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인턴 신선한(3)
나는 놀란 눈으로 스크린에 떠 있는 환자의 정보를 바라보았다.
김정수.
63세의 남성 환자.
허혈성 심부전증으로 관상동맥 협착이 의심되어, 오늘 PCI(Percutaneous Coronary Intervention, 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 시술을 받을 환자라고 한다.
‘신기하네. 이게 뭔 일이야?’
무슨 예지력도 아니고.
그렇게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데,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교수를 포함한 십여 명의 의사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 인턴, 왜 그러지?"
"예?"
분위기가 싸늘한 것을 느끼고, 나는 그제야 내 실수를 깨달았다.
이런 씨…… 망했다!
아까 놀란 나머지 입 밖으로 크게 소리를 내어 버린 모양이다.
다시 말하지만, 컨퍼런스 룸에서 인턴은 공기와도 같은 존재여야 한다. 괜히 눈에 띄어서 좋을 것 하나도 없다.
김뱀이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아…… 평소에 관심이 있던 시술이라서요."
"그래?"
"예. PCI 시술은 연국대병원이 대한민국 최고라고 들어서, 나중에 꼭 한번 참관해 보고 싶습니다!"
"인턴이 의욕적이어서 좋네."
교수는 웃으며 넘어갔다.
휴, 다행히 이상한 놈 취급받는 것은 면했다.
‘정신 차려야지.’
나는 뺨을 쓸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아마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이 안 되니까.
‘예지력은 개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망상에 취하지 말자. 당장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도 바쁘니까.
* * *
정신없는 시간이 흘러간다.
심전도 검사는 대표적인 인턴 잡(job)이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들에게 똑같은 작업을 하고 있자면, 생각은 멈추고 몸이 반응하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
만약 일이 조금이라도 밀리기 시작한다면 바로 인턴들에게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물론 업무는 그뿐만이 아니다.
동맥혈, 정맥혈을 뽑아 검사하는 일.
주치의가 바쁠 때 자잘한 처방을 대신 내주는 일.
진료에 필요한 기계들을 옮기는 일.
소변줄을 넣거나, 대변을 볼 수 있게 항문으로 약을 넣는 일.
환자에게 바늘을 찔러 흉수, 복수, 골수를 뽑아 검사하는 일.
등등…….
한마디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모두 해야 한다.
괜히 인턴들이 스스로를 잡역부라고 칭하는 것이 아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업무를 비워 내다 보면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해진다.
"몇 분 지났지?"
"15분. 빨리 먹고 가자."
"우리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냐? 하루 종일 심전도만 찍었더니 내가 의사인지 ECG 기사인지 헷갈린다."
"누가 아니래."
"아, 식사 대충 때우면 근손실 오는데……."
"지금 그런 거 걱정할 때냐? 하루하루가 전쟁인데."
"나는 세상에서 근손실이 제일 싫어."
투덜대는 근욱이와 함께 편의점에서 식사를 대충 해결한 뒤 병동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연서가 허둥대며 어디론가 급히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내가 물었다.
"연서야, 점심 먹었어?"
"아뇨, 지금 동의서 받아야 되는 거 4개나 남아 있어요. 일이 해도 해도 끝이 없네."
연서가 프린트해 놓은 동의서 뭉치를 들고 울상을 지었다.
인턴의 일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동의서를 받는 일이다.
간단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환자와 보호자들을 대면하는 일이니만큼 은근히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내가 몇 개 받아 줄게."
"정말요?"
"얼른 대충이라도 밥 먹고 와. 오후에 천자 시술도 있다면서."
"으으,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다. 나중에 밥 살게요!"
연서가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기뻐한다.
나는 연서의 동의서를 넘겨받고, 이윽고 흠칫 놀랐다.
<심장검사 및 시술 동의서>
―등록번호 : 300―25―21―0
―성명 : 김정수 / M
‘김정수 환자?’
