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9화 (9/241)
  • #9 미래가 보인다(2)

    눈앞이 흐리다.

    곧 오래된 필름영화 같은 화면이 펼쳐진다.

    분명 그때와 똑같다!

    선술집 바로 앞에 인턴 동기들이 몇몇 모여 있다.

    그렇다는 건…… 시점이 바로 오늘이라는 뜻인가?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들의 대화 소리에 집중했다.

    곧 인턴들이 담배에 불을 붙인다.

    "조진기 쟤는 선한이한테 왜 저러냐?"

    "몰라."

    "원래 대학 때부터 술만 들어가면 정신 못 차리긴 했지."

    "그래도 저렇게까지 꼬장 부리는 건 심한데. 선한이한테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다들 진기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분위기다.

    그때 무리에 있던 중원이 형이 입을 연다.

    "저놈 연서 좋아해서 그래."

    "예?"

    "너희들 모르냐? 조진기, 대학 때 연서한테 세 번이나 고백해서 까인 적 있거든."

    "알죠. 유명하니까."

    "그리고 너희들도 알다시피 요새 병원에 소문이 좀 났잖아. 연서가 선한이랑 썸 타는 것 같다고."

    "아아……."

    인턴들은 비로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옆에서 투명인간처럼 듣고 있는 나는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뭐야, 그런 거였어?

    ‘어이가 없네.’

    무슨 열 살짜리 애도 아니고.

    결국 질투심 때문에 나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의사 사회라고 해서 결코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3년, 의대 6년 동안 책상에서 공부만 하느라 사람이 덜 된 녀석들도 많다. 수능 점수와 인격은 비례하지 않으니까.

    조진기 역시 그런 놈들 중 하나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연서와 나 사이에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건 몰랐는데.

    앞으로 인턴 생활을 할 때 참고해야겠다.

    괜히 소문이 커지면 서로 불편해질 수 있으니까.

    "지금 몇 시냐? 슬슬 파할 때 된 것 같은데."

    "10시네요. 들어가죠."

    인턴들이 담뱃불을 끄며 말하는 순간, 술집 안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야야, 저 새끼 잡아!"

    "어어어!"

    쿠당탕!

    누군가 2층 선술집에서 내려오다가 계단에서 넘어진 모양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조진기 미친놈아.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퍼마시면 어떡해!"

    "흐어어……."

    만취한 조진기가 계단 밑에서 울부짖는다.

    얼씨구, 가지가지 한다.

    이런 건 대학가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인데.

    "이놈 어디 부러진 거 아냐?"

    "멀쩡한 거 같은데."

    "택시 잡아!"

    인턴들이 조진기를 부축하며 택시에 태우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다시 밝아진다.

    * * *

    "……."

    나는 조용히 현실로 돌아왔다.

    내 앞에는 채웠던 술잔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주위의 동기들의 대화가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마치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가 뗀 것처럼.

    스윽―

    나는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9시 50분.

    만약 이번에도 꿈의 내용이 현실화된다면, 나는 약 10분 뒤의 미래를 본 것이다.

    과연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그대로 일어날까?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외투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어어, 그래."

    인턴들이 내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바깥 공기는 쌀쌀했다.

    찬바람을 쐬니 정신이 조금이나마 맑아진다.

    나는 홀로 도로변 분리대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잠시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해 보자.

    저번에는 무려 20시간 후의 미래를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작 10분.

    일관성이 없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주위에서 무언가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

    그것뿐이다.

    물론 저번에는 환자가 죽는 큰 사고였지만, 이번에는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작은 사고다.

    상대적으로 사소해서 비교되긴 하지만, 어쨌거나 공통분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치겠네.’

    나는 머리를 헝클었다.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무슨 영화처럼 거미에 물린 것도 아니고, 방사능에 노출된 것도 아니다.

    트럭에 치인 적도 없고, 신기한 물건을 주운 적도 없으며, 기연(奇緣)을 만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진정하자.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속단하기는 이르다.

    어쩌면 모든 것이 나의 망상이고, 이번에는 미래가 재현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때.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선술집에서 인턴 동기들이 걸어 나오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조진기 쟤는 갑자기 선한이한테 왜 저러냐?"

    "몰라."

    "원래 대학 때부터 술만 들어가면……."

    젠장, 대사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아서 소름이 돋는다.

