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미래가 보인다(3)
"선한 쌤, 이제 채혈 완전 잘하시네요."
"그래요?"
"그럼, 딱 보면 알죠. 술기(術技, procedure)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대충 첫 턴에서 판가름이 나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치켜세운다.
술기란?
의사들이 사용하는 의료 기술의 총칭이다.
작게는 피를 뽑거나 소변줄을 넣는 행위부터 크게는 위절제술, 폐절제술과 같이 큰 수술도 술기의 영역이다.
정확하고 섬세한 술기는 환자의 치료 결과를 아예 바꿔 놓을 수 있다.
작은 술기에 능통하지 못한 사람이 큰 술기를 잘해 낼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그 과정은 인턴 때부터 시작된다.
물론 수많은 연습을 거쳐 술기의 경지를 높일 수 있지만, 그 천장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나 공 열심히 찬다고 메시가 될 수 없는 법이니까.
나는 슬쩍 물었다.
"저는 잘하는 편이에요?"
"선한 쌤은……."
간호사가 주위를 살펴보더니 엄지를 척 내밀며 속삭인다.
"솔직히 제가 여태껏 본 의사 중에서 제일 손 좋아요."
"……!"
의사에게 ‘손이 좋다’는 것은 최고의 칭찬이다.
특히 나처럼 외과 쪽을 지망하고 있는 의사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동안 많은 의사들을 보아 왔던 간호사 파트장님의 말이니, 분명 빈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환자 대하는 것도 능숙한 것 같고. 아마 어느 과를 가든 좋은 의사가 될 거예요."
"와……."
갑자기 한꺼번에 칭찬 폭탄을 맞았더니 기분이 얼떨떨하다.
나는 양손으로 눈을 덮었다.
"왜 그래요?"
"수간호사 선생님한테 칭찬받았더니……. 감동받아서 눈물이 나오네요."
"하여튼 거짓말도 잘해."
나는 손을 치우며 씩 웃었다.
이제 병동 간호사들과도 꽤 친해졌다.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생각을 하니 아쉽기도 했다.
"선한 쌤, 다음 턴 어디라고 했죠?"
"저 EM(Emergency Medicine, 응급의학과)이요."
"내과 다음에 바로 응급? 처음부터 힘든 곳만 골라서 돌아다니네."
"그러게 말입니다."
"파이팅! 종종 얼굴 봐요."
"넵!"
나는 그동안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제 곧 새로운 전쟁터에 투입될 예정이다.
그렇게 간호사들과 인사를 주고받고 스테이션을 나서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 세운다.
"야. 신선한."
"예?"
"잠깐 따라와."
누군가 했더니 김뱀이다.
막바지라고 해서 방심할 수 없다.
비록 한풀 꺾였다곤 하지만, 어쨌든 한 달 내내 인턴들에게 까칠했던 인간이다.
갑자기 또 어떤 말로 나를 괴롭힐지 모른다.
한참 긴장하며 그를 따라갔더니 김뱀의 입이 열린다.
"뭐 먹고 싶어?"
"예?"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이건 예상 못 했다.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봐?
데이트 신청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멀뚱히 쳐다보자, 김뱀이 설명을 덧붙인다.
"오늘 페어웰 있는 거 알지?"
"아아,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턴 페어웰.
월말마다 이루어지는 마무리 회식이다.
한 달을 주기로 인턴들은 과를 옮기게 되고, 레지던트들도 파트를 순환하기 때문이다.
이때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게 되며, 간혹 펠로우나 교수가 참석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인턴들을 위한 쫑파티라고 할 수 있다.
"빽당(백업 당직)은 구해 놨어?"
"네, 다른 친구한테 부탁해 놨습니다."
"그래. 아무튼 내가 이번 페어웰 예약 담당이라 식당을 잡아야 하는데……."
김뱀의 말이 끝나기 전, 내가 잽싸게 물었다.
"제가 예약해 놓을까요?"
"아니아니, 태도는 좋은데. 내가 예약하면 되니까 먹고 싶은 메뉴나 말해 보라고."
"제가 예약해도 되는데요."
"아니 됐고. 먹고 싶은 거 뭐냐고."
"다 같이 가는 거니까 다들 좋아하는 음식으로 해야……."
"네가, 처먹고 싶은, 음식, 대라고."
김뱀의 말투에서 슬슬 짜증이 묻어난다.
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이럴 땐 그냥 빨리 대답하는 게 최고다.
"고기는 다 잘 먹습니다."
"그러니까 많고 많은 고기 중에서 뭐가 제일 좋냐고!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물고기, 많잖아!"
김뱀의 인내심이 폭발한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역시 스테이크가 좋지 않을까요?"
"그래."
그제서야 버럭 했던 김뱀의 분노가 수그러들었다.
……설마 이것도 나를 챙겨 주고 있는 건가?
