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인턴 신선한(4)
<씨피알 엠, 씨피알 엠(CPR M). 본관 17층 서병동 처치실.>
덜컹!
나는 복도로 뛰쳐나갔다.
다른 인턴들도 용수철처럼 우르르 튀어나오고 있다.
내과는 9개의 분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인턴도 18명이나 배정되며 그중 절반인 9명이 야간 당직을 선다.
몇 명은 본관에, 몇 명은 이곳 암센터 숙소에 배치되어 있다.
"잠깐만, 같이 가요!"
여자 숙소로부터 부스스한 머리를 질끈 묶으며 뛰어오는 연서가 보인다.
와…….
CF의 한 장면인 줄 알았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남자 인턴들이 연서를 헤벌쭉하고 바라본다.
쟤는 자다 일어나도 저런 모습을 연출할 수 있구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탁탁탁!
나는 달리면서 물었다.
"연서야, 방금 17층 서병동이라고 했지?"
"맞아요."
"환자들 스테이블(stable, 안정) 하다고 아까 그랬잖아."
"저도 누가 CPR 난 건지 모르겠어요. 드레싱하고 올 때만 해도 병동 완전 쥐 죽은 듯이 조용했는데……."
연서의 얼굴이 창백하다.
그야 자신이 담당하는 병동에서 CPR이 터졌으니 당연하다.
"이게 제일 빠르겠다."
타다닥!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근욱이는 6개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모두 눌렀다.
17층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까칠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요새 인턴들 살 만한가 봐?"
젠장, 보기 싫은 얼굴이다.
내과 3년 차 레지던트 김범수, 통칭 <김뱀>.
유독 신경질적인 성격은 특히 당직 때 두드러진다.
"환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이제서야 도착해? 인턴 1개월 차에 벌써 풀어졌어?"
김뱀의 사나운 목소리가 이어진다.
물론 전력질주를 한 우리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암센터 건물에 있는 인턴 숙소에서 이곳 본관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5분.
우사인 볼트가 아닌 이상 더 빨리 도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우리는 고개를 숙였다.
대학병원.
언제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곳.
이곳에서 인턴들은 말단 병사들이나 다름없다. 오라면 오고, 뛰라면 뛰어야 한다.
물론 상황이 급박하기에 김뱀의 갈굼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명은 여기 앰부(ambu, 수동식 인공호흡기) 손 바꿔 주고, 나머지는 줄 서서 컴프레션 해."
"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미 도착한 인턴들이 번갈아 가며 심마사지를 반복하고 있었다.
심장이 멈춘 환자는 ROSC(Return of Spontaneous Circulation, 자발순환회복)이 되지 않는 이상 적어도 30분은 심마사지를 계속해야 한다.
보통 2분씩 돌아가면서 하게 되는데, 막상 가슴을 누르다 보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2분이 지나면 대부분 땀범벅이 된다.
나는 차례를 기다리며 환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헉!’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김정수 환자.
아니나 다를까 걱정했던 바로 그 환자다.
정말로 꿈의 내용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200줄(J) 차지!"
"다들 물러서! 쇼크!!"
"리듬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내 차례가 되기 직전에, 제세동을 통해 심전도는 정상 리듬으로 돌아왔다.
응급 상황 종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김뱀의 성격상 우리를 얌전히 보내줄 리 없었다.
"인턴들, 잘 들어."
"예."
"너희들이 늦으면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드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겠습니다."
"자, 그럼 CPR 상황에서 이렇게 인투베이션(intubation, 기도 삽관) 되어 있으면 앰부를 몇 초에 한 번씩 짜라고 가이드라인에 나와 있는지 말해 볼 사람?"
김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는다.
순간 목 뒤가 뻣뻣해지며 긴장이 되었다.
이건 테스트다.
인턴 동기들은 당황한 표정이다.
물론 침착하게 생각하면 어려운 내용은 아니지만, 기습적인 질문에는 버벅거리게 된다.
"바로 대답 못 해? 연국대병원 인턴 수준이 고작 이것밖에 안 돼?"
