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3화 (13/241)
  • #13 우리 중에 말리그가 있다(4)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인다.

    응급실 한구석.

    덩치가 커다란 30대 남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 앞에는 당황한 소담이가 돌처럼 굳어 있는 것이 보인다.

    "야…… 저기 분위기 왜 저러냐? 소담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본데?"

    중원이 형이 속삭인다.

    남자의 화난 목소리가 이어진다.

    "우리 아버지 양팔을 아주 벌집처럼 쑤셔 놨네! 여기 연국대병원이라 해서 왔더니만 20분째 이게 뭐냐고! 열이 펄펄 끓고 있구만!"

    움찔.

    소담이가 어깨를 움츠린다.

    덩치가 큰 남자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으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다.?

    여차하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다.

    그 광경을 쳐다보던 조진기가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쯧쯧댄다.

    "함소담 기어코 일냈네, 일냈어. 첫 턴도 아닌데 ABGA 정도는 쉽게 해야 되지 않나……."

    그렇게 말하며 빈정거린다.

    ABGA(동맥혈 채혈).

    인턴들의 업무 중 가장 흔한 것이지만, 결코 만만하게 볼 술기는 아니다.

    혈관을 찾기 어려워 한참 헤매다가 환자에게 욕을 먹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소담이가 환자의 팔을 20분 동안이나 반복해서 찌르고 있었다고 하니, 보호자가 열받은 심정도 이해는 간다.

    "답답해서 안 되겠다. 거기 아가씨! 우리 아버지 피 좀 뽑아 주소!"

    남자가 씩씩대며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는다.

    간호사는 당황한다.

    "보호자분, 이건 동맥혈 검사라서 의사 선생님들이 해 주셔야 하는 거예요."

    "뭐? 의사? 피도 제대로 못 뽑는 게 무슨 의사야!"

    "다른 선생님 불러 드릴 테니 그렇게 소리 지르시면 안 돼요."

    간호사도 쩔쩔맨다.

    여차하면 난동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니, 지레 겁부터 먹을 수밖에 없다.

    조진기가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는다.

    "한심하다 한심해. 로얄이면 뭐 해, 저런 간단한 술기도 제대로 못 하는데."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한 말투다.

    듣다 보니 짜증 나네.

    나는 조진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실수할 수도 있지."

    "뭐?"

    "같이 일하는 동기잖아. 강 건너 불구경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내 말에 조진기가 움찔한다.

    하지만 곧 이죽대는 표정으로 대꾸한다.

    "나는 손이 이래서 못 도와주겠는데. 정 그렇다면 네가 도와주지 그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나는 손에 든 것을 잠시 내려 두고, 소란이 일어난 쪽으로 달려갔다.

    소담이는 이미 눈가가 벌게진 채 잔뜩 움츠러들어 있다.

    조금만 두고 있으면 땅끝까지 파고들어 사라질 것 같은 모습이다.

    "잠시만요."

    "엉?"

    나는 소담이와 보호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그가 험악한 표정으로 말한다.

    "당신은 뭐야, 의사야?"

    "예, 의사입니다."

    "여기 연국대 의사들은 원래 이렇게 잘 못해?"

    보호자는 단단히 화가 나 있다.

    나는 친절하게 웃으며 그를 달랬다.

    "죄송합니다. 원래 아버님처럼 풍채가 좋으신 환자분은 혈관 찾기가 좀 어렵기도 해요."

    "뭐? 지금 우리 아버지가 살쪘다고 욕하는 거야?"

    "어휴, 그게 아니라 저희 아버지 생각나서 그래요. 저희 아버지도 체격이 좋으시거든요."

    물론 거짓말이다.

    우리 아버지는 횟집 주인답게 단백질 위주의 식습관이 들어서 체형이 날렵하다.

    그리고 사실 동맥혈 검사는 체형과 크게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 말을 듣고 난 뒤, 보호자의 분노는 다소 사그라들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환자와 눈을 마주쳤다.

    "아버님, 힘드셨죠? 그래도 꼭 해야 하는 검사니까 잠시만 여기 앉아 보세요."

    내 말에 환자는 끙끙대면서도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라포(rapport)라는 말이 있다.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심리적 유대감을 뜻한다.?

    환자가 의사를 믿을 수 있도록 라포를 형성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단계다.

    라포 형성은 치료의 근간이 되며, 이 신뢰를 바탕으로 치료 효과도 달라질 수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내과에서 인턴 생활을 하면서 직접 몸으로 배운 것들이기도 하다.

    "이번엔 제대로 해 주는 거지?"

    옆에서 보호자가 볼멘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는다.

    "만약 이번에도 우리 아버지 고생시키면 병원 뒤집어 버릴 거야!"