저번에 음료수 캔 던져 준 것처럼.
머쓱해하는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은데, 거참 인생 피곤하게 산다.
이 양반은 쓸데없이 까칠한 말투만 고치면 훨씬 나을 텐데.
"뭘 봐?"
"아닙니다."
나는 빙긋 웃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성격을 대충 알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김뱀이 물었다.
"너, 외과 가고 싶다고 했다면서?"
어라? 벌써 소문이 났나.
아무래도 이놈의 병원 안에는 비밀이 없는 모양이다.
"다행이네. 내과 온다고 헛소리했으면 반쯤 죽여 놓으려고 했더만."
"내과도 경험해보니 정말 매력 있는 것 같습니다."
"꺼져. 오지 마. 안 받아."
김뱀이 웃는 나를 째려본다.
그러다가, 머뭇거리는 손길로 툭 하고 내 어깨를 친다.
"다른 과 가서도 열심히 해라."
"예!"
"내 동기들한테 너 빡세게 굴리라고 얘기해 놓을 테니까 각오하고."
김뱀은 으르렁거린 뒤 사라졌다.
나는 피식 웃었다.
참 인생 알 수 없는 일이다. 김뱀과 우호적인 관계가 되다니, 상상도 못 했다.
* * *
그렇게 3월이 끝났다.
페어웰이 끝난 날, 올해의 첫 봄비가 내렸다.
늦은 밤, 빌딩 숲 사이로 비인 듯 눈인 듯 애매하게 얼어 버린 물방울들이 춤을 춘다.
나는 취기가 남아 있는 눈으로 그 궤적을 쫓으며, 오랜만에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다.
의사 생활?
다 사람 사는 사회다.
그 안에서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겠지만, 나는 어떻게든 잘해 낼 것이다.
140명의 인턴과 1천 명이 넘는 의사들…….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내 자리 하나를 만들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다.
궁금하다.
내 앞날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미래가 보인다 어쩐다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으니까.
원래 아주 가려진 것보다, 귀퉁이만 살짝 보이는 그림이 훨씬 궁금한 법이니까.
#우리 중에 말리그가 있다(1)
응급실.
이곳은 <병원의 대문(大門)>이라 불린다.
가장 급한 환자들을 치료한 뒤 병원의 다른 곳으로 뿌려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곳에는, 모든 임상 분야에 걸쳐 넓은 지식을 가진 의사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다.
<응급의학과 3년 차, 여봉철>
그 역시 그러한 전문가들 중 하나였다.
이제 갓 서른이 넘었지만, 얼굴에 수염 자국이 가득한 탓에 나이에 비해 훨씬 늙수그레해 보인다.
"선생님, B 구역에 fibular fracture(비골 골절) 환자가 언제 의사 선생님 볼 수 있냐고 하는데요?"
"봐야 될 환자들이 산더미인데…… OS 애들 아직도 안 내려왔어요?"
"거신사거리에 TA 환자 5명 방금 도착했어요! 어떻게 할까요?"
3월의 마지막 날.
응급실은 전쟁터였다.
인근에서 갑자기 외상 환자가 네 명이나 실려 오는 바람에 평소보다 훨씬 바빴다.
이럴 땐 상황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이 중요하다.
피투성이의 환자들 사이에서, 팔을 걷어붙인 여봉철이 말했다.
"소생실에 CPR 환자 손 모질란다, 인턴들하고 간호사 쌤들 소생실에서 계속 킵(keep) 하고 있어 주시고!"
"네!"
"A 구역에 MI 환자 캐쓰(cath) 방 어레인지(arrange) 했으니까, 올라갈 때까지 모니터링 잘하고!"
여봉철의 말에, 응급실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때 간호사들이 달려와 황급히 말했다.
"여봉철 선생님."
"와예?"
"여기 환자 수처(suture, 봉합) 해 주러 PS에서 내려왔는데 손이 부족하다는데요……."
"선생님, 여기도 드레싱 해야 되는데 아직도 안 돼 있어요, 환자가 컴플레인 하는데……."
"마! 인턴 임마들 또 어데 갔노!"
여봉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손이 열 개여도 모자랄 판국에, 가장 바쁘게 움직여야 할 인턴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곧 인턴 두 명이 헐레벌떡 달려온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됐고, 한 놈은 2번 처치실 띠 가고, 한 놈은 드레씽 할 꺼 세트 싸가 퍼뜩 가온나."
"예?"
"띠가고 가오라꼬!"
인턴들이 눈을 껌뻑였다.
억양이 심한 속사포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쉽게 흥분하는 성격인 여봉철의 정수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마! 뛰어가고! 가져오라꼬! 올해 인턴들은 제대로 된 놈이 하나도 없노!"
여봉철의 분노한 목소리가 응급실에 울려 퍼졌다.
그가 바로 연국대병원 EM의 행동 대장이자 마스코트.
