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인턴 신선한(7)
며칠 후.
나의 인턴 생활은 아주 약간 달라졌다.
저번 CPR 사건 이후로, 병동 간호사들과 주치의가 나를 대하는 것이 조금 나아진 것이다.
일꾼에서 드디어 한 명의 의사로 격상되었다고 해야 하나?
물론 그렇다고 인턴으로서 해야 하는 일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신선한!"
"예!"
"선한 쌤!"
"갈게요!"
3월 셋째 주.
오늘도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옆 병동에서 오전에 끝내야 하는 골수천자가 2건이나 뜨는 통에 점심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반드시 두 명이 짝을 이뤄서 해야 하는 골수천자는 오전 시간을 통째로 잡아먹는 큰 업무이다.
오후 2시가 될 무렵, 김뱀이 말했다.
"좀 쉬고 와라."
"그래도 되겠습니까?"
"밥은 먹고 일해야지. 1시간 뒤에 관장(enema) 있으니까 잊지 말고. 늦으면 죽는다."
"예."
나는 씩 웃었다.
김뱀의 말투가 그래도 약간 부드러워진 탓이다.
예전 말투가 핵불닭볶음면처럼 매운맛이었다면, 요즘은 열라면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둘 다 매운 건 마찬가지지만, 이제 좀 먹을 만하다.
"뭘 봐?"
"아닙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업무에서 잠시 해방된 뒤, 햄릿 못지않은 비장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밥이냐, 잠이냐……."
고민을 하던 중, 1시간 후에 관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휴."
벌써부터 현기증이 난다.
아무리 환자 치료의 일환이지만, 관장은 고역스럽다.
특히 손가락을 항문 안으로 넣어 자갈같이 굳어 있는 대변을 빼내야 하는 핑거 에네마(finger enema)…….
의료용 장갑을 다섯 겹씩 끼고 해도 한동안 손에서 냄새가 떠나지 않는다.
"괜히 밥 먹고 관장하다가 토 쏠리면 안 되는데."
나는 고민 끝에 결정했다.
차라리 잠을 선택하자.
아무래도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수면인 것 같으니.
‘그래도 반나절만 버티면 오프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운이 났다.
오늘은 동기들과 함께 병원 바깥으로 나가야겠다. 복잡한 머리도 식힐 겸.
#미래가 보인다(1)
"어우, 살 것 같다."
"바깥 공기가 이렇게 좋다니!"
그날 저녁, 근욱이와 나는 병원 밖으로 나왔다.
오프(off)는 인턴들이 잠시 해방되는 시간이다.
물론 숙소에서 그냥 뻗을 때도 많지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외출하기로 결정했다.
"나오길 잘했네."
"그러게."
우리는 정문 앞에서 힘껏 기지개를 켰다.
휴식이 이렇게 달콤한 거였던가?
숨만 쉬어도 좋다.
인턴 생활을 시작한 지 3주밖에 되지 않았는데, 체감상 반년은 지난 것 같다.
마침 꽃샘추위 때문에 미세먼지도 별로 없는 날이다. 병원 안에 갇혀 있을 때보다 훨씬 기분이 상쾌했다.
"선한 오빠!"
찰싹!
그때 외출복 차림의 연서가 나타나 내 등을 때렸다.
와…….
새삼 감탄하게 된다.
의사복을 입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니트에 청바지만 입었는데도 무슨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주위에서 행인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질 정도이니 말 다 했다.
"넌 선한이 등에 원수졌냐?"
"오빠 등이 넓어서 타격감이 좋거든요."
"내가 더 넓은데. 나도 때려 줘."
"아 징그러. 저리 가요."
근욱이가 장난스럽게 몸을 들이밀자 연서가 깔깔 웃으면서 맞받아친다.
마치 오랜만에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기운이 넘치는 모습들이다.
나는 피식 웃다가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아 참, 연서야."
"왜요?"
"그 환자분은 어떻게 됐어?"
"누구…… 아, 김정수 환자요?
연서가 웃으며 말했다.
"계속 신경 쓰고 있었구나? 흉부외과에서 수술 잘 끝나서 곧 퇴원한대요."
"CABG 수술(관상동맥우회술)?"
"예. 별다른 이슈 없이 잘 끝난 것 같던데? 아마 금방 퇴원할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이제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 다행이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사건 이후, 목에 가시가 박힌 듯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날, 아직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어쨌거나 그 뒤로 ‘예지몽’이라고 부를 만한 꿈은 한 번도 꾼 적이 없다.
‘……뭐, 아무튼 환자가 무사하다니 다행이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옆을 돌아보니, 근욱이가 뚱한 표정이다.
"야, 너희는 밖에 나와서까지 일 얘기냐? 다른 얘기 좀 하자!"
나는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 어디 갈래?"
"우리 뭐 먹을까요? 오프 때는 진짜 맛있는 거 먹고 싶은데."
