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3화 (3/241)

#3 인턴 신선한(2)

"왜, 막장 학교라는 말이 기분 나빠?"

"아닙니다."

김뱀의 물음에 나는 씁쓸한 미소로 대답했다.

표현이 거칠기는 해도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운대학교>.

최악의 경영 부실대학.

거듭되는 경영 악화와 임금 체불, 재단 비리 때문에 평판이 밑바닥으로 추락한 학교다.

졸업할 무렵에는 거의 폐허나 다름없는 건물에서 우중충한 캠퍼스 라이프를 지냈던 기억이 난다.

오죽하면 교수가 없어서 신입생들이 전공 수업을 받지 못하는 사태까지 발생했겠는가?

결국 일운대학교는 폐교되어 사라졌고, 300여 명의 의대생들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나는 마지막 졸업 학번이다.

부서진 난파선에서 간신히 뗏목을 붙잡듯, 연국대학교 인턴에 합격하게 된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마, 팩트를 얘기하는 것뿐이니까. 우리 병원에서 그런 학교 출신으로 적응하기 쉽지 않을 거야."

"각오하고 왔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선심 쓰듯 말을 이었다.

"뭐, 어느 대학교 출신이든 일만 잘하면 됐지. 여기에서 많이 배우고 가."

배우고 가?

은연중에 드러난 그의 메시지에 속이 쓰렸다.

어차피 나의 출신으로는 연국대에 발붙일 가능성이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실제로 이곳 연국대병원은 명성만큼 보수적인 학벌주의로도 유명한 곳이다.

인턴 동기 140명 중 타 대학 출신은 나를 포함해서 고작 15명뿐이니 말 다 했다.

"아, 혹시 모르지. 만에 하나 네가 올해의 인턴으로 뽑히게 된다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그가 피식대며 덧붙인다.

‘올해의 인턴’은 연국대병원에서 그해의 인턴 중 가장 뛰어난 1명에게 주는 타이틀이다.

그만큼 인턴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명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타교 출신인 나에게 과연 그런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김뱀 또한 그것을 알면서도 나를 비아냥거리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나는 가운 소매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두고 봐라.’

어떻게든 아득바득 살아남아, 여기에서 레지던트도 하고 펠로우도 할 거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곳 교수가 돼서, 연국대 출신들이 굽신굽신하는 것까지 보고 말 테다!

물론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젠장, 사회생활 힘드네.

앞으로 1년, 이곳에서 성질머리를 죽이고 생활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 * *

새벽 회진이 끝난 뒤, 이제부터 본격적인 하루 일과의 시작이다.

아침 컨퍼런스.

여기서부터는 바짝 긴장해야 한다.

교수부터 레지던트, 인턴, 병동 간호사 등등이 한자리에 모이기 때문이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어리바리 타는 놈으로 소문나기 십상이다.

특히 내 경우, 조금만 모자란 모습을 보여도 ‘역시 지방대 출신’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다.

김뱀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먼저 가서 동기들이랑 컨퍼런스 준비하고 있어."

"예. 저번처럼 샌드위치 가져다 놓을까요?"

"당연하지. 박 교수님 계란 알레르기 있으니까 주의하고."

"알겠습니다."

"저번처럼 명란젓 샌드위치 사 오면 죽인다. 그거 졸라 맛없더라."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며 끼어들었다.

"선배님, 여기 계셨네요!"

바로 옆 병동에서 일하는 인턴 동기 중 한 명이다.

조진기.

기분 나쁜 인상의 소유자다.

아마 관상학을 믿는 우리 아버지가 보았다면, 사람 뒤통수 치기 딱 좋은 놈이라고 했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 아침에도 식당에서 내 뒷담화를 구시렁거리던 녀석들 중 한 명이다.

그가 내 쪽을 보며 이죽거렸다.

"어, 선한아. 샌드위치 사러 가냐? 네 이름처럼 신선한 걸로 잘 사 와라. 나는 햄치즈로 부탁해."

"너는 왜 동기한테 심부름을 시켜?"

김뱀이 까칠하게 쏘아붙이자 조진기가 느물거리며 말한다.

"아, 선배님. 심부름이라뇨. 동기한테 친근한 마음으로 부탁하는 거죠. 그나저나 선배님한테 긴밀히 드릴 얘기가 있는데."

"무슨 얘기?"

"우리 학교 후배 중에…… 아, 이건 다른 학교 애들이 들으면 안 되는 얘기인데. 저쪽 가서 들으실까요?"

그렇게 말하며, 조진기는 김뱀에게 아부하듯이 찰싹 붙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게 혼자 남은 나는 앞머리를 후 불며 열을 식혔다.

젠장. 기분 참 더럽네.

연국대의 학벌주의라는 게 이 정도였나?

사회생활이고 뭐고, 성질대로 확 뒤엎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때 간호사 파트장이 스윽 다가와 말한다.

"드럽고 치사하죠?"

"예?"

"원래 이 바닥이 텃세가 심해요. 특히 연국대 의사들이 다른 학교 출신들 무시하는 거 보면 눈꼴시어 죽겠다니까."

간호사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아마 그동안 병동 생활을 하면서 이런 꼴을 많이 보아 왔던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누군가 내 편을 들어 주니 그나마 기분이 조금 풀리는 듯하다.

"뭐, 절이 싫다고 중이 떠날 수는 없잖아요."

