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워낙 먼 지방으로 내려갔다 온 탓에 집으로 돌아오니 밤이었다. 정말 피곤했다.
왜 굳이 나를 데리고 그 먼 곳으로 등산하러 가나 했더니, 나를 아버지의 오랜 은인인 스님에게 보여 드리는 게 목적인 듯했다. 주변에 볼 것도 많은데, 사찰을 내려오기 무섭게 집으로 돌아왔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마음고생을 하는 것 같아 신경 써 오신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감정을 잘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탁.
방문을 여는데 바닥에 있던 상자에 문이 걸렸다.
다시 반송할 생각으로 대충 덮어 둔 상자가 살짝 벌어져 있다.
안내서에는 2차 베타 테스트를 원치 않으면 반송해 달라는 부탁이 적혀 있었다.
2차 베타 테스트는 1차와는 많이 달랐다. 그 어떤 물질적 보상도 없었다. 미끼로 현혹하지도 않고, 주의사항을 작게 줄여 숨기지도 않았다.
그들은 시작일에 맞출 필요 없이 원하면 언제든 접속해도 좋지만, 이 기기를 보는 게 불쾌하거나 트라우마를 유발한다면 기꺼이 반송해도 된다고 말했다.
나는 불쾌하지도 트라우마를 느끼지도 않았다.
그 반대였다.
이 작은 기기들은 유혹적이었다.
다시 만나고 싶었다. 오히려 너무 들어가고 싶어서 무서웠다. 이건 정상적인 감정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손끝으로 벌어진 상자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답답해서 잠자리에 들 수도 없었다.
“하.”
모르겠다.
나는 그 세계에서 지내봤다.
그건 삶이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얽히고 또 나를 아껴 주는 이들과 해하려는 이들 사이에서 살아갔다.
모든 경험은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내가 현실에서 경험한 것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친구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던 것처럼, 그 안에서 유저들과 비슷한 감정을 나누었던 즐거움이 몸에 남아 있다.
물론 모두가 좋았던 건 아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존재했고, 그 차이 때문에 힘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만나고 싶었다.
나쁜 기억 몇 조각 때문에 포기하기에는 좋은 기억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세상이 그렇지 않나. 나쁜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고. 그 안에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그 수많은 경험 속에서 내게 소중한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아 가고.
나는 창밖의 어두워진 밤하늘을 쳐다봤다.
가을이 가까워지는 늦여름 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기울어진 초승달 주변으로 작은 별들이 보인다.
지금 이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별이 쏟아질 듯 하늘이 깨끗한 곳도 분명 존재했다.
나는 지금 눈에 담기는 하늘 위로 내가 기억하는 밤하늘을 겹쳐 보았다.
남색 하늘에 설탕 가루처럼 뿌려진 별들이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청록빛으로 밝아지는 하늘도.
나는 시선을 내렸다.
아침을 기다리며 제 동생들을 챙긴다는 첫 별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새까만 서울의 하늘에서는 그 첫 별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다정한 이야기를 해 주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꾹꾹 눌러 온 그리움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 몸집을 부풀렸다.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심장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울컥 솟은 감정들이 온 감각을 짓눌렀다.
제대로 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벽시계를 향했다.
11시 52분.
아직 8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상자를 열어 안내서를 켰다. 그리고 다시 한번 꼼꼼하게 접속 방법을 읽었다.
2차 베타 테스트는 그 이상한 헬멧을 쓸 필요가 없었다. 대신 손목에 워치를 감으면 된다고 했다. 워치가 혈류로 뇌에 신호를 보낸다고 설명했다.
나는 워치를 차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데 결심을 하고 나니, 이제는 불안함이 밀려왔다.
‘이게 될까.’
기껏 다시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되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나는 그 불안함을 어찌하지 못하고 태블릿을 고쳐 잡았다.
뭐라도 읽고 싶었다.
시간이 3분 정도 남아서 나는 빠르게 내가 사라진 이후의 일을 읽었다. 에서 깨달은 건 기회가 될 때 정보는 무조건 읽어 둬야 한다는 거였다.
내 부록을 읽던 나는 경악했다.
“뭐? 내가 의식불명이라고?”
NPC로 움직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뿐이 아니었다.
사계국을 덮친 기이한 병으로 의식을 잃어버린 환자들이 속출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여성이었고 지금까지 확인된 환자는 100명이었다.
“미친…….”
딱 봐도 유저들이 모두 쓰러진 걸로 설정된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목의 워치를 만졌다.
……이거 들어가도 되는 걸까?
라리사 황녀가 의식불명이 된 세상 속의 봄국 황제.
안젤리카와 리베라가 쓰러진 겨울국 황성에 있을 전(前) 흑막 녹스와 전(前) 재앙 마왕.
심지어 여름국은 산 하나를 날려 버리는 후궁과 청순한 얼굴로 뒷공작을 완벽하게 해내는 국서가 아내를 잃었다.
……난리 났겠는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황족과 귀족 유저가 없는 가을국.
그곳은 멀쩡할 것이다.
