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4화 (14/241)
  • #14 우리 중에 말리그가 있다(5)

    물속을 걷는 기분이다.

    곧 눈앞이 선명해지며, 다시 한번 미래예지가 시작된다.

    "인턴들, 다 모였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진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응급실 회의실에 열 명 정도의 의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 있다.

    ‘분위기가 왜 이래?’

    왠지 공기가 싸하다.

    물방울 하나만 떨어트려도 허공에 고드름이 생길 것 같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윽. 저건 나잖아?’

    왠지 핼쑥해 보이는 내가 인턴 동기들과 함께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그 옆으로는 함소담, 조진기, 오중원…… 즉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 응급실 인턴들이다.

    그런데 왜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지?

    마치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내가 응급의학과에서 일하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다."

    치프 레지던트가 무슨 이유인지 화가 잔뜩 나 있는 표정이다.

    "긴말할 것 없이, 니들 이번 달 인턴 평가는 죄다 C다. 알겠어?!"

    "예."

    나를 포함한 인턴 4명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뭐라고? C?!

    머리 위에 폭탄이 쾅 하고 떨어진 느낌이다.

    인턴 시작한 지 두 달도 안 됐는데, 벌써 C를 적립한다고?

    연국대병원 생활은 이번 해로 끝내라는 얘기야, 뭐야?

    "물론 억울한 녀석도 있을 거야. 나는 한 달 동안 잘했는데 저놈 때문에…… 그렇게 원망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

    치프의 말이 이어진다.

    "하지만 억울해하지 마라. 한 명이 잘못해도 공동책임인 거야. 서로서로 부족한 부분은 잘 챙겼어야지!"

    공동책임이라…….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우리 넷 중에서 누군가 한 명이 잘못을 했다.

    그런데 뭔지는 몰라도 그게 아주 큰 잘못이었던 모양이다.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러십니까, 치프 선생님! 무슨 일인지 알아야 미래를 본 제가 그 사건을 막지 않겠습니까?! 말 좀 더 해 주세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치프의 화난 목소리가 이어진다.

    "환자는 아직도 중환자실에 누워 있고, 가족들이 언론까지 제보해서 일이 커진 거 알고 있지? 교수님들도 지금 난리 났다."

    중환자실? 언론 제보?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 글쎄, 이 양반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소리를 낼 수 없으니 물어볼 수도 없고,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그때 여봉철의 입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잘 가르쳤어야 되는 긴데."

    "이게 가르친다고 막을 수 있는 실수야?"

    "그래도 제 잘못이 큽니다."

    "됐다. 쉴드 칠 생각 하지 마! 아무리 평소보다 환자가 몰아닥치는 상황이었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해?"

    치프 레지던트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 쉰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인턴 실수로 의료소송이라니……."

    뭐?

    잠깐, 방금 뭐라고? 의료소송?

    젠장, 최악의 상황이다.

    인턴의 실수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병원 전체가 뒤집어질 만하다.

    단순히 ‘죄송합니다’로 끝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치프 레지던트들이 화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만약 그 실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미리 방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귀를 기울여 집중했다.

    "네 명 다 잘 들어라.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이번에 사고 친……."

    그의 입이 다시 한번 열리는 순간―

    파아앗!

    눈앞이 밝아진다.

    * * *

    "이런 씨……!"

    욕이 절로 튀어나온다.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순간에, 반쪽짜리 정보만 얻은 채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뭐 이런 개떡 같은 타이밍이!

    "왜 그래요?"

    눈앞을 보니, 깜짝 놀란 연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난데없이 허공에 소리를 질렀으니 미친놈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는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오빠…… 가끔 이상하게 변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이중인격자, 뭐 그런 거 아녜요?"

    연서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흘겼다.

    이러면 안 되지. 침착하자…….

    애꿎은 연서 앞에서 성질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된다.

    "미안, 갑자기 신경과 환자 노티해야 되는데 까먹은 게 생각나서."

    "진짜요?"

    "응."

    "어떡해, 그럼 지금 빨리 가 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 나중에 또 연락할게 연서야!"

    나는 적당한 핑계로 얼버무린 뒤 응급실로 돌아가며 생각에 잠겼다.

    응급실 인턴 4명.

    우리 중, 가까운 미래에 초특급 대형 사고를 저지르는 인간이 숨어 있다.

