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1화 (11/241)

#11 우리 중에 말리그가 있다(2)

……망했다.

이건 확실히 망했다.

나는 휴게실에서 사다리 타기의 결과를 보며 좌절했다.

응급실에 배정되는 인턴은 총 8명으로, 우리끼리 4명 / 4명을 나누어 24시간씩 교대로 근무해야 한다.

앞으로 한 달 동안 4명이서 운명 공동체가 되어 근무를 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멤버들의 상태가, 아무리 봐도 암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오중원.

조진기.

일단 이 2인조부터 문제다.

"아, 너 손 어쩔 건데."

"어쩔 수 없죠. 손 깁스까지 했는데 빡센 일 시키겠어요? 이번 달은 꿀 좀 빱시다. 흐흐."

"아오 이 얍삽한 놈."

중원이 형이 열을 낸다.

나는 한심한 눈빛으로 조진기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힘들기로 유명한 응급의학과인데, 동기 중 한 명이 손을 못 쓰다니?

말 그대로 대참사나 다름없다.

가뜩이나 일은 많은데, 전력이 4분의 3으로 줄어든 셈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지난번 술자리에서 안 다치도록 도와줄 걸 그랬나?’

오죽하면 그런 후회까지 들 정도다.

"야, 선한아. 우리 같은 조다."

"저희가 힘내야겠네요."

나는 중원이 형에게 대답하며 조진기를 힐끗 바라보았다.

조진기는 못 들은 척 내 눈을 피하며 휴게실에서 사라졌다. 저 놈은 그날 이후로 나를 피한다.

그때 중원이 형이 말한다.

"무슨 소리야. 나는 너만 믿고 갈 건데."

"예?"

"형 나이 들어서 힘들어. 너 에이스라며? 이번 달은 너만 믿고 간다!"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중원이 형도 어지간히 뺀질거리는 타입이라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다.

‘아, 이거 안 좋은데…….’

문득 대학생 시절 생각이 난다.

실습조를 나눌 때 팀 운이 안 좋아서 결과가 망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인턴 평가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랑 같은 조가 되느냐가 학생 때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텐데.

역시 이번 달도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저기…… 좀 지나갈게."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하기 위해 약간 시선을 내려야 했다.

……햄스터?

첫인상은 그런 느낌이었다.

로얄 함소담.

부잣집 딸이라면서, 밥을 잘 못 먹고 자라기라도 했는지 키가 내 가슴 언저리밖에 오지 않는다.

약간 움츠러든 어깨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전체적으로 작고 그늘진 인상이다.

"어, 네가 함소담이었지?"

"……."

"한 달간 같이 지내게 됐네. 앞으로 잘해 보……."

내가 막 손을 내밀려는 순간.

휘잉―

함소담은 움츠린 자세 그대로 내 옆을 지나쳤고, 내 손은 허공에서 갈 곳을 잃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네 명이서, 과연 험난한 EM(응급의학과) 생활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벌써부터 앞날이 걱정된다.

* * *

그날 저녁.

모든 인계를 받고 난 뒤 병원 지하의 헬스장으로 향했다.

역시 대한민국 최고 연국대병원답게, 의료인들을 위한 시설도 제법 잘 갖추어져 있다.

위이잉―

탁, 탁, 탁.

러닝머신 위를 달린다.

100m.

200m.

300m.

아무 생각 없이 한바탕 뛰고 있자니 무거웠던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2km쯤 쉬지 않고 달렸더니, 비로소 잡생각이 땀방울과 함께 증발하여 사라진다.

"휴우."

나는 쿨다운 버튼을 누르고 머신에서 내려왔다.

그래, 까짓것.

팀원들의 상태가 어떻든 나만 잘하면 되겠지.

그렇게 샤워실에서 막 씻고 나오는데, 탈의실에서 나체의 여봉철 선생과 마주쳤다.

두둥!

깜짝이야.

산도적인 줄 알았다.

험상궂은 인상에 조금 놀랐지만, 활기차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 누고?"

"예. 내일부터 EM에서 일하는 인턴 신선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맞나."

여봉철은 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에 수염 자국이 덥수룩할 뿐만 아니라 가슴털까지 수북해서 무척 와일드한 인상이다.

딱 봐도 다혈질 같기도 하고.

