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에필로그 1.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려앉은 에즈히나 카페 거리.
강변에 자리한 야외 테라스에 한 무리의 영애들이 앉아 있었다.
만개한 들꽃과 반짝이는 윤슬을 배경으로 두고 있지만, 그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바로 투표하죠.”
아리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로 남주 유랑단 공연을 보러 가고 싶은 영애?”
6명의 영애 중 2명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눈치를 보던 푸른 머리 영애도 손을 들었다.
남주 유랑단.
의 여주 시나리오가 공개된 후. 100개의 시나리오 중 몇 개는 플랫폼 베스트셀러 순위에 진입했다.
예상은 했지만 AI가 매긴 순위는 대중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랭킹 1위를 했지만, 베스트셀러 순위에서는 200위였나? 300위였나. 어쨌든 공개된 순위 중 가장 아래쪽에 잠시 올랐다가 아예 차트 밖으로 밀려났다.
반면 87위를 했던 남부 소녀는 플랫폼에서 한 달도 넘게 1위와 5위 사이를 오가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당연히 남주 유랑단을 보러 가아죠! 솔직히 다들 나가서 그 소설 읽었잖아요! 어떻게 이게 의견이 나뉠 수가 있어요?”
아리나가 기가 막힌다는 듯 테이블을 손으로 탁 쳤다.
나는 고민하다 손을 들었다.
“오, 4명!”
솔직히 보러 가고 싶었다.
남주 유랑단.
단어에서 느껴지지만, 그 남부 소녀로 빙의한 영애는 역하렘을 너머 남주단을 꾸려 플레이를 진행했다.
무려 10명의 남주를 슬롯에 넣으신 거다.
그녀는 마치 아이돌 키우기 게임처럼 그들과 전 대륙을 유랑하며 여러 무대를 선보였다.
“시에나 영애, 잘 생각해 봐요. 성기사 남주와 암살 전문 용병 남주가 추는 군무를 보고 싶지 않아요? 그 케미가 기대되지 않냐고요.”
와, 진짜 보고 싶어.
유랑단의 단장이자, 제작자인 그 남부 소녀 영애는 운이 좋았다. AI의 묘사력이 남달랐다.
매번 으르렁거리던 두 남주가 결국 무대에서 화합하는 장면을 읽을 때 나는 내 눈앞에서 꽃가루가 뿌려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시에나가 고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게 좀 의외라 고개를 갸웃했다.
시에나는 여기서도 오페라를 좋아해서 매 공연을 열심히 쫓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10가지 매력을 가진 10남주의 공연을 마다하다니.
우정, 사랑, 감동, 역경, 카타르시스가 전부 담긴 앙상블을 거부한다고? 시에나가?
그때 시에나가 입을 열었다.
“저는 여기 돌아오자마자 알아봤는데, 티켓팅 전쟁이 어마어마했어요. 지금은 기차 예매도 끝나서 마차를 타고 가야 한다고요. 영애들 기억하죠? 이제 타임워프도 하루로 제한되는 거.”
시에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하나하나 짚었다.
“앞으로 3일 동안은 매일 열 시간 넘게 마차를 타야 한다고요. 그러다 도적이라도 만나면 고생을 해야 하는데. 알잖아요. 우리는 여주라 기본적으로 외진 데 가면 납치 옵션 따라오는 거.”
시에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최소 3일에서 7일은 대환장 파티 전개를 겪어야 하는데, 난 자신 없어요. 그렇게 오래 접속 안 하고 버티는 건 더 자신 없고요.”
그녀의 말에 숙연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여름국 투어 좋잖아요. 현생에 가도 여름국 한식의 맛을 잊을 수가 없더라고요. 저 지난여름에 여름국 냉면 먹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시에나의 말에 나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저 투표 바꿀래요. 여름국 투어로 표 변경해 주세요!”
우리는 지금 투표 중이었다.
재접속 기념으로 다 같이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장소를 정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일주일간 긴 토론을 이어 나간 끝에 겨우 2개로 후보군을 좁혔다.
“그럼 이번엔 여름국으로 한식 투어 가고 싶은 영애는 손들어 주세요.”
아리나의 말에 모두가 손을 들었다.
아리나는 아쉬운지 한숨을 쉬었다. 시에나가 그녀를 위로하듯 어깨를 쓸며 말했다.
“한 달만 기다려요. 제가 남주 유랑단 영애한테 후원한다고 제안서 보냈으니까 아마 올해 안에 황도로 올라와서 공연할 거예요. 그때 VIP석에서 같이 즐겨요.”
