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화 (2/241)
  • #2 인턴 신선한(1)

    꿈을 꾸고 있다.

    그것도 아주 현실 같은 꿈을.

    ‘여기는… 어디지?’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의 모든 풍경이 색 바랜 수채화처럼 보인다.

    마치 오래된 필름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기도 하다.

    잠시 후, 나는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내가 수련의로 일하고 있는 연국대병원이다.

    정확한 층수까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본관 병동인 것 같다.

    그런데 꿈이 이렇게 생생할 수도 있나? 좀 당황스럽네.

    시야가 혼탁하다는 것 외에는 모든 감각이 생생하다.

    이를테면 저런 급박한 목소리들.

    "앰부(ambu) 쥐어짜!"

    "오투(O2) 풀(full)로 틀어 주세요!"

    "인턴들 정신 안 차려?!"

    나는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달라붙어 있는 침대 쪽을 말이다.

    "컴프레션 쉬지 마!"

    "예!"

    파악, 파악, 파악!

    한 인턴이 환자 위에 올라타 심폐소생술을 계속하고 있다.

    환자의 목숨이 초를 다투는 상황!

    나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간 뒤 깜짝 놀랐다.

    ‘헉…… 저건 나잖아?’

    하얀 가운을 입은 채 환자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기분 참 이상하다.

    유체 이탈이라는 게 이런 기분일까?

    아무리 꿈이라 할지라도, 내 모습을 제3자의 눈으로 관찰한다는 것은 소름 끼치도록 낯선 감각이다.

    파악, 파악, 파악!

    꿈속의 나는 쉴 새 없이 환자의 가슴을 누르고 있다.

    주위의 인턴들 모두 옷이 땀으로 얼룩진 것을 보아, 벌써 오랜 시간 동안 번갈아 가며 컴프레션을 했던 모양이다.

    "200줄 차지!"

    꽝!

    환자의 가슴에 전기충격이 가해진다.

    하지만 이미 가망이 없어 보인다. 인턴인 내가 보기에도 상황이 매우 안 좋다.

    "리듬이 안 돌아옵니다!"

    "이런……!"

    그리고 잠시 후.

    삐이익―

    "CPR 중단하고 사망 선언하겠습니다. 김정수 환자 03시 22분…… 사망했습니다."

    주치의의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들 침묵을 지켰다.

    누구도 뭐라 말을 꺼내기 힘든 분위기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잠시 후 교수는 착잡한 표정으로 레지던트와 인턴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수고했다. 너무 마음들 쓰지 마라."

    "예."

    "라인 정리하고, 보호자는?"

    "지금 가족들 모두 오고 있다고 해서……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주치의와 교수가 말한다.

    이후 몇몇 대화가 이어졌고, 사망한 환자의 시신 위에는 하얀 천이 덮였다.

    그렇게 또 한 명의 환자가 죽었다.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비극이지만, 큰 병원에서는 일상처럼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냉정하게 들리지만, 의사들에게는 그저 업무의 일부분인 것이다.

    "인턴들도 수고했다. 그만 내려와라."

    "……예."

    꿈속의 나는 땀에 전 채 환자의 몸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체념 어린 눈길로 환자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았다.

    살릴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고작 인턴 나부랭이인 내가,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싸늘하게 식은 환자의 마지막 모습은 마음에 각인된 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 * *

    "얌마, 신선한."

    "응?"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야가 점점 맑아진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더라?

    "밥 먹다 말고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어어."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인턴 동기 근욱이의 얼굴을 보며,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아침 6시.

    여기는 병원 구내식당이다.

    시선을 내리자, 막 입으로 가져오던 숟가락이 중간에 머물러 있는 것이 보인다.

    점점 감각이 돌아오면서 상황 파악이 된다.

    그러니까, 아침밥 먹다 말고 갑자기 꿈을 꾼 거다.

    미친 건가?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 병동에 있었던 것 같은데."

    "뭐? 병동?"

    "아니, 아무것도 아냐."

    나의 대답에, 근욱이는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얘가 인턴 며칠 하더니 정신 못 차리네. 밥 먹다가 졸기라도 한 거냐?"

    "그런가 보다."

    나는 웃으며 적당히 대답했다.

    하지만 좀 이상하다.

    보통 졸았다면 ‘내가 졸았구나’ 하는 느낌이 확실히 들지 않나?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거나, 숟가락을 툭 떨어트린다든가 하는.