    이쯤 되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한숨을 쉰 뒤 그들에게 다가갔다.

    "너희들 모르냐? 사실 조진기 대학 때…… 어, 선한이 나와 있었구나."

    중원이 형이 막 신나게 이야기를 꺼내려다 눈치를 보며 말을 삼킨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중원이 형."

    "응?"

    "조진기 저러는 거, 혹시 연서 때문인가요?"

    "어라… 어떻게 알았어?"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알긴, 그야 꿈에서 당신이 얘기해 줬으니 알지.

    중원이 형은 까진 이마를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너도 어디서 들었나 보구나. 아무튼 너그럽게 이해 좀 해 줘라. 앞으로 1년 동안 계속 볼 사이잖아."

    "예, 그러죠 뭐."

    나는 거짓말을 했다.

    이해해 달라고?

    내가 왜?

    그럴 생각 없다.

    앞으로 조진기와 살갑게 지낼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나에게 대놓고 악의를 드러낸 인간에게 손을 내밀 만큼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다.

    <인성 조진 놈과는 상종을 말아야 돼!>

    가락시장에서 30년간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 본 우리 아버지가 늘 강조하신 말씀이다.

    중원이 형이 담뱃불을 비벼 끄더니 장난스럽게 캐묻는다.

    "그런데 너 연서랑 뭐 있냐 진짜로?"

    "아뇨, 첫 턴에 같은 내과라 친해진 거죠."

    "그래?"

    "제가 연국대 적응하는 게 어려워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연서가 원래 모두한테 친절하잖아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그렇지."

    "걔가 좀 착하긴 해."

    "연서는 심지어 우리 병원에서 일하는 보조원님들이랑도 엄청 친하다더라."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저 타교 출신이라 여기에서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기도 바빠요.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 좀 해 주세요."

    "그래, 그래."

    내 말에 중원이 형과 인턴들은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표정들을 보니까 다들 연서한테 관심이 있는 모양인데?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하여간 앞으로 연서도 고생 좀 하겠네. 너무 인기가 많은 것도 피곤하겠다.

    어쨌든 이것으로 나와 연서에 대한 오해는 풀었다.

    쓸데없는 소문이 퍼지기 전에 미리 정리해 둘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메인이벤트는 이다음인데…….

    그때 술집 안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야야, 저 새끼 잡아!"

    쿠당탕!

    잠시 후 계단 밑에서 울부짖는 조진기를 보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 * *

    "손목이 아작 났나 봐."

    "뭐?"

    "아마 깁스하고 1개월은 고생해야 할 것 같다는데."

    숙소로 돌아와, 근욱이가 전해 준 말에 기가 찼다.

    물론 술을 마시면 반사신경이 저하되기에 평소보다 크게 다치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깁스 1개월?

    생각보다 큰 부상이다.

    "인턴 망했네."

    "망했지. 의사 첫 커리어부터 개 꼬이는 겨. 푸하하!"

    근욱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의사에게 손은 무척 중요하다.

    손을 못 쓰는 인턴은 채혈이나 드레싱 등 어떤 잡도 할 수 없다.

    기껏해야 환자에게 동의서를 받는 것 정도나 할 수 있을까?

    "응급실에서도 황당해하더라. 인턴이 술 처먹고 응급실로 기어 오는 건 처음이라고."

    "그랬겠지."

    "아마 내일이면 온 병원에 소문 쫙 날 거다, 크크크."

    적어도 한 달 동안, 조진기는 암세포 취급을 당할 게 뻔하다.

    중요한 시기에 자기 관리를 못 한 만큼 평판이 추락할 수밖에 없다.

    "뭐, 제 잘못인 걸 어쩌겠냐? 나는 그 새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쌤통이다."

    근욱이는 낄낄대며 침대에 누웠다.

    "……."

    반면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근욱이의 말대로, 조진기는 제 무덤을 판 것이다.

    대학생도 아닌데 자기 주량도 모르고 퍼마셨으니 사고가 일어나도 할 말이 없다.

    게다가 나에게 보였던 언행을 생각하면 더더욱 동정의 여지는 없다.

    ‘하지만…….’

    만약 내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겠지.

    그랬어야 했을까?

    모르겠다.

    솔직히 다시 1시간 전으로 되돌아간다 해도 조진기를 도와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앞으로 이 능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선한, 어디 가냐?"