김뱀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여기서 더 끌다간 안 좋겠다. 이대로라면 저 인간 성격에 어떤 폭언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결국 내가 나섰다.
"기도가 확보되어 있을 때는 6초에 한 번 호흡하게 해야 합니다."
"컴프레션 할 때 diastolic pressure(이완 기압)은?"
"동맥 내 혈압은 이완기에 20mmHg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김뱀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그는 아예 내 얼굴을 노려보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Shockable Rhythm(충격 리듬)일 때 Amiodarone(항부정맥제) 용량을 얼마나 줘야 돼?"
"처음에는 300mg bolus, 그다음부터는 150mg 투약해야 합니다."
"정답."
김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인턴 중에 정신 차리고 있는 놈이 하나쯤은 있어서 다행이네."
……그야 하루 종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침에 꿈에서 보았던 장면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하루 종일 CPR 상황을 머릿속에서 재생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순발력 있게 대답 못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김뱀의 말투는 다소 누그러졌다.
"다른 인턴들 반성해라. 특히 연국대 출신들."
"예."
"뭐 해. 다들 안 사라져?"
인턴들은 꾸벅 인사를 한 뒤 병동을 나섰다.
돌아가기 전, 나는 벽면에 있는 시계를 힐끔 바라보았다.
02시 40분―
시간은 새벽을 지나고 있었다.
* * *
"뭐야, 한 거 없이 금방 끝났네."
"그러게."
"요새 헬스 좀 해서 컴프레션 빡세게 해 주려 했더니 아쉽구만. 크크."
숙소로 돌아가는 길, 근욱이가 팔근육을 과시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농담에 인턴들의 긴장이 풀어졌다.
"그나저나 김뱀이 웬일로 일찍 놔줬네?"
"선한이 덕분이지 뭐. 대답 못 했으면 얼마나 갈굼당했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그나저나 저 인간은 왜 저렇게 성격이 지랄이냐?"
"나는 김뱀 보기 싫어서 내과는 절대 안 갈 거야."
인턴들의 수다는 뒷담화로 이어졌다.
꼴 보기 싫은 레지던트를 욕하는 것은 인턴 생활에 그나마 위안이 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대화의 흐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뭐지, 이 기분은?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오후에 PCI 시술>.
<새벽에 CPR 발생>.
이미 꿈의 내용이 모두 그대로 재현되었다.
만약 다시 한번 꿈이 현실로 재현된다면…….
약 40분 후에, <김정수 환자의 사망>이 재현될 것이다.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다른 인턴들이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잠깐만.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뭐?"
"너희들 먼저 들어가."
"뭐? 야, 어디 가!"
탁탁탁!
나는 서병동 쪽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쓸데없는 망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체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만약 이대로 숙소로 돌아간다면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뛰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같이 가요!"
돌아보니 어느새 연서가 후다닥 뒤따라오고 있었다.
"너는 왜 따라와?"
"그러는 오빠는 어디 가는데요?"
"환자 좀 다시 보려고."
"김정수 환자를 왜 오빠가 걱정해요? 원래 내가 담당했던 환자예요. 신경을 써도 내가 써야지."
그런가?
생각해 보니 그러네.
"그럼 같이 가자."
어쨌든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것이다.
지금의 혼란스러운 내 머리로는, 객관적인 사고가 불가능할 것 같으니까.
* * *
김정수 환자는 인공호흡기를 꽂은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주치의인 김뱀은 잠시 화장실에라도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와 연서는 환자의 앞에서 상태를 살폈다.
삑, 삑…….
환자의 심박을 알리는 규칙적인 리듬이 무미건조하게 울려 퍼진다.
나는 연서를 팔꿈치로 툭 치며 물었다.
"어떤 거 같아?"
"뭐가요?"
"환자 상태 말야."
"에이, 그걸 우리가 봐서 알 수 있을까요? 이제 인턴 1개월인데."
"하긴 그렇지."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환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쩌면 인턴인 우리의 눈으로도, 무언가를 짚어 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
"혹시 이 환자분에 대해 아는 거 있어?"