    "걱정 마세요."

    말은 자신 있게 했지만, 나도 긴장이 된다.

    과연 소담이가 실패한 것을 내가 성공시킬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나는 스스로 자신감을 북돋았다.

    첫 턴을 병리과에서 보낸 소담이와는 달리, 나는 내과에서 한 달 동안 많은 술기 경험을 쌓았다.

    일단 차근차근 첫 단계부터.

    오른쪽 지혈을 확실하게 하고, 왼쪽 팔을 고정해 놓아야 한다.

    "보호자분, 여기 오른쪽 팔목 좀 꽉 눌러 주시겠어요?"

    나는 보호자에게 부탁했다.

    다행히도 그는 투덜대면서도 내 말을 순순히 따랐다.

    "아버님, 자세 편하세요? 이대로 가만히 계셔야 돼요."

    그렇게 왼쪽 팔을 움직이지 않게 고정해 놓은 뒤, 방금 전에 소담이가 찔렀던 부위를 살펴본다.

    ‘이런…….’

    나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소담이가 이미 환자의 팔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혈종이 생겨 부어 있는 손목을 바라보니 등에 땀이 흐를 지경이다.

    "소담아, 왼쪽 먼저 하고 방금 오른쪽 한 거야?"

    "응……."

    소담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ABGA ― 동맥혈 검사.

    보통 팔목으로 지나가는 요골동맥을 바늘로 찔러 채혈하게 된다.

    우리 몸의 혈관은 동맥과 정맥으로 나눌 수 있는데, 보통 피부에서 볼 수 있는 혈관은 정맥이다.

    동맥은 더 깊숙이 위치하기 때문에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손끝으로 동맥의 박동을 느낀 뒤, 그 부분을 바늘로 찔러야 한다.

    만약 바늘이 혈관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혈관에 상처만 주게 되는 경우, 동맥혈은 정맥과 달리 굉장한 속도로 출혈을 일으킨다.

    피부 깊숙이 있던 혈관에서 출혈이 일어나면 피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큰 덩어리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를 혈종(hematoma)이라고 한다.

    ‘팔목 쪽은 못 쓰겠어.’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손끝으로 박동을 느끼고 찔러야 하는데, 커다란 혈종으로 인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다.

    조금 더 프록시멀(proximal, 몸 중심 쪽 방향) 쪽으로 가서 찬스를 노리는 수밖에 없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한 번에 성공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문득, 내과의 에크모 사건 때 보았던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와, 역시 유주!

    ―선배는 손가락에 초음파라도 달렸습니까?

    <흉부외과 송유주>.

    그 사람은 에크모를 넣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혈관을 찾았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걸까?

    손 기술?

    경험과 지식?

    아니면 단순히 감으로 성공시킨 것일지도 모르지.

    ‘그래. 그 사람은 흔들리는 환자의 혈관도 한 번에 찾았는데…… 나는 제자리에서 벌렁벌렁 뛰고 있는 혈관도 못 찾으면 안 되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승부욕이 샘솟는다.

    나는 머릿속으로 혈관을 상상하며 그려 보았다.

    ‘여기가 혈관이 지나간 곳이고, 윗부분은 펄스(pulse, 맥박)가 아주 살짝 만져진다. 그렇다면 이 사이를 지날 거야.’

    비록 눈으로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지식과 경험, 손끝의 감촉에 의존해서 동맥을 찾는 수밖에 없다.

    "아버님, 잠시 아플게요, 한 번만 참아 주세요."

    푸욱!

    나는 환자의 팔에 바늘을 꽂았다.

    ‘동맥아, 제발 도망가지 마라…….’

    바늘이 조금씩, 조금씩 깊이 들어갈수록 내 긴장감은 더해 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피가 금방 맺히지 않는다.

    동맥이 이 정도로 깊이 있다고……?

    반신반의하면서 바늘을 밀어 넣던 그 순간!

    주사기 끝에 선홍색 동맥혈이 맺혔다.

    ‘찾았다!’

    이 쾌감을 누가 알까?

    비유하자면, 마치 애타게 연모하는 상대로부터 빨간색 카톡 메시지 알림이 떴을 때의 기분이라 해야 하나?

    실린지에 동맥혈이 조금씩 차올랐다.

    왼손을 고정하고 오른손을 살짝 움직여 실린지를 1mm씩 조심스레 당겨 본다.

    마침내 0.5cc가량의 피가 채혈이 되었다.

    이 과정을 환자와 가족들, 그리고 소담이가 지켜보고 있다.

    나는 담담히 바늘을 빼었다.

    "자, 끝났습니다."

    "응? 끝났어?"

    환자의 눈이 커졌다.

    나는 마치 아무렇지 않게 쉽게 끝낸 듯 말했다.