일명 ‘산도적’ 여봉철 선생이었다.
* * *
"하이고, 디다."
여봉철은 당직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루 종일 진이 빠진다.
이제 곧 꽃 피는 4월인데, 계절을 즐길 만한 여유도 없다.
일에 치이고, 환자에 치이고, 어리바리한 인턴들에게 치이고.
여기저기 치이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과를 잘못 선택했나."
여봉철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제 3년 차라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응급의학과는 병원에서 가장 바쁜 곳 중 하나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귓가에 바람을 불어 넣으며 속삭였다.
"여봉~?"
"아, 여봉이라 부르지 말라 캤지예. 닭살 돋십니더."
여봉철이 기겁을 했다.
경상도 마초 가문에서 자란 그에게 서울 사람들의 능글스러운 말투는 딱 질색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놀리는 것 또한 응급의학과 선배들의 재밋거리였다.
치프(chief)가 낄낄대며 물었다.
"오늘 고생했다며?"
"환자 복 터져서 쌔빠졌다 아입니까. 인턴들만 제대로 받쳐 줬어도 좀 나았을 낀데."
"인턴들이 왜?"
"하이고, 말도 몬 합니다. 으찌 그리 한몸맹키로 삐대쌋는지 콱 마……."
"서울말로 해 줄래?"
"하나같이 답답하게 굴어서 고생했다고요."
여봉철이 어색한 서울말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젊은 나이에 비해 걸쭉하고 진한 경상도 사투리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치프가 웃으며 종이를 건넸다.
"안됐다. 이번 달은 더 고생할 것 같은데."
"와예?"
"명단 봐 봐. 벌써부터 유명한 이름이 몇몇 보일 거야."
"……?"
여봉철이 종이를 건네받았다.
곧 인턴 배치 명단표를 살피던 그의 눈이 커졌다.
"캬…… 임마 이거, 완전 폐급 아입니까?"
"내가 말했지?"
그들의 시선이 가장 먼저 적혀 있는 이름을 향했다.
<조진기>.
얼마 전 술 먹고 손 다쳐서 응급실에 기어 온 놈이다.
이미 응급의학과에는 안 좋은 소문이 퍼져 있는 상태다.
"미친놈이 깁스하고 응급을 우째 본단 소립니까?"
"내 말이."
"정신머리 없는 섀키, 손목이 아니라 모가지를 콱 뿐질러 트릴까 보다."
여봉철이 험한 욕을 내뱉었다.
자기 밑으로 들어오면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내 줄 생각이다.
그리고 다음, <오중원>.
"임마는 누굽니까?"
"임마라고 하지 마라. 그 임마가 너보다 형일지도 몰라."
"예에?"
가끔 있다.
나이 많은 인턴들이.
레지던트의 입장에서, 나이 많은 인턴들은 아무래도 다루기가 까다로운 편이다.
"듣기로는 엄청 뺀질댄다고 하더라. 나이가 있다 보니까, 힘든 일 있으면 은근슬쩍 다른 동기들한테 미루는 모양이야."
"하이고."
여봉철이 한숨을 쉬며 콧잔등을 긁적였다.
갈수록 태산이다.
"임마는예? 남잔가 여잔가?"
그의 손가락이 다음 이름을 향했다.
<함소담>.
"너 함소담 모르냐?"
"모르는데예."
"함경일 교수님이랑 손은주 교수님 딸이잖아."
"아, 그 유명한 로얄?"
로얄(royal).
사전적으로는 귀족이라는 뜻이지만, 의사들 사이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인다.
부모님과 친인척들이 대학병원 교수인 경우, 그 자제를 로얄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도 부모가 모두 연국대병원 교수인 함소담은 로얄 중의 슈퍼 로얄이다.
"걔 일 조온나 못한대."
"예?"
"애가 좀 모자란 거 같다더만? 오죽하면 부모 빽 써서 의대 입학했냐는 말까지 나온다니까."
"허……."
"그래도 너무 뭐라 하지 마. 함경일 교수님 우리 병원에서 파워 센 거 알지? 괜히 아빠한테 꼰지르면 골치 아프다."
"맞네예."
여봉철이 푹 한숨을 쉬었다.
그의 시선이 종이를 훑는다.
"그래도 한 놈은 멀쩡해야 할 낀데…… 임마는예? 이름 한번 특이하네."
"아, 걔?"
치프가 피식거렸다.
"일운대 나왔단다."
"일운대예?"
"그래, 가르칠 교수가 없어서 전공 수업도 못 열었다는 꼴통 학교에서 뭘 제대로 배웠겠냐?"
"하이고……."
여봉철은 막막한 표정으로 네 명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폐급 조진기.
놈팽이 오중원.
답답한 로얄 함소담.
꼴통대학교 신선한.
"멤버 직이네. 으벤져스야 뭐야?"
여봉철이 킁 하고 코를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