"비싼 데 갈까?"
"비싼 데 좋죠. 우리 이제 사회인이잖아."
"그래 맞아, 힘들게 돈 벌어서 뭐 하냐! 사회인들이니까 이럴 때 돈 좀 쓰자!"
<사회인>.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모든 사회 초년생들이 비슷한 기분 아닐까?
아직 첫 월급날까지 며칠 남았는데도 벌써부터 구름 위에 올라간 것처럼 들뜬다.
"선술집 갈래? 근처에 유명한 데 있던데."
"고고! 이참에 다른 동기들도 부를까요?"
"좋지! 우리는 택시 타고 먼저 가 있자."
"버스 안 타고?"
"어허. 사회인이잖아, 사회인! 돈 좀 쓰자니까!"
근욱이의 너스레에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동기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동안, 복잡한 고민은 머리에서 조금씩 잊혀 갔다.
* * *
우리가 도착한 곳은 분위기가 좋은 퓨전 선술집이었다.
학생 시절에는 엄두도 못 낼 만한 곳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딱 알맞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맛있는 요리와 함께 술을 마시니 취기가 조금씩 올랐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난다.
"야, 연서 오랜만이다!"
"어서들 와요!"
연서가 연락을 돌리자, 순식간에 10명이 넘는 인턴 동기들이 모여들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불렀으면 이렇게 모이진 않았겠지.
역시 연국대 핵인싸, 이연서답다.
그중 빼빼 마르고 이마가 까진 중원이 형이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군대를 다녀온 의전원 출신에다가, 1년 유급까지 해서 우리 중에는 나이가 가장 많은 편이다.
"얘들아, 나 좀 불쌍히 여겨 주라. 인턴 시작하고 처음으로 밖에 나온 거야."
"와, NS(신경외과)는 오프 때도 못 나가요?"
"오프 때 pre―op 준비하고 환자 드레싱하다 보면 맨날 밤 10시 넘어가더라구. 그래서 그냥 숙소에서 뻗었지."
"크크. 서른 넘어 인턴 하느라 고생하시네."
"하지만! 오늘은 기필코 밖에 나와야겠다 하고 기어 나왔다. 다름 아닌 연서가 부르는 자리니까!"
그가 과장된 몸짓으로 외치자 주변에서 우우 하고 야유 소리가 울려 퍼진다.
"개수작 on."
"어허, 개수작이라니. 후배를 향한 선배의 애정 표현이지!"
"가만 보니까 이 형 머리도 안 감고 나왔네. 수술 모자 쓰고 있다가 그냥 나온 거지?"
"야 인마, 머리 감을 시간이 아깝다! 오프를 즐겨야지."
다들 왁자지껄 즐거운 분위기다.
역시 연국대 출신들끼리는 서로 친한 모양이다.
하긴, 좁은 대학에서 수년 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일 테니…… 이럴 때는 조금 부럽기도 하다.
새삼 스스로가 이방인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고 보니, 거기 그쪽 이름이 뭐더라. 신선한?"
"네.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래그래. 우리 인턴 중에서 제일 잘생긴 놈이랑 드디어 술을 먹어 보는구나. 반갑다!"
나는 웃으며 중원이 형의 술잔을 받았다.
어쨌거나 1년 동안 계속 마주칠 사람들이니, 가능한 얼굴을 익혀 두면 좋다.
초반에 사람들과 친해지지 않으면 소외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타교 출신이면 적응하기 좀 힘들 수도 있는데. 어때?"
중원이 형이 묻는다.
내가 막 대답하려는데, 연서가 재빨리 말을 가로챈다.
"어휴, 말도 마요. 완전 에이스예요!"
"그래?"
"그럼요. 저번 주에 김범수 선배님한테 한 방 먹인 거 못 들었어요?"
"뭐? 김뱀한테?"
"아니 이 오빠가 글쎄……."
연서의 입담이 이어진다.
김뱀에게 반항하여 김정수 환자를 살려 낸 이야기를, 과장 몇 스푼 보태 가며 술술 쏟아 낸다.
연서의 입을 거치니, 내가 했던 일들이 마치 대단한 무용담처럼 들린다.
"와아, 그런 일이 있었어?"
"대박이네."
"이거 대단한 놈이었구만! 술 한잔하자!"
곧 내 앞에 잔이 가득 찬다.
덕분에 오늘 연국대 출신 인턴들 사이에서 소외되지는 않을 것 같다.
* * *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다.
"그나저나, 너희는 무슨 과 생각하고 있냐?"
인턴들이 모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깃거리다.
전공 선택은 무척 중요하다 보니, 우리끼리 모였을 때는 서로 정보를 교류하게 된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간 중원이 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연서는 아직도 소아과 생각하고 있는 거야?"
"잘 모르겠어요."