    반면 내 경우는 좀 다르다.

    굳이 표현하자면 시간이 멈춰서 다른 공간으로 잠시 다녀온 듯한 기분이랄까?

    요 며칠간, 이런 일을 반복해서 겪고 있다.

    게다가 처음에는 흐릿했던 꿈의 내용이 점점 선명해지기까지 한다.

    이제는 꿈속 대사 하나하나와 사람들의 표정까지 전부 기억날 정도다.

    내가 석연찮은 기분을 떨쳐 버리려 고개를 흔들자, 근욱이가 농담처럼 말했다.

    "신경과 가 봐야 되는 거 아니냐?"

    "왜?"

    "나르콜렙시(narcolepsy, 기면증)일 수도 있잖아."

    "야, 무서운 소리 하지 마라."

    나는 진저리를 쳤다.

    근욱이가 말한 기면증이란, 낮에 갑자기 졸음에 빠져드는 증세를 뜻한다.

    하지만 내가 겪은 현상은 기면증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직 인턴 생활 적응이 덜 됐나 봐."

    "인정. 너무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지."

    "차라리 누가 한 대 쳐서 기절시켜 줬으면 좋겠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게."

    "크크, 내가 기절시켜 줄까?"

    "됐다. 네 팔뚝으로 맞고 죽을 일 있냐."

    우리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자, 함께 밥을 먹던 인턴들이 끼어들었다.

    "근데 진짜 이러다간 환자를 고치기는커녕 우리가 먼저 골로 갈 것 같지 않냐?"

    "그러게. 나는 탈모 생길 것 같아."

    "핑계 대지 마. 넌 딱 봐도 벌써 탈모여."

    "꺼져."

    "에휴, 대학생 때 공부하던 시절이 그립다……. 그땐 그렇게 책상 앞에 있는 게 싫었는데 말이야."

    서로 앞다투어 푸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물론 엄살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 인턴들은 녹초가 될 만큼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으니까.

    연국대병원이 인턴을 빡빡하게 굴리기로 유명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그때, 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인턴 신선한입니다."

    ―1705호 환자 chest pain(가슴 통증) 있대요.

    아이고.

    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환자들의 통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물론 불평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직 초짜라고는 하지만, 이제는 나도 학생이 아닌 엄연한 의사니까.

    "금방 올라가겠습니다!"

    병동 간호사의 말에 대답한 뒤 식사를 서둘러 마무리 지었다.

    "나 먼저 가 봐야겠다."

    "왜? 아직 아침 루틴 시작하려면 시간 좀 있잖아."

    "체스트 페인 걸렸대. 카디오(cardio, 심장 관련) 병동은 빠른 ECG(심전도 검사)가 중요하잖아."

    "뛰어야겠네."

    "응, 수고."

    드르륵!

    먹던 밥을 대충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의 마음으로 식당을 나섰다.

    그때, 멀찍이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몇몇이 구시렁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는 엄청 열심히 하네."

    "혼자서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냅둬, 열심히 하는 게 뭐 어때서. 지방대 출신이니까 저렇게라도 해야지."

    나는 몇 명의 삐딱한 동기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뒷담을 깔 거면 까라지.

    나는 나대로 열심히 할 테니까.

    * * *

    타다닥!

    하얀 가운을 휘날리며 지상 1층에 올라섰다.

    곧 천장이 높게 뚫린 대리석 로비가 눈에 들어온다.

    아직 새벽이라 한산하지만, 이제 곧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찰 예정이다.

    하루 8천 명의 외래환자와 2천 명이 넘는 입원환자가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니 말이다.

    당연히 이곳에서 근무하는 의료인들 역시 수천 명에 달한다.

    새삼 대단하다. 내가 이런 커다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가 되다니…….

    "아직도 실감이 안 나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대리석 벽면에 크게 새겨진 병원 로고를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연국대학교 병원>.

    연국대는 모두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이다.

    당연히 병원 또한 그만한 명성을 자랑하고 있으며, 소위 ‘대한민국 빅5 병원’으로 분류된다.

    내가 이곳에서 일하게 된 것은 지난 6년간 집요한 노력 끝에 간신히 잡은 기회였다.

    고달픈 인턴 생활?

    몇몇 동기들의 텃세?

    까짓것, 아무것도 아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의 각오를 생각하면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다.

    내가 연국대 인턴에 합격했을 때, 기뻐하던 가족들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오늘도 잘하자."