분명 꿈에서도 보았고, 아침 컨퍼런스에서도 본 환자다.
오늘은 왠지 하루 종일 이 환자와 얽히는 듯한 기분이다.
마가 끼었나?
아침부터 계속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병실로 향했다.
"김정수 환자분. 들어갈게요."
촤악!
나는 커튼을 걷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희끗한 머리와 움푹 팬 처진 눈, 그리고 까무잡잡한 피부!
분명히 꿈에서 본 환자의 얼굴과 같았다.
이름이야 우연의 일치라 하더라도, 외모까지 비슷할 수 있나?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본 적이 없는 환자인데……?’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곧 환자의 옆에 있던 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선생님, 무슨 일이시죠?"
"아… 오늘 받으실 시술 설명드리러 왔습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동의서를 내밀었다.
"환자께서 받으실 관상동맥 조영술 및 중재술이란……."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전문용어의 남발 없이 최대한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더니, 환자와 보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동의서를 꼼꼼히 살펴보던 보호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 선생님."
"예."
"우리 아빠 잘못되지는 않겠죠?"
"잘못되다뇨?"
"여기 사망할 수도 있다고 써 있길래……."
그렇게 말하며, 보호자가 조심스레 동의서를 가리켰다.
<예상되는 위험 및 합병증>
―방사선 조영제 부작용
―혈관손상
―부정맥
―심장합병증
―뇌혈관질환
―응급수술
―사망
―기타
딱 봐도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보호자가 가리킨 동의서에는 항목별로 수많은 위험 요소들이 빠짐없이 적혀 있다.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환자나 보호자 입장에서는 덜컥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0.001%라도 일어날 수 있는 합병증은 다 적어 놓아서 그래요."
"아……."
"저희 연국대병원이잖아요? 대한민국 최고 의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까 별일 없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다른 선생님들한테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도 안 해 주던데, 선생님이 그렇게 친절히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 되네요."
보호자가 고개를 끄덕인 뒤 환자에게 말한다.
"아빠, 들었지? 너무 겁먹지 마요."
"그래, 그래."
김정수 환자는 마른기침을 몇 번 하더니 손을 들어 동의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 한구석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분명 내가 보았던 꿈에서 김정수 환자는 사망했다.
만약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라도 한다면…….
‘잠깐. 내가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상상 하지 말자.’
나는 뺨을 짝짝 두드렸다.
PCI는 하루에도 10번 넘게 행해지는 시술이고, 최근 1주일 동안 시술받은 환자들은 모두 문제없이 퇴원했다.
내가 정말로 예지력을 가지지 않은 이상,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 선생님, 저희 아빠 잘 부탁드려요."
"예. 편히 쉬고 계세요."
나는 동의서를 받고 스테이션으로 돌아가기 전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서로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손을 꼭 쥐어 주는 모습이, 마치 우리 누나와 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뒤숭숭했다.
* * *
저녁 8시.
드디어 업무의 끝이 슬슬 눈에 보였다.
물론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오늘 나는 야간 당직이기 때문이다.
"휴우우."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몰골로 숙소에 돌아왔다.
인턴 숙소는 2인 1실로 되어 있는데, 흡사 재수생 시절 고시원을 연상케 하는 구조다.
2층 침대와 테이블이 딱 맞게 배치되어 있는, 좁다면 좁고 아늑하다면 아늑한 공간이다.
"왔냐?"
덤벨을 들어 올리던 근욱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새 운동?"
"당연하지. 아무리 바빠도 근손실만큼은 어떻게든 예방한다."
"대단하다 대단해."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근욱이는 숙소를 같이 쓰며 가장 먼저 친해진 친구다.
나이도 동갑이고 타 대학 출신이라 서로 공통점이 많다.
그리고 소위 말해 헬스 중독자라 괴물 같은 팔뚝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동기들 사이에서 ‘근욱몬’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다.
