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오랫동안 의식을 잃었다고 하는데 몸은 건강했다. 수많은 계단을 오르는데도 전과 달리 숨이 차지 않았다.
[신체 능력을 업그레이드했습니다. 기본 체력이 50% 증가했으니 마음껏 달려 보세요!]
AI는 마치 튜토리얼을 제안하는 친절한 NPC처럼 설명했다.
나는 그 말을 무시했다.
숨이 차지 않는다고 했지, 안 힘들다고는 안 했잖아.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사람을 압박하는 저 거대한 벽화마저 반가운 걸 보니 정말 어지간히도 다시 돌아오고 싶었나 보다.
시린 코끝을 손으로 쓰는데 알람이 들렸다.
메시지 수신 알람이었다.
[안젤리카: 데이지!]
안젤리카였다.
[안젤리카: 데이지도 들어왔어요?]
반가운 목소리에 울컥했다.
[안젤리카: 다시 오길 잘했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저도요. 지금 일어난 거예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두서없는 질문이 터졌다.
[안젤리카: 네, 다행히요. 우리 언제 만나죠?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그건 어려울 거 같아요. 저 지금 마족 지대에서 일어나서…….]
[안젤리카: 네?]
안젤리카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제가 사계국으로 갈게요! 봄국에 먼저 갔다가 겨울국으로 갈 테니까 거기서 만나요. 사계국으로 넘어가면 바로 연락할게요.]
안젤리카는 내가 마족 지대에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듯했으나, 빠르게 받아들이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아마도 그녀를 찾아온 누군가에게 정신을 빼앗긴 것 같았다.
연락 기다리겠다는 말만 남긴 채 그녀가 사라졌다.
마음에 파도가 이는 기분이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를 따라 설렘이 이리저리 몸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끼이이익.
나는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작게 벌어진 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도서관 내부가 보였다.
꽃봉오리처럼 둥글게 공간을 감싼 벽과 창문.
하얀 눈에 반사된 오후의 햇살이 부드럽게 실내를 채웠다.
나는 그 따스한 빛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책과 나무 책장의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대리석 바닥을 토닥이는 발걸음 소리가 고막을 간질인다.
내가 이곳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오감으로 전해졌다.
나는 아득히 높은 책장과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가로 열기가 올라왔다.
수십 년이 지나도 결국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방법을 찾고 있는 요한을 떠올리니 조금 먹먹해졌다.
이 공간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아서.
이곳을 의지하며 홀로 오랜 시간 답을 찾아 헤맸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을 뒤져 왔을지,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읽으며 기다렸을지 상상이 가지 않은 탓이다.
아직 나는 그 감정을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었다.
다만, 혼자 헤매지 않도록 옆에 있고 싶었다. 같이 하면 더 빠르고 덜 불안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요한의 흔적을 따라 도서관을 걸었다.
어디선가 책장을 넘기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둥을 지나며 고개를 들었다.
책장은 듬성듬성 책이 비어 있고, 떨어진 책들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그렇게 배열이 깨진 곳들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먼지가 뽀얗게 낀 유리창을 지나는 순간 시야가 환해졌다. 갑작스레 쏟아진 밝은 햇살에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부옇게 탈색된 세상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차츰 빛에 적응한 시야가 그 형체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은빛 머리카락과 거대한 태를 감싼 느슨한 셔츠가 보였다. 요한은 피곤한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다가 손에 든 책을 대충 던지고 새로운 책을 꺼냈다.
집중한 탓인지, 아직은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그는 내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놀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느 순간 요한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이 눈에 담기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췄다.
시간이 정지한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눈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느리게 인지됐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천천히 떨어지지는 푸른 시선. 책 커버를 쥔 손등 위로 돋아나는 힘줄. 햇살 안에서 반짝거리는 먼지. 마침내 책을 내려 두는 요한의 모습이 천천히 눈에 담겼다.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나는 다시 걸음을 뗐다.
속도는 그대로였을 텐데 요한의 모습은 아까보다도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는 금세 내 앞에 도착했다.
“[어떻게…….]”
요한이 커진 눈으로 묻는 찰나 나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얇은 막에 갇혀 있던 감정이 터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정말 요한이 보고 싶었다.
외면해 왔던 감정은 홍수처럼 밀려와 나는 금세 그 감정에 잠식됐다. 그래서 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요한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진 걸 알면서도 고개를 떼지 못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 지금 얼굴을 보여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들키지 않으려 노력한 보람도 없이, 울음소리가 새 나왔다. 그러자 작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한숨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머리 위로 온기가 내려앉았다. 커다란 손은 내 머리를 쓸며 나를 제 품으로 조금 더 깊이 끌어안았다.
“[기다렸습니다.]”
오랜 시간 그리워했던 다정한 목소리가 고막을 다독였다.
나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요한은 말없이 나를 안은 채 가만히 내 등을 토닥였다.
한참 후에 진정된 나는 몸을 떼어 냈다.
“[눈이 부으셨습니다.]”
“그런 거 굳이 알려 주지 말아요.”
