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7화 (17/241)

#17 트리아지(2)

둥, 둥, 둥.

밤의 도로 위에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젖은 땅 위로 미끈한 차체가 비를 뚫고 달리고 있다.

"와, 이게 너네 아빠 차야?"

"대박이다. 벤틀리 처음 타 봐."

"나도!"

차에 탄 고등학생들이 신이 나 있다.

손에 술병까지 든 걸 보니 친구들끼리 작정하고 일탈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너 아빠 차 훔쳐 와도 괜찮아?"

"상관없다니까. 어차피 우리 아빠 차 많아서 한 대쯤 잠깐 없어져도 몰라."

"쩐다……."

"역시 갑부."

모두들 감탄하고 있을 때, 조수석의 여고생이 불안한 듯 묻는다.

"근데 너 면허는 있어?"

"야, 고등학생 1학년이 면허가 어딨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솔직히 운전만 할 줄 알면 됐지, 면허가 왜 필요하냐? 우리나라는 미성년자한테 못 하게 하는 게 너무 많아."

"크크, 맞아."

"야, 한번 세게 밟아 봐. 얼마나 빠른지 궁금하다."

"오케이. 간다!"

운전석의 남고생이 음악의 볼륨을 높이며 액셀을 밟는다.

곧 8기통의 엔진이 굉음을 뿜어낸다.

"야, 살살 달려! 무서워!"

조수석의 여고생이 기겁하며 소리치지만, 그럴수록 운전석의 남고생은 더 속도를 높일 뿐이다.

쉬이잉!

빵빵―!

추월당한 차들이 요란하게 경적을 울린다.

하지만 값비싼 외제 차인 만큼 모두 황급히 피하기 바쁘다.

"와, 쩐다!"

"크크크, 비싼 차라고 알아서 피하는 거 봐."

"하하, 패배자 새끼들! 잘 있어라!"

핸들을 잡은 남고생이 창문을 열고 흥분하며 소리친다.

그때, 빗길에 시야가 잘 보이지 않는 탓에 자신도 모르게 중앙선을 넘어 버리고 만다.

"야, 너 역주행이야!"

"어어어?"

깜짝 놀란 남고생이 브레이크를 밟기도 전에, 맞은편 일 차로에서 달려오던 승합차가 먼저 핸들을 꺾으며 미끄러진다.

끼이이익!!!

빗길에 차가 교차한다.

곧 강렬한 충돌과 함께 차체가 돌아간다.

콰앙! 콰앙! 콰앙!

맞은편 도로에서 연쇄적인 충돌음이 울려 퍼진다.

고등학생들의 차는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겨우 균형을 잡고 멈추었다.

"으으……."

"야…… 괜찮냐?"

"아 씨, 내 목……."

다른 차와 충돌하고 말았지만, 에어백이 터진 덕분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

다들 코가 깨지거나 입술이 터지는 등의 상처를 입었을 뿐이다.

"미친, 벤틀리라서 살았다."

"야, 큰일 났어. 빨리 나와 봐."

잠시 후 차에서 걸어 나온 고등학생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헉!"

"어떡하냐 이거……."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승합차는 충돌을 피하려다 빗길에 완전히 전복이 되어 버렸고, 그 여파에 휩쓸린 몇 대의 차량이 찌그러져 있다.

특히 가장 심한 것은 승합차와 직접적으로 부딪힌 경차다.

차체가 마치 알루미늄 포일처럼 구겨져 있고, 부서진 창문 사이로 피투성이의 젊은 여성이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정작 잘못한 건 자신들인데, 맞은편 도로에서 대형 인명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야 미친…… 어떡하지?"

"시…… 신일아, 너네 아빠 빽으로 해결할 수 있냐 이거?"

안색이 파래진 학생들이 묻는다.

하지만 이 와중에 운전하던 녀석은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차밖에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아 씨, 이거 3억짜리인데 다 찌그러졌네…… 박살 낸 거 걸리면 아빠한테 혼날 텐데……."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정신을 차린 여고생이 겁먹은 목소리로 훌쩍이며 구조대에 전화를 걸었다.

"거, 거기 119죠……?"

"야야, 신고하지 마! 지금 신고하면 우리 술 먹은 것까지 걸려!"

"그럼 어떡해, 우리 때문에 사람들이 다쳤는데!"

고등학생들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비는 점점 더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 * *

"미성년자 음주 운전이라고?"

"그렇다네요."

"미친놈들."

응급의학과 교수가 짧게 의견을 정리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거림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 응급실에는 교수를 필두로 EM 의사들이 모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응급구조사와 간호사까지 합치면 30명이 넘는 인원이다.

비록 사고는 철없는 고등학생들이 저질러 놓았지만, 해결하는 건 우리 의료인들의 몫이다.

"정작 음주 운전을 한 학생들은 대부분 경상이랍니다."

"그야 그렇겠지. 지들은 비싸고 안전한 차 탔으니까. 죽고 싶으면 자기들끼리 죽을 것이지, 왜 멀쩡한 사람들을 물귀신처럼 끌어들여?"