하지만 소문으로는, 한 번 친해지고 나면 살갑게 지낼 수 있는 성격이라고 한다.

앞으로 1개월 동안, 여봉철 선생을 비롯한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친해질 수 있다면 더 좋고.

그런데…… 하필이면 벗은 채로 만나니까 뻘쭘하긴 하다.

옷이라도 입고 인사할걸.

"이름이 뭐라꼬?"

"신 선 한 입니다."

"니가 일운대 출신이라 캤던가?"

"맞습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처억!

여봉철 선생이 탈의실 로커에 기대며 짐짓 분위기를 잡고는 말한다.

"지방대 출신이고 뭐고, 내는 신경 안 쓴다. 내도 촌놈 출신이라 서울 놈들한테 무시받는 설움이 뭔지 잘 아니까."

"감사합니다."

"대신……."

그는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리바리하거나 일 못하는 건 못 참는다. 큰 거 안 바랄 테니 딱 1인분만 해라."

"1인분 이상 하겠습니다."

"맞나?"

"예."

"마인드가 좋네."

그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내 등짝을 짝 치고 지나갔다.

"섀끼. 몸도 좋네."

나는 씩 웃으며 의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왠지 여봉철과는 성격이 맞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나의 응급의학과 인턴 첫날이 시작되었다.

* * *

<응급실>.

줄여서 ER(Emergency Room)이라고 부른다.

병원 바깥에서 급작스러운 질환이 발생한 환자들은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응급실을 방문한다.

여기에 덧붙여, 연국대병원은 외래에서 보내지는 환자들의 치료 역시 담당해야 한다.

하루 10,000여 명의 외래 환자 중에서 급한 환자들이 모두 응급실로 보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선입견과는 달리 평일 낮에 훨씬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 바로 응급실이다.

아침 7시 40분.

아직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서 조진기와 마주쳤다.

"일찍 왔네."

"어어."

그는 황급히 내 눈을 피하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못 봐주겠다 정말.

내가 말했다.

"언제까지 어색해할 거냐?"

"응?"

"앞으로 한 달 동안 얼굴 볼 사이인데, 친해지진 않더라도 불편하지는 않게 지내자."

"그…… 그럴까?"

조진기가 어색하게 웃는다.

결국 끝까지 사과 한마디 없는 꼴 보기 싫은 놈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먼저 분위기를 풀지 않으면, 한 달 내내 저따위로 행동할 테니까.

곧 소담이와 중원이 형도 회의실에 도착했다.

"어, 너희들 일찍 왔네."

"뭘 그렇게 사 왔어요?"

"얌마, 첫날이니까 센스 있게 비싼 빵이랑 음료수 좀 사 왔지! 이게 바로 사회생활이라는 거다."

중원이 형이 히죽 웃으며 편의점 봉투에서 무언가를 잔뜩 꺼내 놓는다.

이제 곧 응급의학과의 레지던트들과 펠로우, 교수들을 만나게 될 자리이니 첫인상이 중요할 것이다.

3월 첫 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긴장된다.

나는 아까부터 말이 없는 소담이를 힐긋 바라보았다.

"……."

소담이는 별다른 표정이 없다. 그늘진 머리카락 사이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때 문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

"캬, 봄은 봄인갑다. 날씨 직이네."

"여 선생님, 봄 타세요?"

"여 선생이라 카지 말라니까네. 남들 들으면 여자 선생님이라고 오해한다 아입니까."

"그럼 저희도 여봉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에헤이, 누구 혼삿길 막을라꼬."

곧 산도적 같은 여봉철과, 깔깔 웃는 간호사들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 인턴들 와 있었나."

"넵!"

"에효, 이번 인턴들은 언제 또 사람 만들어 보내나…… 응?"

여봉철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는 회의실에 놓여 있던 오렌지 탄산 음료수를 들고 버럭 성질을 냈다.

"마! 이거 뭐꼬!"

"예?"

"음료수를 사 와도 하필이면…… 오늘 뭐 응급실에 환자 미어터지라고 고사 지내는 거가?"

그제야 음료수를 사 왔던 중원이 형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환타>.

의사들 사이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다.

다름 아닌 ‘환자를 탄다’는 뜻.

즉 환자가 너무 많이 몰려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상황을 표현하는 은어인 것이다.

