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2화 (12/241)

#12 우리 중에 말리그가 있다(3)

"아야야……."

"선생님, 여기 좀 빨리 봐주세요."

"스트로크(stroke, 뇌졸중) 환자야, 신경과 빨리 콜해 줘!"

"저희 아버지가 더 먼저 왔으니, 먼저 봐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6번 베드에 엠아이(MI, 심근경색) 의심 환자예요!"

응급실 곳곳이 소란스럽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ER 베드에는 많은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배가 아픈 20대 남성 환자.

변비가 심해서 실려 온 50대 여성 환자.

어지럼증으로 구토 증세를 보이는 30대 직장인 환자.

옆집 개에게 물린 10살 초등학생 환자.

공사장에서 손가락을 다친 30대 외국인 노동자 환자.

등등…….

정말 다양한 환자들이 많다.

비슷비슷한 증상을 가진 환자들이 모여 있던 내과 병동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이곳에서는 증상이 모두 제각각인 것이다.

100명의 환자가 있으면, 100개의 증상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응급실이다.

"자, 그럼 시작해 보까?"

척척척!

여봉철 선생은 응급실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잽싸게 그 뒤를 따라갔다.

"배가 마이 아픕니까?"

"예……."

"자 무릎 굽혀 보시구요, 어데가 아픕니까. 여기요?"

"거기는 안 아픈데…… 아야…… 위쪽만 아픈 거 같아요."

복통을 호소하던 환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환자의 증상을 살피던 여봉철은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환자분은 엑스레이랑 쏘노(sono, 초음파)에서 특이 사항 없고, 랩(lab, 피검사) 결과도 괘안커든? 압베(맹장염의 통칭)는 아닌 것 같고, 아마 위염일 끼다."

"예."

"환자분, 혹시 오른쪽 아랫배가 아프면 다시 와야 합니다. 맹장염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환자의 증상을 판단하고 가장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이래 간단한 환자들은 느그들이 프라이머리로(primary, 초진으로) 봐야 될 수도 있다. 알긋나?"

"네!"

척척척!

곧바로 다음 환자로 걸어간다.

여봉철 선생의 진단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어머니, 관장 함 해야겠네예. 깔끔하게 비우고 가입시더."

"귀 쪽에 약간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이비인후과에서 봐 드릴 겁니더."

"다행히 개한테 물린 상처가 깊지는 않네예, 소독하고 파상풍 주사 놔 드릴게예."

"한국말 알아듣지요? 상처가 조금 깊어서 성형외과에서 내려와서 꿰매 드릴 겁니더."

우리는 정신없이 여봉철 선생을 따라다니며, 응급실 곳곳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마치 바람을 몰고 다니는 것처럼 거침이 없는 모습이다.

아무래도 병동에서만 일하던 의사들에 비해 활동적인 느낌도 든다.

‘멋있다.’

이게 바로 3년 차 EM(응급의학과) 의사의 포스인가?

역시 한 분야에서 능숙하게 일하는 전문가는 빛이 나기 마련이다.

나는 여봉철 선생을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뭘 보노?"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 선에서 치료할 수 있으면 치료하고, 다른 과에 노티(notify) 할 일 생기면 최대한 빨리 연락하는 기다. 알았나?"

"예!"

우리는 우렁차게 대답했다.

여봉철은 벽면에 설치되어 있는 모니터를 가리켰다.

"인턴들은 기본적으로 여기 모니터에 올라오는 워크 리스트 하나씩 맡아서 하면 된다."

우리는 그의 시선을 따라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컥……."

중원이 형이 벌써부터 숨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근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미 리스트가 한가득이다.

서울 한복판에 응급 환자가 이렇게 많았나 싶기도 하다.

괜히 여봉철 선생이 ‘아포칼립스’라며 겁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와, 일이 많아서 막 벌써부터 행복하나?"

"예……."

"나중에 누가 더 일 많이 했나 이런 걸로 점수 매기는 건 아니니까, 서로 맡겠다고 싸우지 말고."

"예!"

"하긴 바빠 가지고 느그끼리 싸울 시간도 없을 끼다."

긁적긁적.

여봉철은 펜으로 머리카락을 긁더니 곧 우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선한이랑 소담이는 OS(정형외과)랑 TS(흉부외과)에서 내려오면 어시(assistant, 보조) 서고, 나머지 둘은 리스트에 올라온 일들 알아서 하나씩 해결해라."

"넵!"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타다닥!

나는 소담이와 함께 바삐 움직였다.

수십 명의 환자들을 케어하며 상처를 소독하고, 여러 술기들을 시행하며, 다른 과에 연락을 돌리고, 채혈을 하거나 검사를 했다.

이렇게 무려 24시간을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 곳이 응급실이다.

정말 전쟁터가 따로 없다.

* * *

"휴우."

간신히 오전 일과를 끝마쳤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지만, 잠깐 교대로 밥을 먹을 시간 정도는 생겼다.