"선한, 아침부터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이네."
"말도 마라. 갑자기 콜 폭발해서 개미처럼 일하고 왔다."
"크크, 꼭 이런 날 당직이지?"
"그러게."
"이럴 때일수록 운동을 해야 돼. 내가 자세 잡아 줄까?"
"됐다, 이 근욱몬아."
나는 침대 1층에 풀썩 쓰러졌다.
인턴들은 2~3일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야간 당직을 선다.
채혈 검사, 각종 시술, 동의서 설명, 드레싱 등등… 어떤 업무가 발생할지 모르기에 상시 대기 상태로 있어야 한다.
어쨌거나 별 이슈가 없는 한, 숙소에서 쉴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려 하는데, 근욱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너 그 얘기 들었냐?"
"무슨 얘기?"
"선배들이 하는 얘기인데, 새로운 인턴 들어오는 3월에는 병원에 큰 사고가 꼭 한 번 난다더라. 연국대병원의 유구한 전통이라던데?"
"악담을 해라."
내 핀잔에 근욱이는 낄낄대며 웃었다.
"뭐, 별일 있겠냐? 적어도 오늘 밤은 꿀 당직이길 바라야지."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오늘 야간 당직을 선다고 다음 날 쉬는 것은 아니다.
즉, 36시간을 일하고 다시 오후 6시가 지나야 오프(off)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좋은 컨디션으로 일하려면, 큰 이벤트 없이 잠을 잘 수 있는 꿀 당직은 필수다.
밤중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나저나 신경 쓰이네.’
아까부터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김정수 환자.
무시하려 했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건 왜일까?
나는 잠을 자려다 말고 책상 앞에 앉아 전공 서적을 펼쳤다.
근욱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설마 공부하냐?"
"그냥, 뭐 좀 찾아보려고."
"무슨 책이야? Coronary Heart Disease? 와, 인턴 생활 동안 전공 서적 펴고 공부하는 놈이 있다니. 레전드다 레전드."
근욱이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는 책의 내용에 집중했다.
내과 전공 서적에서 PCI 합병증과 관련된 항목들을 다시 한번 숙지하고, 태블릿 PC로 관련 논문들을 찾아보았다.
아무리 바쁜 인턴 생활이라도, 아직 머리가 말랑말랑할 때 최대한 많은 지식들을 습득해야 한다.
근욱이가 하품을 했다.
"열공해라. 나는 먼저 잔다."
"불 꺼 줄까?"
"됐어. 안대 끼면 된다."
근욱이는 침대 2층으로 올라갔고, 이윽고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쿠르르르릉―
……어떻게 사람 코에서 굴착기 소리가 날까?
누가 몬스터 아니랄까 봐.
나중에 근육량과 코 고는 소리 데시벨(dB)의 관계에 대해서 꼭 논문 한 편 써 봐야겠다.
그렇게 근욱이의 코골이를 배경음악 삼아 오랜만에 공부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덧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도 의자에 앉아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씨피알 엠, 씨피알 엠(CPR M). 본관 17층 서병동 처치실.>
벌떡!
천장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방송에 잠에서 깼다.
젠장, 지금이 몇 시지?
황급히 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 30분.
나는 번개처럼 튀어 나가며 가운을 걸쳤다. 아니, 걸치려 했다.
쿠웅!
"아오!"
테이블에 무릎을 박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고통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꿈은 아닌 모양이다.
콰앙!
"아오!"
커다란 소리에 옆을 쳐다보니, 근욱이도 허둥대며 일어나다가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덤 앤 더머가 따로 없다.
하지만 머뭇거릴 시간 따위 없이, 우리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CPR(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말 그대로,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상황!
병원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장 큰 응급 상황이다.
즉, 1분 1초 사이에 환자의 목숨이 오갈 수 있다는 뜻이다!
"뛰자!"
우리는 숙소 문을 걷어차다시피 하며 복도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