"맞아요, 절에 왔으니 중이 적응해야지.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정답이야."

"그럼 전 잡일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파이팅!"

간호사 파트장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나는 인원수에 맞춰 샌드위치를 챙긴 뒤 회의실로 향했다.

딸깍―

불을 켜자 텅 빈 널찍한 회의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후우."

아무도 없는 회의실을 둘러보며, 싸늘한 공기를 들이마셔 본다.

<컨퍼런스>.

매일 아침 환자에 대한 이슈를 공유하는 시간이다.

환자의 예후와 치료 방식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들을 보면, 의사라는 직업이 새삼스레 멋있게 느껴진다.

애초에 내가 의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

돈, 명예 등등의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멋있어서’였다.

물론 지금의 나는 샌드위치나 배달하는 보잘것없는 인턴이지만…….

‘언젠가는 나도 내가 꿈꾸는 외과의사가 될 수 있겠지.’

의사로서 최고의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연국대학교 교수가 되는 상상을 잠깐 해 보았다.

어렸을 때 TV에서 보았던 백의신 교수처럼, 수많은 환자를 살리는 멋진 외과의사가 되는 것이 내 꿈이다.

그렇게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등 뒤로 부드러운 손길이 와 닿았다.

"선한 오빠."

"깜짝이야."

고개를 돌려 보니, 귀여운 강아지 같은 여자의 얼굴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라 연서야. 귀신인 줄 알았다."

"이거 먹어요."

"뭔데?"

인턴 동기, 이연서가 작은 목캔디를 내민다.

"근욱 오빠가 그러는데, 아까 밥 먹다가 졸았다면서요? 컨퍼런스 중에는 절대 졸면 안 돼요! 교수님들도 보고 있으니까."

"고맙다. 안 그래도 네가 놀라게 해서 잠 다 깼어."

"역시 동기밖에 없죠?"

"동기밖에 없네."

건네주는 목캔디를 받아 입 안에 넣자, 연서가 내 눈을 바라보며 살갑게 웃는다.

연서는 연국대 출신으로, 대학생 시절에도 밝은 성격과 남다른 외모로 유명했다고 들었다.

긴 속눈썹.

티 없이 하얀 피부.

밝은 성격과 화사한 미소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요소는 모두 가지고 태어난 듯한 모습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서에게 눈독 들이는 남자 레지던트들이 치열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물론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지만.’

나는 혼자 피식 웃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이곳 연국대학교에서 살아남는 것뿐이다.

인턴 생활에 적응하기도 바쁜데, 남들의 연애사니 뭐니 관심 가질 시간이 없다.

다만 연국대 출신 중에 연서처럼 착한 동기도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무슨 생각 해요?"

"아무것도 아냐. 그나저나 너네 병동은 별일 없어?"

"에효, 없긴 왜 없어요. 하루하루가 전쟁이에요. 썰 한번 풀어 드려요? 어제는 병동에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때마침 다른 사람들의 등장으로, 우리의 대화는 중간에 멈추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곧 회의실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 * *

컨퍼런스가 진행되었다.

먼저 주치의가 환자에 대해 브리핑을 하면, 여러 교수들이 앞으로의 치료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식이다.

전날 밤 예상치 못한 코스로 진행한 환자가 있다거나, 어려운 케이스에 대해 토론할 때에 의사들의 신경은 날카로워진다.

이때 인턴들의 역할?

말 그대로 ‘공기’다.

가만히 듣고 앉아 있는 것이 인턴들이 해야 할 전부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햇병아리들이 감히 끼어들 수 있는 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수 = 왕]

[펠로우 = 측근]

[레지던트 = 양민]

[인턴 = 천민]

의국의 계급도를 그려 보면 대충 이런 식이다.

오죽하면 대학병원에서 ‘인턴 아래에는 타일 바닥밖에 없다’는 말까지 있겠는가?

인턴은 인턴답게, 입은 닫고 귀만 열려 있어야 한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 갈 무렵, 내과 교수가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오늘 일정이 꽤 많네. 대한민국 아픈 사람들 전부 여기로 모였나?"

"하하, 그러게요."

"지난번 EBS 명의(名醫)에 교수님이 너무 스마트하게 나오셔서, 그 뒤로 환자들이 많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있던 펠로우들이 기다렸다는 듯 아부성 멘트를 날린다.

와 씨…… 저런 말을 부끄럽지도 않게 하다니. 저것이 바로 사회생활이라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혀를 내두르고 있는데, 교수의 느릿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가만있자, 오후에 EF(ejection fraction, 박출률) 35%에 PCI(Percutaneous Coronary Intervention, 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 받을 환자도 있었지?"

"예, 김정수 환자입니다. 오늘 동의서 받고 시술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고……."

그 뒤로 다른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나는 내용에 집중할 수 없었다.

잠깐. 방금 뭐라고 했지?

김정수 환자?

나는 구석에 앉아 경청하다 말고 미간을 구겼다.

‘분명히 어디선가 들었던 이름인 것 같은데…….’

그때, 불현듯 새벽에 꾸었던 꿈의 한 장면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CPR 중단하고 사망선언 하겠습니다. 김정수 환자 03시 22분…… 사망했습니다.

"아!"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생각났다. 꿈에서 본 환자!

그 환자의 이름이 바로 김정수였다.

아무리 꿈이었다 할지라도, 워낙 생생했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실존하는 환자 이름이었다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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