소담이와 나는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단둘이 있을 때는 조금 어색하지만, 그래도 조진기와 페어인 것보다는 훨씬 낫다.

뭐, 첫날이니까 앞으로 조금씩 친해지면 되겠지.

"구내식당 시간 맞출 수 있어서 다행이네."

"응."

소담이는 짧게 대답한 뒤, 밥을 깨작거렸다.

힐끗―

나는 맞은편에 앉은 소담이를 바라보았다.

……참 희한한 인상이다.

분명 부모님의 관심을 듬뿍 받고 자랐을 것 같은데.

표정은 늘 우울하며, 어딘가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

일단 아무 말이나 건네 볼까.

"많이 먹어."

"너도."

"내 거도 좀 먹어 볼래? 새우튀김 한 조각 나눠 줄까?"

"아니."

깨작깨작.

……참 어색하네.

무슨 말을 해도 단답형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할 겸,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 보았다.

"첫 턴에 어디 돌았어?"

"병리과."

"그랬구나. 나는 내과에 있었거든."

"응."

"거기도 나름 재밌긴 했는데, 응급실 와서 다양한 환자들 보니까 더 재밌네."

"……재밌다고?"

움찔―

소담이의 눈썹이 꿈틀댔다.

줄곧 무표정했던 얼굴 위로 감정이 드러난다.

"뭐가 재밌어?"

"응?"

"하루 24시간 동안 햇빛도 못 쬐고 환자들한테 시달려야 되는데…… 이게 어떻게 재밌어?"

돌아오는 말이 은근히 날카롭다.

작은 목소리 안에 가시가 가득가득 박혀 있는 느낌이랄까?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소담이를 바라보았다.

마치 가슴에 꾹꾹 눌러 담았던 말을 뱉고 있는 것 같다.

"환자들 피 만지고, 배설물 만지고, 그러면서 조금만 잘못해도 욕먹고…… 나는 하나도 재미없어."

"의사 업무가 싫어?"

"진짜 싫어. 특히 환자 보는 거 개극혐이야."

단호하게 대답한다.

이 친구 보기보다 한 성깔 하네.

소담이가 흠칫하며 변명한다.

"미안. 나도 모르게 말이 거칠어져서."

"아냐. 계속해."

나는 피식 웃었다.

아무리 폐쇄적이고 소심한 친구라도 내 앞에서는 경계심을 푸는 경우가 예전부터 많았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편하게 생겨서 그런가?

소담이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그중에서도 응급실이 제일 싫어. 어제 서문대병원에서 일어난 일도 그렇고. 뉴스 봤어?"

"무슨 뉴스?"

"마침 저기 나오네."

힐끗―

소담이는 젓가락으로 식당 TV를 가리켰다.

[경기도의 한 병원, 술에 취한 환자가 응급실 의사에게 전치 3주의 상해를 입히는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CCTV에 찍힌 흐릿한 화면이 재생된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환자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의사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장면이다.

퍼억!

의사가 고꾸라진다.

간호사들이 말리려 하지만, 환자의 무차별적인 폭행은 멈출 줄을 모른다.

퍼억, 퍼억!

의사가 바닥에 쓰러진다.

뒤늦게 달려온 안전 요원들이 환자를 뜯어말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멈추었다.

……끔찍한 장면이다.

비상식적인 일이지만, 실제로 응급실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환자와의 충돌이 가장 자주 일어나는 곳이 바로 응급실이니까.

"무섭지?"

"무섭네."

"솔직히 왜 다들 의사가 되고 싶어서 안달인지 모르겠어. 온몸이 부서져라 환자를 치료해 봤자, 돌아오는 건 저런 취급인데."

그렇게 말하며 소담이는 피식 웃었다.

나는 물었다.

"그럼 넌 왜 의사가 됐어?"

"부모님이 시켜서."

"그게 전부야?"

"응."

단호히 대답한다.

나는 눈앞의 소담이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아득바득 의사가 되고 싶어 했던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것 같다.

"난 환자 보는 건 적성에 안 맞아. 적당히 인턴 하다가 환자 안 보는 과로 넘어갈 거야."

소담이는 그렇게 자조적으로 말한다.

물론 의사가 되었다고 모두 적성에 맞는 것은 아니다.

단지 수능 성적이 좋아서―

혹은 부모님이 시켜서―

그렇게 의대 6년을 정신없이 달려 졸업하고 의사가 된 경우가 어찌 보면 더 많다.

"뭐, 어쨌든 한 달 동안 최대한 민폐 안 끼치도록 할 테니까 걱정하지는 마."

그렇게 말하니 나도 더 할 말은 없었다.

그래도 말문이 트이고 나니, 생각보다는 이야기하기 편한 상대였다.

마냥 폐쇄적이고 소심한 성격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하루 만에 꽤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소담이가 내 쪽 밥그릇을 빤히 쳐다본다.