    "잠깐 술 좀 깨러."

    나는 휴게실로 향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펜을 들고 노트에 차분히 정리를 시작했다.

    [1. 예지는 갑자기 일어난다.]

    [2. 예지를 하는 동안 현실의 시간은 멈추는 듯하다.]

    [3. 예지는 주위에서 일어날 사건 사고를 보여 준다.]

    [4. 예지의 시점은 불규칙적이다. 10분 후일 수도, 24시간 후일 수도 있다.]

    ‘일단…… 이 정도인가?’ 나는 노트를 응시했다.

    현재까지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이게 전부다.

    물론 아직까지는 케이스가 두 번뿐이라 확신할 수 없지만.

    내 생각이 맞는다면, 앞으로 이런 현상이 자주 발생할지도 모른다.

    병원에서는 사건 사고가 수시로 일어나는 법이니까.

    ‘그리고 다음번에 또 미래를 보게 된다면…….’

    선택해야겠지.

    미래를 내 손으로 바꿀지, 아니면 못 본 척 그대로 놓아둘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인생이 재미있어진다.

    나는 펜을 들어 마지막 항목을 적었다.

    [5. 나의 행동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 까짓것.

    이렇게 된 이상, 즐기지 뭐.

    아버지를 닮아 낙천적인 성격이 이럴 때는 참 편하다.

    "로또 번호는 안 알려 주나?"

    허공에 대고 중얼거려 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없었다.

    * * *

    첫 턴은 금방 지나간다.

    이제 적응이 된다 싶으면 바로 다음 과로 넘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신 선생님, 오늘이 우리 신 선생님 보는 마지막 날이라는 게 사실이여?"

    "엇, 어떻게 아셨어요?"

    "간호사들한테 들었지. 섭섭해서 어떡해."

    할머니 환자가 아쉬워하며 내 손을 잡는다.

    나는 웃으며 할머니의 손을 마주 쥐었다.

    3월의 마지막 주.

    오늘은 내과 인턴 마지막 날이다.

    내과는 고령 환자들이 많고, 장기 입원 환자도 많은 곳이다.

    몇몇 의사들은 그래서 내과를 싫어하기도 한다.

    소위 말하는 ‘찌글찌글한 환자들’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나는 싫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시장 바닥에서 동네 어르신들 손으로 자라다시피 해서 그런가.

    그들의 쇠약함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평생 자식 생각만 하며 일하다, 나이가 들어 병 때문에 고생하는 노인 환자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앞선다.

    우리 병동 환자들도 이제는 정이 들어 버렸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 할머니 피 좀 뽑겠습니다."

    "허구한 날 피만 뽑아 가구…… 피 없어서 죽갔어 이러다."

    "얼른 퇴원해서 건강해지셔야죠."

    나는 아이처럼 칭얼대는 할머니를 달래 가며 팔을 걷었다.

    채혈은 드레싱이나 심전도 검사처럼 가장 기본적인 인턴 잡(job) 중 하나다.

    바늘로 살을 아프게 찌르는 일이기에, 한 번의 실패로 환자와의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몇 번을 해도 매번 새롭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할머니는 내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 말했다.

    "손이 왜 이렇게 고와? 여인네 손 같아~ 그래서 그런가, 신 선생님이 뽑아 주면 하나도 안 아파."

    "정말요?"

    "다른 선생님들이 찌르면 아파."

    "마지막까지 안 아프게 잘해 드려야겠네요."

    나는 환자의 주름진 팔에 주삿바늘을 꽂으며 말했다.

    다행히 채혈은 한 번에 성공했다.

    할머니가 못내 아쉬운 듯 묻는다.

    "그럼 이제 안 와?"

    "다른 과 가면 거기서도 정신없이 바빠서요. 그래도 시간 되면 한 번씩 들를게요."

    "어휴, 아쉬워라. 신 선생한테 내 손녀딸 시집보내고 싶었는데……."

    "할머니 닮은 손녀분이면 엄청 예쁘겠네요."

    "그럼, 아주 똑 닮았지."

    "몇 살인데요?"

    "11살."

    "아이고 할머니. 저 잡혀가요."

    내가 앓는 소리로 대답하자, 옆 베드에 있던 환자들까지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린다.

    그렇게 정들었던 환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

    그때, 간호사 파트장님이 슬쩍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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