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6화 (16/241)

#16 우리 중에 말리그가 있다(7)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 놓자!’

나는 생각나는 것들을 스마트폰에 빠짐없이 기록했다.

내 기억력은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업무가 끝난 새벽.

철컥―

나는 샤워를 마치고 빈 숙소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책상 달력을 집어 들었다.

정리해 보자.

세 번째 예지 속.

분명 치프 레지던트의 말 속에 몇 가지 단서들이 숨어 있었다.

―물론 억울한 녀석도 있을 거야. 나는 [한 달 동안] 잘했는데 저놈 때문에…… 그렇게 원망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

‘한 달 동안’.

분명 치프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번 달 인턴이 거의 끝나 가는 시점이라는 뜻이겠지.

―아무리 [평소보다 환자가 몰아닥치는 상황]이었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해?

‘평소보다 환자가 많았다’.

이 또한 중요한 힌트다.

즉 사고가 일어나는 시점은 이번 달 말, 환자가 한꺼번에 몰리는 어느 날이라는 것이다.

‘4월 마지막 주에 우리가 근무하는 날을 격일로 체크해 보면…….’

사각, 사각―

나는 붉은 펜으로 달력 위에 체크 표시를 했다.

대략 날짜가 3~4일 정도로 추슬러진다.

‘아마 이날 중에 사고가 발생할 거야.’

타악―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막연했던 것이 조금이나마 눈앞에 그려진다.

물론 충분한 정보는 아니다.

하지만 사고가 일어날 시점을 대략이라도 알고 있다면 대비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휴우."

나는 얼굴을 쓸었다.

기묘한 기분이다.

마치 누군가가 나에게 어려운 시험문제를 내면서 도발하는 듯하다.

네까짓 게 과연 풀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물론 나는 학생일 때도 문제 풀이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명문대를 갈 만큼 좋은 머리를 타고나지도 않았고, 습득이 빠른 편도 아니다.

하지만 근성이라고 해야 할까, 고집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한번 붙잡고 늘어지면 어떻게든 끝을 보는 성질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 보자."

꽈악―

나는 주먹을 쥐었다.

승부욕이 생긴다.

의료사고든 뭐든, 반드시 미래를 바꿔 주마.

그리고 EM(응급의학과)에서도 보란 듯이 좋은 평가를 받고 살아남을 거다!

"내가 바로 가락시장의 아들 신선한이다, 이 자식들아."

나는 혼자 말하고 씩 웃었다.

비록 아무런 맥락도 없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마법 주문 같은 효력이 있는 문장이었다.

#트리아지(1)

"아~ 연애하고 싶다."

벤치에 앉은 근욱이가 중얼거린다.

4월의 어느 날.

우리는 병원 옆 벤치에 앉아 편의점 커피를 빨고 있었다.

<산책길>.

우리끼리 간단히 부르는 이름이었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이 길은 누가 이렇게 낭만적으로 만들어 놨는지…….

길가를 따라서 벚꽃이 줄지어 심어져 있고, 바람이 살랑이는 오늘 같은 봄날에는 꽃잎이 휘날려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이 휘날리는 벚꽃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누구라도 간질간질하고 심란한 감정들이 피어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건조하고 메마르기만 할 것 같은 병원 곳곳에 봄이 오고 있었고, 그건 우리 인턴들의 마음속도 마찬가지였다.

―인턴 윤 모 씨랑 소아과 간호사 사귄다는 소문 사실임?

―윤 모 씨 하면 한 명밖에 없자나 ㅋㅋㅋ 사실인 것 같던데. 얼마 전에 밀회 현장 목격했음. 둘이 아주 달달해 보이더만.

―니들 디스패치여 뭐여.

―ㅋㅋ

―ㅋㅋㅋㅋ

―여기저기서 썸 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봄은 봄인가 보네 ㅠㅠ 외롭다~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며 피식 웃었다.

<연국대 인턴 대나무숲>.

인턴 동기들이 모여 있는 익명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요새는 어느 직장이든 이런 커뮤니티가 활발히 만들어진다고 한다.