"근데 나 그거 먹어 봐도 돼?"

"뭐?"

"새우튀김. 아까 하나 준다며."

"아까 안 먹는다며?"

"다시 보니까 맛있어 보여서…… 나도 돈가스 하나 줄게. 싫음 말구."

소담이가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나는 피식 웃고 새우튀김 하나를 덜어 주었다.

좀 특이한 성격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솔직하고 담백한 녀석인 것 같다.

* * *

응급실 1주 차.

"흐음……."

여봉철은 의국실 PC에 앉아 모니터를 쳐다본다.

그의 눈앞 엑셀표에는 인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월말에 평가해도 되지만, 미리부터 꼼꼼하게 주 단위로 성과를 체크하는 것이 여봉철의 습관이었다.

물론 혼자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턴 평가는 다른 레지던트들의 평가까지 총합해야 하니까.

하지만 실질적으로 여론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여봉철이다.

4년 차 치프들의 신뢰를 온몸에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괜히 농담 삼아 응급실의 실세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타다닥.

여봉철은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조진기 C―

: 부상으로 정상적인 업무 불가능

: 자기 관리 미흡

: 불성실

조진기는 손을 다쳤으니 평가할 가치도 없다.

열심히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고 선배들에게 알랑거리기 바쁘다.

그런 녀석에게 평가를 잘 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오중원 B

: 눈치가 빠름

: 업무 능력 준수

: 요령 부리는 경향이 있음

오중원은 뺀질거리는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유일하게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인물이다.

역시 나이에서 나오는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일까?

순발력이 중요한 응급실에서, 중원은 나름대로 무난히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깐깐한 여봉철이 ‘B’로 적어 놓은 이유다.

‘그리고 함소담은…….’

가장 골치가 아프다.

로얄 중의 로얄.

하지만 업무 능력은 다소 떨어진다.

분명 머리는 좋은 것 같은데, 자꾸만 실수를 반복한다.

자신감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적성에 맞지 않는 걸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지. 교수 딸이 아니라 대통령 딸이라도 평가는 냉정해야 맞지."

타다닥.

여봉철의 손이 움직인다.

함소담 C

: 환자 응대 미흡

: 술기 미흡

: 자신감이 없어 보임

마지막은 신선한이다.

긁적긁적.

"임마는 아직까지 파악이 잘 안되네."

분명 생각보다는 잘해 주고 있다.

일운대 출신이라 해서 걱정했더니만, 오히려 웬만한 명문대 출신보다 낫다.

그리고 가장 높게 평가될 만한 것은 특유의 성실성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눈에 띌 정도로 엘리트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애매하다 애매해."

신선한 B―

: 성실성 높음

: 그 외의 능력은 평가 보류

일단은 이 정도.

아직까지 A를 줄 만한 인물은 없다고 보인다.

물론 아직 초반이기에,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겠지만.

"사고나 치지 마라."

여봉철이 엑셀표를 닫으며 중얼거렸다.

응급실에서 인턴들은 사고만 안 쳐도 중간은 가니까.

* * *

응급실 2주 차.

바쁜 시간이 흘러간다.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일은 줄어들기는커녕 계속해서 늘어난다.

마치 끝도 없는 디펜스 게임을 하는 것 같다.

나는 모니터 앞에서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들여다보았다.

"중원이 형! 이거 블러드 컬처(blood culture, 혈액배양검사) 3쌍 끝난 거예요?"

"아, 그거 하러 가는 길에 갑자기 드레싱 해야 할 거 생겼거든? 저기 컬처 셋(culture set) 만들어 놨으니까, 시간 되면 해 줘!"

"누군데요?"

"저기 B 구역 안쪽에 있는 할머니야."

나는 중원이 형이 가리키는 환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고령의 환자로, 딱 봐도 혈관을 찾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 선한아, 부탁 좀 한다잉."

중원이 형이 눈을 찡긋했다.

왠지 까다로운 작업을 자꾸만 나한테 미루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일 거야, 아마도.

"그나저나 소담이는 아까부터 안 보이는데, 어디 갔냐?"

"ABGA(동맥혈 검사) 하러 갔는데 감감무소식입니다~"

돌돌돌―

팔 깁스를 한 채로, ECG 기계를 밀고 가던 진기가 대답한다.?

조진기는 동의서 받기, 심전도 찍기와 간단한 드레싱 업무를 맡고 있다.

당연하게도 다른 인턴 세 명의 업무량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야…… 진기 너 팔에 초록색 깁스 보일 때마다 혈압 올라 미치겠다!"

"억울하면 형도 술 먹고 한번 구르시든가."

"어휴, 말을 말아야지. 아무튼 우리 업무 리스트 지우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아, 집중하자!"

중원이 형이 우리를 독려한다.

그때 A 구역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야!"

쩌렁쩌렁!

누군가 응급실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분위기가 험악하다.

우리는 일제히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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