    "요 피 조금 뽑는데 너무 고생하셨어요."

    "아까는 엄청 아프더니, 이번엔 처음에만 아프고 피 뽑는 줄도 몰랐어~."

    환자의 말에, 보호자의 표정이 그제야 밝아진다.

    "이야, 이 선생님 잘하네! 이름이 뭐야? 아까 입구에 칭찬 카드인가 뭔가 있더만, 그거라도 써 줘야겠네!"

    그렇게 말하며 내 이름표를 기웃거린다.

    칭찬 카드는 환자가 인턴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칭찬 카드를 많이 받으면 인턴 점수가 올라간다는 소문이 있다.

    그래서 인턴 점수를 위해 이 칭찬 카드를 환자들에게 구걸하는 인턴들도 있는 모양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여기 선생님도 원래 잘하시는 분인데 오늘은 잘 안됐나 봐요. 그날그날 저희도 잘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거든요."

    "그래, 그래. 이제 속이 시원하네."

    그렇게 보호자와 환자를 진정시켰다.

    소담이와 함께 스테이션 쪽으로 돌아오는데, 무언가 시선이 느껴진다.

    여봉철 선생이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초음파 가져오고 있었는데, 혈관 우째 찾았노?"

    "손으로 찾았습니다."

    "이야, 제법이네. 손의 감촉만으로 해결해 버렸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봉철 선생은 내 어깨를 살갑게 주무른 뒤에 한마디 덧붙였다.

    "잘했다. 그래도 다음부턴 초음파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라. 한 번에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또 실패했으면 난리 났다 아이가."

    "예.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여봉철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지방대학교 출신이라고 못 미더워하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여봉철의 신임을 얻었으니, 일단 응급실 인턴 생활의 시작이 좋은 셈이다.

    "그리고 함소담."

    "예."

    "니는……."

    여봉철은 말을 꺼내다 말고 멈추었다.

    나는 슬쩍 옆쪽을 쳐다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차마 못 보겠다.

    마치 나라 잃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담이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다.

    "남들 보는 데서 울지 말고, 화장실 갔다 온나."

    "예."

    소담이는 벌게진 눈으로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사라졌다.

    여봉철은 한숨을 푹 쉬었다.

    "에효…… 니 동기 앞으로 잘 챙겨라. 자칫하면 말리그 취급당하겠다."

    여봉철의 말에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말리그>.

    말리그넌시(malignancy)에서 유래된 말로, 악성 종양을 뜻한다.

    하지만 의사들끼리 일상에서 ‘말리그’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뜻은 조금 다르게 활용된다.

    조직 안에서 평판이 나쁘거나, 함께 일하기 싫은 동료를 비하할 때 말리그라고 부른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말리그’라고 불리는 것은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소담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소담 언니 좀 잘 챙겨 주세요."

    "누구? 함소담?"

    연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햇살이 따사로운 4월 둘째 주.

    점심시간에 나를 따로 밖으로 불러내서 한다는 얘기가 대뜸 이런 얘기다.

    나는 연서가 사준 바나나 맛 우유의 뚜껑을 따며 말했다.

    "갑자기 걔는 왜?"

    "안타까워서요."

    "안타까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록 첫 주부터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건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사실 소담 언니 대학 시절부터 많이 힘들어했어요. 동기들 사이에서도 은근히 따돌림당했거든요."

    "아, 그래?"

    그건 미처 몰랐다.

    하긴 소담이의 성격상, 주위 친구들과 원만히 지냈을 것 같지는 않다.

    연서의 말이 이어진다.

    "실습 때도 실수 많이 해서, 로얄인데 저것도 못하냐…… 그런 뒷말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점점 더 위축되는 모양이에요."

    아아.

    뭔지 대충 알 것 같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으면 주르륵 미끄러지게 되어 있다.

    특히 소담이처럼 소심한 성격이라면, 그런 일을 몇 번 겪고 나면 점점 더 쪼그라들었을 것이다.

    나는 빵을 씹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내 한 몸 챙기기도 바빠서 남들까지 챙겨 줄 자신이 없다."

    "와, 매정해."

    "물론 옆에서 조금 도와줄 수는 있지.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잘해야 돼."

    "그건 그렇지만……."

    연서는 입술을 삐죽였다.

    "걱정되니까 그렇죠. 자칫 큰 실수라도 할까 봐."

    큰 실수라.

    물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인턴이 할 수 있는 일은 어차피 한정되어 있다.

    환자를 죽이네 마네 하는 실수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남은 기간도 무난하게 흘러가지 않을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인턴 한 달 동안 설마 무슨 일이……."

    그렇게 대답하려고 할 때―

    눈앞이 툭 하고 깜깜해졌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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