"첫날부터 환타가 뭐꼬 환타가. 오늘 환자 미어터지면 다 인턴 느그들 때문이다. 알긋나!"

여봉철이 으르렁거리자 간호사들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는다.

왠지 시작부터 살짝 꼬이는 듯한 느낌인데.

"이야~ 우리 기차 화통 여봉철 선생님 또 시작이네."

"아침부터 너무 열 내지 마라. 인턴들 첫날인데 겁먹고 도망가겠다."

응급의학과 선생님들이 웃으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곧 사람들이 가득 찼다.

우리는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 * *

회의실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연국대병원의 응급실은 24시간 교대근무를 기본으로 한다.

아침 8시부터 9시까지는 전날 근무자들과의 교대가 이루어지는 시간이며, 이때 환자의 인계가 이루어진다.

짝짝!

응급의학과 과장 신승우 교수가 손뼉을 치며 말한다.

"그럼 첫날이니, 우리 인턴 선생님들 소개 좀 받아 볼까?"

"네!"

나를 비롯한 인턴들은 벌떡 일어났다.

교수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소담이가 먼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턴 함소담입니다."

"어르신은 건강하신가?"

"예?"

대뜸 내밀어진 교수의 질문에, 소담이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 말이야."

"아…… 예. 고향에서 요양 중이십니다."

"은사님이라 한번 찾아뵈어야 하는데 쉽지가 않네. 안부 인사 꼭 전해 드렸으면 좋겠어."

"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자네는 엄마를 더 닮은 것 같네? 어릴 땐 아빠를 닮았던 것 같더니만. 허허허."

한동안 친근한 대화가 이어진다.

와 씨…….

저게 바로 3대째 의사 가문의 위엄인가?

함소담이 로얄 중의 슈퍼 로얄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계급 차이!

하늘 같은 교수님이 마치 친척처럼 대하는 것을 보니 비로소 실감이 난다.

교수의 말이 이어진다.

"자식이 잘 커서 이제 의사로서 첫발을 내딛고 있으니, 부모님 기대가 아주 크겠어. 앞으로 열심히 잘해 봐."

"……예."

소담이는 애써 대답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경직되어 있는 것 같다.

약간 불편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들만의 긴 대화가 끝난 뒤, 다음 차례로 중원이 형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턴 오중원입니다!"

"자네는 나이가 좀 있어 보이네?"

"서른둘입니다."

"어, 의전원 출신인가? 열심히 하도록."

더 이상의 코멘트는 없었다.

뭐야, 너무 차별대우 하는 거 아냐??

로얄 아닌 인턴들은 서러워서 살겠나 이거.

"인턴 조진기입니다!"

"자네는 손이 왜 그래?"

"어 그게……. 불의의 사고로 다쳤습니다!"

"의사가 손 다치면 안 되지. 앞으로 주의하도록 해."

얼굴이 벌게진 조진기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음은 내 차례다.

"인턴 신선한입니다."

"응, 그래요. 이렇게 네 명인가?"

뭐야, 끝이야?

나는 심지어 아무런 코멘트도 없다.

처음부터 로얄인 함소담한테만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노골적인 차별대우에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다들 한 달 동안 잘해 주고, 열심히 말고 잘해야 됩니다."

그렇게 교수의 말이 마무리되었다.

"자, 그럼 오늘 하루도 다들 수고하자고."

"예!"

우리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봉철 선생은 펜으로 머리를 벅벅 긁적이고는 말했다.

"인턴 느그 넷!"

"예!"

"따라온나. 인계는 받았겠지만, 응급실 대략적으로 설명해 줄께."

우리는 곧 여봉철 선생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두근, 두근.

곧 내 머릿속에서 방금 전의 일들은 모두 지워졌다.

드디어 응급실 첫 경험이다.

그렇게 기대하며 뒤따라가고 있을 때…….

"느그, 아포칼립스(apocalypse)가 뭔 줄 아나?"

"예?"

갑자기 여봉철이 툭 하고 묻는다.

모두들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중원이 형이 이마를 긁적이다 대답했다.

"그…… 세계 멸망, 뭐 그런 거 아닙니까? 막 위에서는 불기둥이 떨어지고 밑에서는 지옥문이 열리고……."

"잘 아네."

여봉철은 고개를 끄덕인 뒤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웰컴 투 아포칼립스."

그리고 응급실로 이어진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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