    엘리베이터에 도착한 뒤, 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목에 걸린 IC카드를 바로잡자 ‘의사 신선한’이라는 글자 위에 연국대학교 병원 마크가 선명하다.

    다시 한번 가운을 입은 스스로의 모습을 점검한 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한 쌤."

    병동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서먹했지만, 간호사 선생님들과 친해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친누나들이랑 놀아서 그런가, 나보다 나이 많은 누나들과 대화하는 일이 익숙하다.

    그중 파트장 간호사가 말을 건네 온다.

    "피곤하죠?"

    "피곤하긴요, 쌩쌩합니다."

    "거짓말. 뽀얗던 얼굴 푸석해진 거 봐."

    "정말요? 큰일 났네…… 얼굴로 먹고사는 의사가 제 꿈인데."

    내가 얼굴을 만지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간호사들이 재미있다는 듯 꺄르르 웃는다.

    "농담이에요. 선한 쌤은 아직 파릇파릇하니까 걱정 마요."

    "맞아, 선한 쌤처럼 잘생긴 인턴만 들어온다면 우리야 눈 호강이지 뭐."

    "빈 말씀이라도 감사하네요."

    나는 씩 웃으며 스테이션 의자를 빼고 앉았다.

    오전 6시 반.

    인턴의 하루를 시작한다.

    가장 먼저 웹에 접속하여 오늘의 할 일 리스트를 빠르게 확인한다. 급한 일을 선별하고, 일부는 차후로 미뤄 둔다.

    콜을 받았던 환자의 ECG를 찍고 오는데, 어제와 결과가 달라진 점이 눈에 띈다.

    나는 농담기를 빼고 진지하게 말했다.

    "이거 주치의 선생님 노티(noti)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요? 어떤데요?"

    "A. fib(atrial fibrillation, 심방세동)인데, 이것 좀 보세요."

    나는 손가락으로 불안정한 파형을 가리켰다.

    보아하니 아직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분명 놓치지 않고 체크해야 하는 부분이다.

    담당 간호사는 흥미롭다는 듯 나를 슬쩍 올려다보며 말했다.

    "선한 쌤, 첫 턴인데도 꼼꼼하게 잘 체크하시네요? 이대로만 인턴 생활 하시면 사랑받으시겠어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간호사 선생님이 말하는 ‘첫 턴’이란 3월 신입 인턴을 뜻한다.

    아직 모든 것이 어설프고 모자란 시기이기에, 선배 의사들에게는 물론이고 간호사들에게도 무시받기 일쑤다.

    그렇기에 더욱 정신을 차리고 좋은 첫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때, 타이밍 좋게 우리 병동 레지던트 선생이 들어왔다.

    내가 먼저 씩씩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온다.

    내과 레지던트 3년 차 김범수, 통칭 <김뱀>.

    특히 인턴들에게 무섭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성격도 성격이지만, 특히 쫙 찢어진 눈매가 매서워서 쉽게 말 붙이기 어려운 타입이다.

    ‘뱀’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것은 아니리라.

    그가 까칠한 말투로 묻는다.

    "환자가 어쨌다고?"

    "여기 있습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ECG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어제저녁에 normal sinus rhythm(정상동리듬)에서 금일 오전에 A. fib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어제 밤 기록은?"

    "여기 준비해 놨습니다."

    "그래?"

    김범수 선생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는 곧 내가 건네준 serial ECG를 확인하고, 이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이렇게 해야지. 인턴이 이렇게 잘 정리하고 판독까지 해서 노티하면 좋지."

    휴, 다행이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콜이 오자마자 일찍 올라와서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레지던트들은 인턴을 평가하는 존재들이니 좋은 인상을 주려 노력해야 한다.

    김범수 선생은 나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이름이 신선한이라고 했던가?"

    "예."

    "이름 한번 특이하네. 우리 학교 후배는 아닌 것 같은데, 어디 출신이야?"

    "저 일운대학교 나왔습니다."

    "일운대? 아, 그……."

    갑자기 그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내 출신대학을 말하면 모두들 한결같은 표정들을 짓는다.

    그야 워낙 악명이 자자하니까.

    "일운대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여기로 온 인턴이 있다더니, 그게 바로 너였구나."

    "예."

    "참 나, 막장 학교 출신이 우리 병원에 오는 걸 다 보네."

    김뱀이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는다.

    그의 노골적인 표현에 울컥하는 마음이 든다.

    뭐 이딴 인간이 다 있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