요한이 웃으며 내 눈가를 닦아 주었다. 따라 웃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꽃향기가 밀려왔다. 그리고 무언가가 부드럽게 내 허리를 감쌌다.
나무줄기였다.
서재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자연스럽게 나를 당겨 요한에게서 떨어뜨렸다.
“묻지 않고 함부로 손을 대는 건 예의가 아니지.”
모순되게도 이능으로 내게 나뭇가지를 댄 알렉스가 말했다.
내용 탓인지 정말 나는 모순된 감정을 느꼈다.
다짜고짜 이능을 쓴 게 짜증이 나야 할 텐데, 고막을 파고든 낮은 목소리가 반가웠다.
뒤를 돌아보니 입매를 기울인 채 눈웃음을 짓고 있는 알렉스가 보였다.
“알렉스!”
전하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는 게 뒤늦게 생각이 났지만 늦었다. 이미 알렉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이라도 다시 예의를 갖춰 인사할까 하는데 알렉스가 넋을 놓은 목소리로 물었다.
“알렉스?”
그리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편하게 불러 주는 건 처음이네.”
그는 내 몸을 감싼 보드라운 줄기를 풀어 꽃을 피웠다. 마치 손처럼 다가온 줄기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마음에 드는데.”
그가 웃으며 말했다.
뭐가 마음에 든다는 건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 의뭉스러운 목소리도 반가워서 꽃을 받았다. 그러자 요한이 가로챘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무거운 거 들면 안 됩니다.]”
그때, AI가 이상한 제안을 했다.
[호감도 경쟁 설정을 ON 하시겠습니까?]
호감도 경쟁?
경쟁이라는 단어에 본능적으로 불쾌함을 느끼는데 AI가 설명했다.
[남주에게 느끼는 호감도를 감지 후 자동으로 남주 변경을 추천해 드립니다.]
AI는 내 눈앞에 원그래프를 띄웠다.
[매월, 매주 유저의 설정에 따른 호감도 포트폴리오 추천으로 자동 남주 변경이 가능합니다.]
내가 느끼는 호감도에 따라 알아서 남주를 변경해 주겠다는 소리였다. 유능한 자산관리자처럼 속삭인 AI에게 질겁한 나는 속으로 정색했다.
‘됐어요!’
[간략 남주 호감도를 제안해 드릴까요?]
원그래프 분석이 싫다는 뜻으로 오해했는지, 이번엔 막대그래프로 1위, 2위를 표현했다.
[현재 ‘전지적 여주맘 시점’ ON 상태입니다.]
[유저를 위한 최적화 남주 탐색 기능을 OFF 하려면 설정 탭에서 확인해 주세요.]
업데이트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안내서에 기재되지 않은 것들도 있는 모양이다.
아니, 다 떠나서.
……여주맘 시점이라니.
유저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인 건 알지만, 과하게 내 위주였다.
나는 어깨를 내리고 한숨을 흘렸다.
저 막장스러운 기능과 네이밍을 보니 내가 들어온 세상이 어떤 곳이었는지 새삼 실감이 난 탓이다.
‘나중에. 설정은 다음에 얘기해요.’
[그럼 이대로 게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는 실시간으로 기능이 업데이트되는 만큼 실시간으로 수정도 가능했다.
나는 웃으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른 건 천천히 알아볼게요.’
지금도 너무 만족스러운걸.
이 평온함과 기쁨도 벅차서 지금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었다.
그 마음을 이해했는지 AI는 더 설득하지 않고 물러났다.
[1차 베타 테스트와 동일한 설정으로 시작하시겠습니까?]
지난 설정 그대로 플레이를 하겠냐는 물음에 나는 긍정했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1차 베타 테스트 - 프로젝트 ‘본편’의 데이터가 이관되었습니다.]
[Uploading…….]
“돌아가지. 이에테르 공작이 많이 걱정하고 있어. 엘런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이에테르가를 찾아왔었고.”
반가운 이름에 귀가 쫑긋 섰다.
“비에른은 잘 지내나요? 엘런은요?”
기쁨을 감추지 않으며 묻자 요한이 내 팔을 잡았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말했다.
“[식사부터 하십시오.]”
“맞다. 아까 의원을 만났는데 수프를 만든다고 했어요. 기다릴 텐데 내려가 봐야겠어요.”
“[같이 가요.]”
“데이지.”
의원이 생각나 요한에게 다급하게 말하는데, 알렉스가 나를 불렀다.
눈웃음이 아까보다 짙어졌다.
“서운하다니까. 알아듣게 사계국 말로 얘기해.”
“아니, 지금까지 가을국어로 말했잖아요, 전하.”
전에도 이런 대화를 한 기억이 있었다. 그대로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건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그때, 경쾌한 알람이 울렸다.
[1차 베타 테스트 - 프로젝트 ‘본편’의 데이터 이관이 완료되었습니다.]
달콤한 꽃향기와 포근한 서재 냄새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맑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지금부터 2차 베타 테스트 - 프로젝트 ‘에필로그’가 시작됩니다.]
나는 이 따뜻한 세상에서 즐거운 시간을 이어 나갈 각오를 하며 그들과 함께 도서관 밖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