교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교수도 더 이상 학생들을 탓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환자가 몇 명이래?"

"9명이라고 하는데요, CPR 환자는 없다고 했습니다만……."

그때 응급구조사가 연락을 받고 외친다.

"TA 환자 11명 거의 도착했다고 합니다. 십 분 뒤 도착 예정입니다!"

"뭐? 2명 더 보냈대?"

교수가 혀를 찬다.

11명!

이렇게 많은 외상환자가 한꺼번에 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중 몇 명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만 보면 119 얘들은 왜 우리 병원에만 많이 보내는 거야? 아무리 연국대병원이라도 그렇지."

"갑자기 11명이나 오면 어떡해요…… 안 그래도 지금 치료해야 되는 환자도 많은데……."

간호사가 울상을 지었다.

이미 응급실에는 평소처럼 30명이 넘는 환자가 치료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죠. 당장 급하지 않은 환자들에게는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응급실의 인력은 한정적이다.

그러니 한정된 인력을 잘 분배해서 가장 중요한 환자부터 치료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트리아지(triage)다.

위급한 환자가 먼저 치료받을 수 있도록, 우선순위에 따라 분류하는 것을 말한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온 여봉철 선생이 응급구조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환자들 상태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얘기합디까?"

"대부분 레벨 3에서 5 사이인데, 레벨 2 환자가 한 명 있다고 합니다."

"레벨 2라…… 119 쪽도 정신 없어가 평가 제대로 못 했을 낍미더. 레벨 1 환자라 생각하고 도착하면 소생실로 빨리 옮깁시다."

여봉철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응급 환자는 위급도에 따라 레벨이 달라진다.

레벨 1 ― 심정지, 쇼크, 무의식 상태

레벨 2 ― 중증 외상, 중등도 호흡부전, 심한 통증, 발열?

레벨 3 ― 경한 호흡곤란, 중등도 통증?

레벨 4 ― 경한 통증

레벨 5 ― 상처 소독, 약 처방

즉 레벨 1의 응급 환자는 최우선으로 치료해야 할 대상이라는 뜻이다.

여봉철이 큰 목소리로 외친다.

"뒷목 잡고 걸어 들어오는 환자들은 그냥 레벨 5라고 보면 되는데, 혹시 모르니까 기본적인 검사는 다 하게 만들어야 돼. 우리 트라우마 세트(trauma SET)에 있는 영상검사는 빠짐없이 할 수 있게 하고!"

"네 알겠습니다!"

"인턴들도 긴장하고 있어라. 알았나?"

"예."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이곳은 혼란스러운 전쟁터가 된다.

그리고…….

오직 나만이 미래를 알고 있다.

‘반드시 인턴 실수로 의료사고가 일어날 거야.’

아무래도 중증 환자를 다룰 때 중대한 실수가 일어날 확률이 높겠지.

과연 내가 실수를 발견하고 막을 수 있을까?

‘어떻게든 해 보자!’

나는 힐끗 옆을 바라보았다.

중원이 형은 평소보다 다소 긴장한 상태다.

"그러고 보니 EM에서 일하면서 이렇게 심각한 환자 다루는 건 처음 아니냐? 좋은 기회니까 잘 배워 둬야겠네."

초조하게 땀이 흐르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한다.

사람이 다친 것을 ‘기회’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아직 수련의에 불과한 우리에겐 절대적으로 경험의 양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소담이는…….

의외로 평소와 다를 바가 없다.

과하게 긴장하고 있지도 않고, 집중력을 잃지도 않은 채, 그저 묵묵히 환자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번엔 실수 안 해."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다지고 있다.

그런데 조진기는 어디에 있지?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다.

"형, 진기는요?"

"걔는 손도 못 쓰는데 외상 환자들 봐서 뭐 하겠냐? 동의서나 받아야지."

"하긴 그렇죠."

다행이다.

나는 가슴을 쓸었다.

당장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는 인간은 하나라도 없는 편이 낫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왜애앵―

드르르르!

곧 응급실의 문이 활짝 열리며, 피투성이의 환자가 목에는 보호대를 두른 채 산소호흡기를 달고 실려 오는 것이 보인다.

"레벨 2 환자입니다!"

"소생실로!"

여봉철 선생이 소리를 지르며 전쟁터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 * *

심윤진.

20대 중반의 직장인 여성이다.

아마도 늦게까지 야근한 뒤 퇴근하던 중에 사고를 당했던 모양이다.

그나마 본능적으로 머리를 보호했던 모양인지, 머리 쪽은 타박상과 약간의 자상으로 그쳤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체의 부상이다.

하얀 블라우스로 덮인 왼쪽 상반신이 완전히 피로 빨갛게 젖어 있는 것이 보인다.

"허억."

중원이 형이 헛숨을 삼킨다.

아무리 의사들이 병원에서 밥 먹듯이 보는 것이 환자지만,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가는 환자가 응급실로 실려 오는 풍경은 위압감이 남다르다.