“정말요?!”
아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10남주를 정말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아리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귀를 쫑긋 세우고 안면에 미소를 걸었다.
“뭐야, 투표할 필요도 없었네요! 그럼 다음에 남주 유랑단 올라오면 그때 다 같이 가는 거예요?”
“우리 이번에도 응원봉 만들까요?”
“아, 마지막 연회 때 마녀 영애님이 만드신 거 말하는 거죠? 너무 좋아요!”
“흑, 신난다!”
그렇게 성공적인 회담이 끝나고 우리는 여름국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
“영애, 비에른 선택한 여주 없다고 했죠?”
푸른 머리 영애가 내 짐 가방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그러자 옆에 선 붉은 머리 영애가 입을 벌렸다.
“이게 다 스크롤이에요?”
“아, 네.”
“아니, 무슨 손수건은 또 이렇게 많아요?”
“이거 그 마담 작품 아니에요?”
여름국 환원의 고급 여관 안. 아예 건물 한 채를 빌린 탓에 우리는 함께 지냈는데 그러다 보니 사생활이 없었다.
싫다는 건 아니었다.
정신이 없을 뿐이지.
우리는 짐 가방을 풀고 서로의 소지품을 구경하고 있었다.
“비에른 재력 무슨 일이에요. 저 남주 교환할래요.”
“아, 이 손수건은 비에른이 아니라 엘런이 준 거예요.”
“네? 이렇게 많이요?”
“집에 더 있어요. 아니 근데 웬디는 왜 이렇게 손수건을 많이 챙겨 줬대.”
나는 꺼내도 꺼내도 계속 나오는 화려한 손수건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내가 옷이 몇 벌 없다 보니, 여행 가서 기죽지 말라고 그나마 가장 화려한 소품인 손수건을 잔뜩 챙겨 준 듯했다.
“자, 짐 정리 끝났으면 같이 환원강에 고기 구우러 갈까요?”
아리나가 손을 짝짝 쳤다.
“좋아요.”
“후식은 냉면으로!”
“아, 행복하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새 나왔다.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 여름국에 왔는데 한복을 입어야죠.”
시에나가 소란을 누르며 옷장을 가리켰다.
미리 주문했던 한복이었다. 후궁 영애들이 우리의 사이즈를 알아내고 제작해 준 고운 옷이었다.
“아, 진짜 너무 예쁘다.”
“빨리 입어 봐요.”
“머리는 내가 땋아 줄게요.”
여행에 들뜬 영애들의 웃음소리가 누각 안으로 울려 퍼졌다.
***
“더는 못 먹겠어요.”
“정상이에요. 아니 여름국은 왜 길거리 음식도 맛있는 거예요?”
붉은 머리 영애가 울상을 지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나는 주머니를 열어 준비한 환약을 나눠 주었다.
“영애들 이거 드세요.”
“응? 이게 뭐예요?”
“소화제예요.”
여름국의 필수템.
몰입감 항목 10점을 준 영애로서 이 정도 준비는 필수였다.
“헉, 들어 본 거 같아요. 이거 여름국에서 구매해야 하는 필수 기념품 리스트에 들어가잖아요.”
“네! 이거 정말 효과 좋아요. 그냥 씹어 드시면 돼요.”
“고마워요.”
그들은 금세 편안해진 표정을 지었다.
“속 괜찮아진 거 같은데 3차 갈까요?”
“사실 여기까지 왔는데 동동주를 빠뜨린 게 아쉽긴 했어요.”
영애들은 금세 웃으며 어느 가게로 가 볼지 고민했다. 나는 그 활기찬 분위기가 좋아서 따라 웃다 고개를 들었다.
맑은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
적당하게 식은 여름 바람이 따뜻하게 살갗을 간질이고, 귓가로 들리는 웃음소리는 끊임없다.
즐겁다.
나는 선명하게 새겨지는 그 감정을 느끼며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 순간 한눈을 파는 바람에 걸어오던 행인과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삿갓을 깊게 내려 쓴 행인은 고개만 까닥여 사과를 받았다.
“뭐야, 서사가 느껴지는데요. 저 삿갓 아래 용안이 숨겨져 있는 거 아닐까요?”
아리나가 장난치듯 내게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장난에 따라 웃지 못하고 행인의 뒷모습을 계속 쳐다봤다.
잠깐이었지만, 삿갓 아래로 행인의 얼굴이 드러났었다.
