    인턴을 시작한 이래로 이렇게 정신없는 저녁을 보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소담이가 주위를 둘러보며 나지막이 말한다.

    "정신이 번쩍 드네."

    "그래?"

    "사람들 다쳐서 실려 오는 거 보니까…… 여태까지 징징댔던 게 좀 우습게 느껴져서."

    그렇게 말하는 소담이의 표정이 착잡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하긴, 지금 의사가 적성에 맞네, 안 맞네 따질 때가 아니다.

    당장 전쟁터에서 총탄이 쏟아지는데, 나는 전쟁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말할 병사가 있을까?

    응급실이란 그런 곳이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전투형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실수 없이 잘하고 있잖아. 아까 환자 상처 빨리 찾아낸 것도 그렇고."

    그렇게 소담이를 북돋았다.

    소담이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너 덕분이야."

    "뭐?"

    "응급실 인턴 하는 동안 네가 도움이 많이 됐어."

    소담이가 툭 하고 말한다.

    작은 목소리지만 그 와중에 진심이 느껴진다.

    ……내가 뭘 했더라?

    솔직히 기억도 잘 안 난다.

    그냥 내 미래를 위한 행동들이었는데 소담이한테는 나름 의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머쓱한 기분을 지우기 위해 가볍게 물었다.

    "아직도 환자 보는 게 싫어?"

    "싫어. 무섭고."

    소담이의 대답은 여전했다.

    역시 하루 만에 사람의 성향이 바뀌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그렇게 다부진 목소리로 소담이가 말한다.

    분명 소담이는 앞으로도 환자를 보는 일을 어려워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직업의 본분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오늘 소담이는 걱정 안 해도 되겠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더 이상 낯간지러운 분위기가 지속되기 전에 나는 검사기를 가리켰다.

    "야, 네 검사지 나온다. 빨리 뽑고 비켜 줘."

    "그래."

    소담이는 입을 삐죽 내밀며 출력되는 검사지를 기다린다.

    나는 계속 혈액이 담긴 실린지를 흔들며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큰 목소리가 들린다.

    "야! 여기 책임자 누구야?!"

    "……?"

    귀가 찢어질 정도의 샤우팅!

    우리는 모두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응급실 한가운데.

    중년 부부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다.

    명품 옷을 과시하듯이 두른 것을 보니 딱 봐도 졸부티가 난다.

    그런데 왜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는 거지?

    간호사가 급히 다가간다.

    "보호자분, 무슨 일이세요?"

    "당신들 지금 직무유기 하는 거야, 뭐야?"

    "예?"

    "우리 아들이 지금 다친 거 안 보여?! 당장 치료 안 해 주고 뭐 하는 거야?"

    그렇게 씩씩대면서 어느 한쪽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무면허 음주 운전을 한 고등학생이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허…….

    순간 모두들 뇌정지가 왔다.

    그러니까, 저 고등학생의 부모란 말이지?

    안하무인도 정도가 있지.

    지금 이 사달이 난 게 모두 누구 때문인데, 저렇게 당당할 수 있나?

    아무리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귀하다 할지라도, 이 상황은 어이가 없다.

    게다가 저 고등학생은 경상이다.

    기껏해야 입술이 조금 터졌을 뿐이니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호자들은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린다.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알아?!"

    "당장 책임자 데려와! 안 그러면 불성실 진료로 너희들 모두 고소해 버릴 거야!"

    부부가 쌍으로 소리친다.

    눈썹을 곤두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마치 악귀들처럼 보인다.

    저런 것도 어떻게 보면 천생연분이라고 해야 할까?

    다들 어처구니가 없어서 보고만 있을 때, 간호사가 겨우 목소리를 낸다.

    "……응급실에서 그렇게 소리 지르시면 안 돼요."

    "소리 안 지르게 생겼어? 지금 남의 집 귀한 아들을 방치 중인데!"

    "지금 더 급한 환자들이 많아서……."

    "뭐?"

    부인 쪽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나선다.

    "아니, 어차피 그런 사람들은 빨리 치료하나 늦게 치료하나 별 차이 없는 거 아냐? 당장 빨리 끝나는 치료부터 먼저 해 줘야 되는 거 아니냐구!"

    "예?"

    간호사가 할 말을 잃는다.

    이런 걸 바로 ‘기적의 논리’라고 하는 걸까?

    "됐고, 여기 응급실 책임자 불러와!"

    그렇게 말하며, 남편 쪽이 간호사를 확 하고 밀쳐 낸다.

    "아악!"

    간호사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점입가경이다.

    저대로 두고 보면 안 되겠다. 안전 요원이 도착하기 전에 누군가 나서야 한다.

    하지만 지금 내 손에는 동맥혈을 담은 실린지가 들려 있어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그때 누군가가 달려 나간다.

    "그만하세요!"

    그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분노한 햄스터.

    함소담이 씩씩대며 보호자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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