"환자 상태는요?"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지혈은 저희가 1차적으로 했지만 출혈 부위가 더 있을 겁니다. 저희가 갔을 때는 이미 환자가 드로지(drowsy, 의식이 혼미함) 상태였습니다."

"이런…… 알았습니다."

EM 의사들이 구급대원들로부터 재빨리 환자를 넘겨받았다.

응급구조사와 간호사가 바쁘게 혈압을 재고 산소포화도 측정기기를 손가락에 부착한다.

곧 여봉철이 혀를 찼다.

"새츄레이션(saturation, 산소포화도) 유지 안 되고…… 혈압도 85가 뭐고, 여기 인투베이션(intubation, 삽관) 준비!"

그가 다급히 외친다.

응급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산소 공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혈액의 보존이다.

"신선한, 함소담. 구조사 쌤들이랑 옷 벗기고 출혈되는 곳 잘 살피봐라!"

"넵!"

나는 소담이와 구조사들과 함께 블라우스를 잘라 내었다.

찌익―

곧 피에 젖은 환자의 맨몸이 드러난다.

1초에 1cc씩 출혈이 있다 가정하면, 15분이면 1L 가까운 피가 밖으로 흐르게 된다.

지혈이 1분 늦어질 때마다 환자의 생존율은 3퍼센트씩 떨어진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빨리 출혈 부위를 찾아내야 한다.

‘어디지? 빨리 찾아야 하는데…….’

우리는 빠르게 환자의 몸을 살폈다.

긴박한 상황 탓에 냉정하게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때 소담이가 외친다.

"찾았어요!"

힘없이 늘어진 팔 안쪽.

세로로 길게 찢어진 상처가 피를 뱉어 내고 있다.

"왼쪽 팔 레서레이션(laceration, 열상)에서 피가 많이 흐릅니다!"

"압박해서 지혈해!"

"예!"

나는 소담이와 함께 출혈 부위를 소독한 뒤 많은 거즈와 붕대를 사용해서 압박 지혈을 시작했다.

"……."

나는 옆을 힐끗 바라보았다.

소담이는 웬일로 동작이 야무지고 빠릿빠릿하다.

의외로 이런 큰 사건에는 강한 타입인 것일까?

‘일단 여기까지는 세이프야.’

모든 과정이 수월하고, 누구 하나의 실수 없이 매뉴얼대로 진행되고 있다.

여봉철이 환자의 눈을 살피며 말한다.

"동공은 괜찮은 거 같은데…… 우리 여기 쏘노(sono, 초음파)도 준비해 놨죠?"

"내가 보고 있다."

"아, 교수님이 보고 계시구나."

여봉철이 잠깐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응급의학과 교수가 옆에서 초음파를 통해 중요 부위를 살펴본다.

"흐음…… 초음파에서는 딱히 이상 있는 부분은 없어. 심장 안, 복강, 흉강…… 고여 있는 피 없고."

교수가 혼잣말을 한다.

여봉철이 기도삽관을 하고, 응급의학과 교수는 초음파를 통해 환자를 검사하는 동안, 간호사들은 팔에 말초혈관을 잡고 수액을 달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다들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ABGA(동맥혈 검사) 검사 결과 아직 멀었나?"

"지…… 지금 하고 있습니다."

교수의 물음에, 중원이 형이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손놀림이 평소보다 훨씬 버벅거리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다.

"너무 느려. 환자 죽은 다음 검사할 건가?"

교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교수의 질책이니, 누구라도 움찔할 수밖에 없다.

여봉철이 옆으로 다가와 말한다.

"중원이 비키 봐라, 어차피 A―line 잡아야 되니까 내가 할게."

에이 라인(A―line).

동맥 안에 얇은 플라스틱 관을 넣어서 지속적으로 혈압을 측정하고 동맥혈 검사(ABGA)를 시행하기 위한 라인을 말한다.

금세 A―line을 잡은 여봉철이 동맥혈을 뽑아내어 중원에게 건넨다.

"자, 이거 퍼뜩 ABGA 기계 돌리온나!"

"네 알겠습니다!"

중원이 형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여봉철이 건네주는 동맥혈을 받아 든다.

그리고 주사기 실린지 내에 있는 헤파린(heparin, 항응고제)과 섞일 수 있도록 위아래로 흔들다가 그만 손이 미끄러지고 만다.

미끄덩!

"헉!"

"야, 야!"

자칫하면 실린지를 손에서 놓칠 뻔하며 주변을 경악시킨다.

허둥대며 겨우 땅에 떨어지려는 걸 몸으로 받아 내었지만, 다른 의사들의 따가운 눈초리는 피할 수 없다.

"점마 와 저라노?"

"죄송합니다. 거…… 검사 돌리고 오겠습니다!"

중원이 형이 그렇게 소생실을 나선다.

……왠지 등골이 싸하다.

저 상태라면 어떤 실수를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순간 머릿속에서 하나의 상황이 떠오른다.

"형, 잠깐만요!"

나는 황급히 중원이 형을 불러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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