"글쎄…… 캐쓰 방(Cath Room, PCI 시술을 하는 시술실)으로 휠체어 타고 이동하는데 옆을 지나쳤거든요? 근데 담배 냄새가 나더라구요."
"담배?"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연한 말이지만 입원 중에는 금연이 권장된다.
특히 심장 시술을 앞둔 환자라면 더더욱.
"저도 설마 환자한테서 나는 걸까 하면서, 다른 일 하러 가긴 했는데."
"흠……."
물론 당장의 흡연이 치명적이지는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심장 시술을 앞두고도 담배를 못 참고 피웠다면, 평소에는 대체 얼마나 피워 댔다는 거야?
나는 환자 옆의 모니터로 EMR(전자의무기록)을 확인해 보았다.
[김정수]
63/M?
HTN/DM/Dyslipidemia (+/+/+)
Smoking Hx (+) 80 pack―year
Ejection fraction 35%
PCI d/t unstable angina
"심하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담배를 적어도 하루에 두 갑씩 40년을 피운 히스토리가 발견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혈관에 안 좋은 징후는 모조리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박출률이 3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즉 심장의 펌프 기능이 현저하게 낮은 상태다.
연서도 차트를 살펴보더니 뜨악한 표정이다.
"우와…… 지금 보니 PCI 시술 후에 문제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네요."
"네가 봐도 그렇지?"
"네."
연서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PCI.
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시술.
의학용어라서 어렵게 느껴지지만, 막상 그렇게 복잡한 개념은 아니다.
우리 몸에는 심장에 혈액을 공급해 주는 ‘관상동맥’이라는 혈관이 있다.
그런데 이 관상동맥이 좁아지면 심장근육에 피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다.
PCI란 이 통로를 인위적으로 넓혀 주는 시술이다.
<스텐트>라는 작은 금속관을 혈관에 집어넣어 튼튼한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인위적인 장치를 체내에 집어넣는 것이니만큼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환자는 어떻게 사망에 이르게 되는 거지? 아까는 분명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나는 인턴 숙소에서 봤던 전공 서적을 떠올려 보았다.
젠장…….
방금 봤던 건데도 기억이 안 난다.
가락시장에서 파는 생선 이름은 한번 들으면 절대 까먹지 않는데, 의학 지식은 한번 들으면 무조건 까먹는다고 봐야 한다.
몇 번을 반복해야 겨우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의대 공부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의대생 시절에도 구멍이 엄청 큰 항아리였다. 그냥 물을 열심히 때려 붓는 타입이었지.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환자가 어떻게 죽게 되는 거냐고! 하나라도 기억 좀 나라!
그때.
번뜩하고, 머릿속에 한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Refractory V―fib."
나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불응성 심실세동(Refractory V―fib).
몇 번의 쇼크 및 투약에도 반응하지 않는, 악질적으로 반복되는 심실세동을 말한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환자는 사망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는 김정수 환자의 심전도 그래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상한 것 같지 않아?"
"뭐가요?"
"저기 ECG(심전도) 리듬을 봐. APC, VPC 지나가는 것 좀 보라고."
실제로 그래프는 정상에서 조금씩,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규칙적인 리듬 사이사이에 잡음처럼 이상한 파형이 보인다.
"난 잘 모르겠는데……. 듣고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빨리 얘기해야겠어."
"뭘요?"
"환자 위험하다고."
"진심이에요?"
연서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물론 나도 말하면서 스스로 어이가 없다.
인턴 1개월 차가 주치의에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제 막 입사한 수습 신입 사원이 윗사람들에게 조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한국적인 위계 사회에서는 더더욱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정말 얘기하려구요? 김범수 선배 성격상 곱게 듣지는 않을 것 같은데……."
연서가 걱정스러운 듯 말한다.
……사실 연서의 말이 맞다.
나 따위가 뭐라고?
모르는 척 넘어가자.
괜히 나서 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어.
인턴 1개월 차부터 건방진 놈으로 찍히면 어쩌려고?
머리는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발은 나도 모르게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