익명이니만큼 별 얘기가 다 나오는데, 특히 요즘은 외롭다는 아우성이 폭발한다.

이제 다들 인턴 생활에 슬슬 익숙해지니 주변으로 눈이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의 룸메이트 근욱이도 마찬가지였다.

"춘래불사춘이라.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가 않구만."

그렇게 말하며, 청승맞게 커피를 홀짝거린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다는 뜻이라나 뭐라나.

가만 보면 근욱이는 좀 아재 같은 면이 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갑자기 근욱이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우리 아직 그렇게 시들어 가는 나이는 아니잖아. 병원에만 틀어박혀 있기 너무 아까운 청춘 아니냐?"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근욱이는 나를 바라보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팅하자."

"미팅?"

"잠깐 기다려 봐."

뒤적뒤적.

근욱이가 스마트폰을 꺼내 무언가를 열심히 찾더니, SNS의 사진을 한 장 보여 준다.

짜~안.

화사하게 웃고 있는 세 명의 미녀가 보인다.

풀메이크업을 한 채 루프톱 바에 앉아 있는 모습들이, 마치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다.

"어떠냐?"

"누군데?"

"3명 다 올해 대원항공 승무원 합격한 분들이란다. 친구가 인원수만 맞추면 소개해 줄 수 있다고 했는데, 어때? 관심 있냐?"

그렇게 말하는 근욱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초등학생의 눈빛도 저렇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한마디로 대답했다.

"관심 없어."

"뭐?"

"나 올해는 연애할 생각 없거든."

"선한아, 제발!"

근욱이가 와락 엉겨 붙는다.

땀 냄새 난다.

게다가 울퉁불퉁한 가슴근육이 느껴져서 묘하게 기분 나쁘다.

"저리 가."

"선한아, 우리 중에 그나마 사람처럼 생긴 게 너잖아! 미팅에 너 같은 놈이 있어야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돌아간다고!"

"미팅 같은 건 대학교 1학년 때나 하는 거잖아."

"무슨 말이야, 요새는 직장인 미팅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그래?"

"당연하지!"

근욱이가 침을 튀겨 가며 열변을 토한다.

요새는 스마트폰으로 간단하게 이성을 만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지나치게 가벼운 만남에 질린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직장인 미팅의 장점은, 선호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분들, 의사들 만나 보고 싶단다. 마침 나도 어릴 때부터 승무원 누나들 만나 보는 게 꿈이었거든. 이거야말로 천생연분 아니겠냐? 흐흐흐."

"이제 누나 아니잖아."

"어…… 그랬던가?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할 거야 말 거야."

나는 빙긋 웃었다.

"안 해."

"망할 놈."

"무슨 얘길 그렇게 재밌게 해요?"

연서가 불쑥 끼어들었다.

같이 일하는 동기들과 편의점을 다녀오던 도중에 우리가 보여서 잠깐 빠져나온 모양이다.

근욱이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어허, 비밀이야. 남자들끼리의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

"웃겨. 뭔 얘기길래?"

"항공사 승무원 미녀들과의 3 대 3 뜨거운 미팅."

"미팅?"

연서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잠시 이해하는 데 로딩 시간이 걸리는 듯한 표정이다.

"아, 병원에서 일 때문에 하는 미팅이 아니라…… 진짜 그 미팅?"

"당연히 그 미팅이지. 병원 바깥에서까지 업무 미팅 할 일 있냐? 흐흐흐."

"으이구, 참 좋으시겠네요."

"좋지 그럼. 선한이도 가기로 했다."

"선한 오빠도?"

"내가 언……."

"여보세요? 동협이냐? 예전에 얘기했던 그 미팅 말인데!"

근욱이는 내 말을 무시한 채 전화를 하며 희희낙락 일어섰다.

아무래도 제멋대로 약속을 잡으려는 것 같은데, 누가 그런 귀찮은 자리에 가나 봐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스윽―

내 얼굴 위로 그늘이 진다.