끈질긴 시선을 느꼈는지 행인이 뒤돌아보며 살짝 삿갓을 들어 올렸다.
다시 행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백옥을 깎아 만든 듯한 매끄러운 윤곽과 붉은 입술. 그리고 가는 눈썹 아래 자리한 깊은 눈매.
내게 #환생물 키워드를 주었던 그 동양 여자였다.
“저 잠깐 갈 데가 생각나서, 숙소로 바로 갈게요. 조금 이따가 봐요.”
“영애! 어디 가요?!”
아리나가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행인이 사라진 쪽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인파 속에 파묻힌 행인은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나를 애태웠다.
저거 놓치면 안 되는데!
나는 삿갓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전속력을 다해 달렸다. 간간이 사람에게 치여 속도가 느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그때, 그녀가 골목으로 걸음을 돌리더니 자취를 감쳤다.
“안 돼!”
나는 그녀가 들어간 골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골목 안에 거대한 건물이 한 채 있었다. 노란 등이 가득 매달린 5층 높이의 목조 건물이었다.
2층의 열린 창문으로 춤을 추는 여인들이 보였고, 술에 흥건히 취한 웃음소리가 어둑한 거리로 흘러나왔다.
여긴 유명한 술집이었다.
여름국 영애들이 정치 서사를 준비할 때, 남장을 하고 들어가 흑막과 만나는 장소.
대체 왜 여기로 들어간 거야?
버그 자식이 이 위험한 장소로 들어갔다니 너무나 불길했다.
……끼어들지 말고 그냥 갈까.
만나면 멱살을 잡고 욕을 퍼부어 주려고 했는데, 위험한 전개에 발을 들이게 될 것 같아 겁이 났다.
망설이던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돌아갈까 치열하게 고민하는데 3층의 열린 창문으로 삿갓을 쓴 행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안내를 받고는 어느 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과거로 보내 질식사하게 만든 놈의 얼굴이 눈에 담기는 순간 다시 가슴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저놈을 이대로 보내 주면 화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무 궁금했다.
왜 하필 나를 골라 망할 환생물 키워드를 준 건지.
호기심과 분노를 누르지 못한 나는 결국 주머니에 있던 스크롤을 꺼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찢었다.
장맛비에 젖은 흙바닥처럼 말랑한 바닥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감촉은 금세 사라지고 단단한 바닥이 발을 받쳤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곳은 좌식 테이블이 놓인 방이었다. 테이블 앞에 삿갓을 벗어 둔 버그와 갓을 쓴 유생이 마주 앉아 있었다.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버렸다.
“아니…….”
유생은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 옥색 도포 자락과 어울리는 곱상한 얼굴의 남장 여주를 보는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영애가 왜 여기 있어요?”
술잔을 입에 댄 채 눈을 크게 뜬 디아나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다시 고개를 확 돌려 버그를 노려봤다. 그리고 그대로 뛰어가 버그의 멱살을 잡았다.
“이 자식이! 디아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그 순간이었다.
“영애, 진정해요! 그러지 말아요!”
디아나가 따라와 내 손을 잡고 말렸다.
“영애,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속지 마세요! 이 여자 버그예요! 제가 이 여자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무튼 영애! 이 여자 말은 한 귀로 흘리세요!”
디아나가 웃으며 한쪽 눈을 찌푸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한숨에 젖은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영애보다 제가 더 버그를 잘 아니까 괜찮아요.”
“더 잘 아신다고요?”
나는 다시 버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버그의 멱살을 더 거세게 움켜쥐었다.
“디아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대체 어떻게 아는 사이인데!”
팔랑팔랑 내 손에서 흔들리던 버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웃어? 웃음이 나와?!”
버그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참았다.
그녀는 내 손목을 움켜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디아나를 걱정해 줘서 고맙기도 하고. 달려드는 게 무섭기도 하고.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인지.”
“뭐라는 거야!”
헛소리에 눈을 찌푸리며 묻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디아나를 걱정할 필요 없어요. 디아나는 제게 소중한 사람이거든요.”
“뭐?”
AI답지 않은 따뜻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리고 갑자기 왜 존댓말인데?
“……너 대체 영애랑 무슨 관계인데.”
그녀가 시선을 틀어 다정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디아나.”
버그가 눈을 휘며 고백했다.
“제 딸이에요.”
“…….”
나는 디아나를 쳐다봤다. 그러자 디아나는 무언으로 긍정했다.
순간 손에 힘이 풀렸다.
나는 뭘 마시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저 곱상한 버그의 취향이 막장 드라마였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