    그게 어쩌면 나일 수도 있고.

    ‘미치겠네.’

    만약 꿈이 조금만 길었으면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중간에 뚝 끊겨 버리는 바람에 난감하게 됐다.

    ‘어쩔 수 없지.’

    제한된 정보로 어떻게든 미래를 막아 보는 수밖에!

    * * *

    응급실에는 하루 평균 200명의 환자가 찾아온다.

    하지만 주말에는 비교적 환자가 적은 날도 있다.

    업무 리스트를 비운 뒤 대기하고 있는데, 중원이 형이 다가온다.

    "선한아, 나 좀 쉬고 올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라. 알겠지?"

    중원이 형이 눈을 찡긋거렸다.

    원래 인턴들은 24시간 동안 응급실에 대기해야 하지만, 요령껏 한 명씩 숨어서 쉬기도 한다.

    특히 코너를 돌아 구석에 있는 초음파실은, 생각보다 푹신한 환자용 베드와 절묘한 위치로 인턴들이 몰래 숨어서 쉬는 장소로 애용된다.

    그런데…….

    중원이 형은, 너무 자주 간다.

    응급실 인턴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완벽하게 적응한 것도 능력이라 해야 하나? 나이를 괜히 먹는 게 아닌가 보다.

    나는 꼼꼼히 물었다.

    "아까 스파이널 태핑(spinal tapping)은 하셨죠?"

    "그럼, 완벽하게 했지. 내가 누구냐."

    "김태진 환자 동의서 4개 떴던데, 그것도 안 빼먹고 4개 다 받았죠?"

    "어허, 신선한. 너 가만히 보면 시어머니 같아~? 우리끼리 너무 옵쎄하게 굴지 말자, 인마!"

    중원이 형이 피식 웃는다.

    <옵쎄(Obse)하다>는 것은 강박성 인격장애(Obsessive―compulsive Personality Disorder)의 앞 글자를 딴 은어로, 지나친 완벽주의를 말한다.

    좋은 말로 하면 꼼꼼하다는 뜻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이 없이 주변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성격을 뜻한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우리 중 누군가 의료사고를 저지른다는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원이 형일 가능성은 낮지만…….’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중원이 형은 뺀질거리는 성향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꼭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실수가 적다.

    적어도 응급실에서 사고를 칠 만한 사람 중 1순위 후보자는 아니라는 뜻이다.

    "형, 같이 가요."

    "넌 왜 따라오냐?"

    "아, 혼자만 꿀 빨러 갑니까? 같이 뺑끼 좀 칩시다."

    조진기가 실실 웃으며 중원이 형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보인다.

    조진기?

    저놈은 강력 후보이긴 하지만 역시 의료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은 낮다.

    왜냐하면 손에 깁스를 하고 있어서 동의서를 받거나 간단한 검진만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시 가능성이 높은 건…… 함소담인가?’

    나는 옆에 앉은 소담이를 바라보았다.

    왠지 저번 채혈 사건에서 실패한 이후로 더 어깨가 움츠러든 것 같은 의기소침한 모습이다.

    하지만 아직 속단하지는 말자.

    어쩌면 셋 다 아니고, 정작 내가 삽질을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젠장,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네.’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직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분명 우리 중에 말리그(malignancy)가 있다.

    * * *

    환자에게 간단한 드레싱을 한 뒤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새벽 3시가 다가올 무렵, 비교적 한산해진 응급실 문 바깥으로 나와 바람을 쐬었다.

    잠을 깨기 위해 몸을 펴고 있는데 소담이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는데."

    "응?"

    "저번에 나보고 왜 의사가 됐냐고 했지?"

    무려 세 시간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왠지 아까부터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더라니.

    나는 고개를 돌려 소담이를 바라보았다.

    소담이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한참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너랑 얘기하고 나서 고민이 많아지더라. 어릴 때부터 부모님한테 떠밀려서 공부했고, 떠밀려서 의대에 왔어."

    "……."

    "내 인생은 항상 그랬어. 내가 잘하는 거,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남들이 시키는 것만 해 왔어."

    "……."

    "막상 의사가 되어 보니까 환자도 무섭고…… 제일 무서운 건 내가 실패할까 봐 무서워. 오늘도 실수를 다섯 번은 한 거 같아. 아무래도 괜히 의사가 됐나 봐."