고개를 드니, 연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신선한 선생님, 팔자 좋으시네요. 미녀들과의 뜨.거.운 3 대 3 미팅도 다 하시고~?"

"나는 간다는 말 안 했……."

"참 나, 언제는 인턴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면서요?"

그렇게 말하는 연서의 표정이 샐쭉하다.

가만 보니 입꼬리에 장난기가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이, 단순히 나를 놀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미팅이라, 참 좋겠네~"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연서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남은 커피를 홀짝였다.

……아무래도 봄이 오면 다들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것 같다.

나라도 정신 차리고 살아야지.

* * *

저녁 8시.

응급실에는 여전히 환자들이 많았다.

"쯧, 청승맞게 무슨 봄비가 이리 세게 오노."

사복을 입은 여봉철 선생이 투덜대며 우산을 찾으러 돌아왔다.

나는 막 드레싱을 끝내고 스테이션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

"비 온다 아이가."

"비가 와요?"

"몰랐나?"

"응급실 안에만 있었더니 날씨가 어떤지도 몰랐네요."

"니도 슬슬 미쳐 가는구나."

여봉철 선생이 타짜의 김윤식 흉내를 내며 내 어깨를 짚는다.

나는 피식 웃었다.

4주 차가 되니 이제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여봉철 선생과 친해졌다.

그동안 헬스장에서 몇 번 봤더니 친분을 쌓는 속도도 빨라졌다.

"니도 레지던트가 되면 알게 될 끼다. 집에 가면 뭔가 어색해.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닌 것 같고 말이야. 응급실에 오면 ‘아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니까?"

"연애는 안 하십니까?"

"연애는 시벌. 상대가 있어야 하지. 장난하나?"

여봉철 선생이 으르렁거렸다.

갑자기 낮에 근욱이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나 대신 여봉철 선생을 미팅에 보낼까?

아마 미녀들이 나온다고 하면 좋아서 입이 벌어질 텐데.

‘지금은 때가 아니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의료소송이 터져서 분위기가 엉망진창이 된다면 미팅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없다.

일단은 이번 달에 예정된 사고를 무사히 넘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어차피 올 거면 빨리 와라!’

기다리다 지친다.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마치 한 대 맞을 준비를 하고 이를 악물고 있는데, 때리는 놈이 얄밉게 주먹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기왕이면 빨리 때려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응급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따르르르―

"예, 연국대병원 응급……."

멈칫.

대기 중이던 스테이션 간호사가 전화를 받다가 말을 멈춘다.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른 공기가 잠시 흐른다.

간호사는 대뜸 여봉철 선생에게 손짓을 하며 큰 소리로 말한다.

"119 상황실인가요? TA(Traffic Accident, 교통사고)라구요? 위치가 어디죠? 도착 예정 시간은요?"

TA!

그 말을 듣자마자, 여봉철 선생이 번개처럼 달려가 수화기를 낚아챈다.

"환자들 상태는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진다.

농담 따 먹기를 하던 공기는 온데간데없고, 긴장감이 응급실에 맴돈다.

여봉철 선생은 몇 가지 메모를 하더니, 전화를 끊고 외친다.

"20분 있다 9명 온다고 합니다!"

9명!

보통 사고가 아니다.

모두의 표정이 굳는 가운데, 여봉철의 말이 이어진다.

"CPR 환자는 없다 카는데, 임마들 항상 그렇듯이 중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소생실 비워 두고! 인투베이션(intubation, 기관내삽관) 준비랑 벤틸레이터(ventilator, 인공호흡기) 준비해 놓고! 혈액은행에도 미리 전화해 두시고!"

타다닥!

여봉철 선생의 외침에 간호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직 교수에게 자세한 상황을 전하러 이동하던 여봉철은 어쩔 줄 몰라 멀뚱히 서 있는 인턴들을 보고 외친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라. 알았나?"

"예!"

꿀꺽.

다른 인턴들은 처음 겪는 대형 교통사고에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고,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4월 마지막 주]

[유난히 환자가 몰리는 때]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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