연서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학생 때는 애들 보는 게 너무 좋았는데……. 지금 소아과 도는 친구한테 들어 보니까 힘들다 하더라구요."
"하긴 소아과 보호자들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더라."
"그래서 저도 한번 돌아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아요. 소아과 스케줄 구해 놨거든요!"
연서가 말을 마치자, 곧 사방에서 오지랖들이 쏟아진다.
"에이. 소아과 가기에는 연서 성적이 아깝다."
"피부과는 생각 없고? 원래 대대로 예쁘고 공부 잘하는 여자 선배들은 피부과 갔잖아."
"히히, 여러모로 고민 중이에요."
연서는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기 있는 과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정재영(정신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등등…….
개업해서 대박을 노릴 수 있거나, 혹은 상대적으로 몸이 덜 힘든 과가 인기가 많다.
물론 개인 성향에 따라 선호하는 과는 천차만별이다.
"나는 덩치만 컸지 사실 학구파야. 재활의학과 아니면 영상의학과?"
"영상의학과는…… 그 어두운 방에서 평생 CT만 봐야 되는데 하고 싶냐? 나는 마취과 갈란다."
"마취과가 요새 대세긴 해. 시내에 통증 클리닉 엄청 많이 생기는 거 알지?"
그렇게 다들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연서가 물었다.
"선한 오빠는 무슨 과 생각해요?"
"응? 나?"
"선한 오빠야말로 모교에 있었으면 가고 싶은 과 다 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난 모교가 없어졌어."
"아 맞다."
내 대답에 모두들 빵 터졌다.
일부러 자학 개그처럼 말했더니 웃겼던 모양이다. 근욱이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낄낄거린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웃기긴 하다.
젠장.
"그러게, 나는 선한이가 제일 궁금하네. 타 학교 출신 애들은 여기 올 때 무슨 과를 생각하고 오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중원이 형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린다.
나는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일단 surgery(외과) 쪽 생각하고 있긴 한데요."
"오올."
"GS(일반외과)나 NS(신경외과) 생각하고 연국대병원 지원했어요. 저번에 보니까 TS(흉부외과) 사람들도 멋있더라구요."
"오오오올~!"
다들 열광한다.
그들의 반응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나열한 과들은, 하나같이 모두 비인기 과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힘드니까!
소위 빡세기로 유명한 곳들이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외과 쪽을 생각하고 있었다.
외과의사 신선한.
멋있지 않은가?
왜, 그런 거 많이들 봤잖아. 수술장에 들어가 환자를 앞에 두고 "메스!"라고 외치는 거.
나는 어릴 때부터 그런 멋있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
"그래그래. 언제적 피안성이냐. 요새는 다들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지!"
"맞아요."
"멋있다!"
다들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들었다.
그때, 누군가 분위기를 와장창 깼다.
"멋있기는 개뿔. 그것밖에 선택지가 없는 거겠지."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진다.
나는 테이블 끝에 앉은 녀석을 바라보았다.
조진기.
시종일관 거슬리는 놈.
아까부터 테이블 끝자락에서 혼자만 얼굴이 벌게져서 만취해 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외과 쪽은 노려 볼 만하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어차피 지방대 출신으로 다른 과는 언감생심 넘볼 수도 없으니까."
"야, 넌 선한이한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왜, 제 말이 틀려요? 솔직히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안 그래요?"
"하하, 이 새끼 취했네."
"에이스는 얼어 죽을…… 꼴통대 나와서 뭐 잘났다고, 씨발."
"야, 야! 누가 쟤 입 좀 막아!"
중원이 형이 황급히 분위기를 수습한다.
나는 술잔을 들어 올려 굳어진 입매를 감추었다.
그리고, 툭 하고 말했다.
"왜 그렇게 화났어?"
"뭐?"
"나는 외과 쪽 지원하겠다고 한마디 한 것밖에 없는데.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어?"
"……."
할 말을 잃은 조진기는 술에 취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혀가 꼬부라진 발음으로 계속 혼자 뭐라 뭐라 중얼거린다.
어이가 없네.
나는 대꾸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궁금하다. 대체 무슨 이유로 저렇게 나에게 적개심을 뿜어내는 걸까?
"야, 조진기 화장실 데려가서 술 좀 깨워!"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중원이 형이 황급히 말한다.
잠시 후 주위 사람들이 만취한 조진기를 데리고 나갔다.
"선한아, 취해서 저러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응?"
"신경 안 써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앞으로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 좋은 사람들만 만나리란 법은 없으니까.
당연히 그중에서는 이상한 놈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면전에서 저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원래 사람의 본성은 저럴 때 나오는 거다.
‘조진기?’
나는 웃으며 술잔을 채웠다.
다른 건 몰라도, 앞으로 저 새끼 이름은 딱 기억해 놔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술을 마시려고 할 때.
"……!"
팍하고, 시야가 어두워진다.
그리고 내 눈앞에 두 번째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