    나는 아무 대답 없이 소담이의 울적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전혀 공감이 안 갔다.

    적어도 나는 의사가 되기를 절실히 원했으니까.

    비록 심신이 빠개질 정도로 피곤한 일상이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연국대병원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간다.

    어릴 때부터 과도한 압박감에 시달린 모범생들의 전형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3대째 의사 집안의 장녀.

    부모에게 떠밀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정신을 차려 보니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소담이의 경우, 그 부작용이 지금 의료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셈이고.

    ‘큰일이네.’

    이대로라면 응급실 한 달 동안 어떤 실수를 저지를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점점 의료소송 건의 범인이 함소담일 거라는 확신이 든다.

    ‘잠깐…….’

    그 순간,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쩌면 소담이의 인식 속에 무언가를 심어 둘 수 있지 않을까?

    왜, <인셉션>이라는 영화도 있지 않은가.

    소담이의 머릿속에 트리거를 걸어 두면, 미래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 고민하지 마."

    "응?"

    "만약 네가 실수를 저질러도 다른 인턴들이 커버 쳐 줄 수 있으니까, 나나 중원이 형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아……."

    "대신 너도 우리를 도와주면 되잖아. 서로 실수하지 않도록 신경 써 주자고. 동기들끼리. 어때?"

    이게 바로 내 전략이다.

    일명 <밑밥 작전>.

    이렇게 말해 두면, 나중에 소담이의 치명적인 실수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소담이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 말했다.

    "너 되게 착하구나."

    응?

    무슨 결론이야 이건.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단지 의료사고를 막고 싶은 것뿐인데, 얼떨결에 착한 친구가 돼 버렸다.

    왠지 감동받은 듯한 소담이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고마워, 여태까지 나한테 그런 말 해 준 동기 한 명도 없었는데…… 너 되게 착한 거 같아. 이름이 선한이라 그런가?"

    "내 이름 그런 뜻 아닌데."

    "착할 선(善) 자 아니야?"

    "생선 선(鮮) 자야. 횟집 아들이거든."

    "횟집?"

    소담이가 귀를 쫑긋 기울인다.

    나는 나의 가정사를 대충 요약해서 말해 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소담이의 빵 터진 표정을 볼 수 있었다.

    하긴 내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웃지 않는 친구는 여태까지 본 적이 없다.

    일종의 치트키라고 해야 할까?

    "아하하…… 너 진짜 재밌는 애구나."

    소담이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웃더니, 그 뒤로도 한동안 내 얘기를 재미있게 들어 주었다.

    막상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니 소담이는 생각보다 어둡기만 한 녀석은 아니었다.

    다만 성격이 남들보다 아주 많이 소심해서 인턴 초반에 고생을 하고 있을 뿐이지.

    분명, 앞으로 잘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 * *

    화요일 아침의 출근길.

    함소담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녀는 며칠 전 선한이 자신에게 해 주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누군가 이렇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말을 한 건 오랜만이었다.

    ‘좋은 녀석이었어.’

    그녀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항상 로얄이라고 주위에서 편견을 가진 채 대하는 녀석들뿐이었는데, 처음으로 마음이 가까운 친구가 생긴 기분이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소담은 의사복으로 갈아입고 응급실로 향했다.

    아침 7시에 출근을 하자 간호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 인턴 선생님 벌써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의욕적으로 출근하다 보니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한번 들뜨기 시작하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것이 함소담의 특징이었다.

    소담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기…… 제가 뭐 도와드릴 거 없을까요?"

    "어머, 아직 교대도 안 했는데 벌써 도우시게요?"

    소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한이는 분명 ‘서로 도와주자’고 말했다.

    그 말대로 하려면, 자신감을 가지고 환자를 대하는 경험을 조금이라도 더 쌓아 보고 싶었다.

    그래야만 ‘서로’ 도움이 될 테니까!

    "글쎄, 일이 좀 쌓여 있긴 한데…… 괜찮으시면 저쪽 B구역에 있는 환자 좀 봐주시겠어요?"

    "어떤 환자인데요?"

    "요도협착 환자예요."

    소담은 간호사의 말에 스크린으로 걸어가 업무 리스트를 확인했다.

    [B―7] 24687883

    반진호 20 Male : CIC

    [assign] [done]

    ‘반진호……?’

    소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 같은데. 연예인 이름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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