안일하게 다음 문장을 읽던 나는 소리를 질렀다.
“아니! 알렉스가 왜 비에른이랑 살아?!”
알렉스는 황위 계승권을 포기했다고 한다. 봄국으로 가기 위해서. 지금 그는 비에른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다.
비에른은 혹시라도 그가 이능으로 제 사촌 동생을 치료할 수 있을까 기대하며 지내는 걸 허락했지만, 애초에 성격이 상극인지라 하루하루 스트레스로 말라 갔다.
“아아, 내 설정 왜 이 모양인데!”
워치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내가 들어갈 세상은 혼돈 그 자체였다.
나는 긴장감에 입술을 깨물며 계속 내 부록을 읽었다.
알렉스는 이능을 썼지만 나를 치료하지 못했다.
그 소문에 모두가 희망을 잃었다.
생명의 이능의 힘을 얻으려 무작정 이에테르가를 찾아왔던 봄국 황제가 그 사실에 오열하다 돌아갔고, 여름국 황실의 호위이자 황제의 형제들 또한 알렉스가 나를 일으키지 못한 걸 보고 좌절했다.
그러나 소문은 느리게 퍼졌다.
생명의 이능을 가진 알렉스가 내 곁에서 머문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계속 희망을 품고 이에테르가 저택으로 찾아왔다.
그 소란에 요한은 결국 폭발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말도 없이 사라졌다.
납치는 아니었다.
전하지 않았을 뿐 사실 요한은 사람들 때문에 나를 데리고 도망친 게 아니었다.
그는 마족 지대의 도서관에 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식을 차리지 못한 나를 데리고 마족 지대로 간 거였다.
“자, 자, 자, 잠깐만! 마족 지대라고? 나 일어나면 마족성에 있는 거야?”
경악한 나는 워치를 풀어야 하나 고민했다. 거긴 말도 통하지 않고 날 죽이려 드는 이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워치를 풀기도 전에 12시가 돼 버렸는지, 시야가 어두워졌다.
“아, 안 돼…….”
나는 정신이 흐려지는 걸 느끼며 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
천천히 눈을 뜨자 포근한 촉감이 느껴졌다.
바닥에 깔린 보드라운 모포를 만지며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커다란 창밖으로 보이는 설산.
타닥거리는 모닥불.
익숙한 정경에 눈이 커졌다.
여긴 내가 마족 지대에서 지내던 방이었다.
“돌아왔어…….”
나는 침대 밖으로 다리를 뺐다. 밖으로 나가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방 안으로 들어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갈색 로브를 걸친 다람쥐 같은 남자가 날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의원이었다.
반가움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찰나 아쉬움이 밀려왔다.
아, 여긴 말이 안 통하지.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는데.
그런데 그때, 의원이 입을 쩍 벌리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띠링.
[특성 버프 ‘마족어 해석’ ON]
“[이, 이, 이! 일어났어!]”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 나는 흠칫했다.
아니, 잠깐만?
왜 말이 해석돼?
여기 마족 지대잖아?
[사계국과 마족 지대 연결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더 넓어진 세계관에서 2차 베타 테스트를 자유롭게 즐겨 주세요!]
AI가 놀이동산 직원처럼 해맑게 설명했다.
익숙한 목소리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것도 그리웠어.’
그때, 남자가 마구 말을 쏟아 내며 다가왔다.
“[와, 역시 난 천재였던 건가? 미쳤다. 미쳤어. 마족에 마물에 인간까지 치료할 수 있다니. 난 역사에 기록될 명의야.]”
“…….”
“[제1성 님께 알려야지! 하하, 그분도 아셔야 하는데. 사계국 놈들과 비교할 수 없는 내 이 천재성을!]”
……그동안 나한테도 이런 말을 해 왔던 건가.
캐릭터가 특이한 분이셨네.
흐린 눈으로 쳐다보는데 남자가 내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이거 동공 좀 확인해 봐야 하는데 말이 안 통하니 원. 손댔다가 오해 사면 제1성 님이 날 죽일 텐데.]”
“괜찮아요. 확인하세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에게 들이밀었다.
“[으아아아아악!]”
남자는 후다다닥 뒷걸음질을 쳤다.
“[뭐, 뭐, 뭡니까? 마족어를 어떻게?]”
횡설수설하는 남자에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아…… 공부했어요.”
“[뭐라고요? 몇 달 만에 그게 가능합니까? 천재세요?]”
남자의 눈동자에 호의와 호기심이 가득 찼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질문부터 했다. 의원을 다시 만난 것도 좋았지만, 요한을 먼저 만나고 싶었다.
“요하네스는 어디에 있나요?”
“[아, 제1성 님은 잠시 책을 가지러 가셨습니다.]”
“책이요?”
“[네, 돌아오신 후로 온종일 책을 읽으시거든요. 책을 가지러 가실 때만 자리를 비우십니다. 계속 옆에 있으셨어요.]”
의원은 내가 서운해한다고 여긴 건지 협탁 아래 가득 쌓인 책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 안에 책이 가득했다.
요한이 날 일으킬 방법을 찾으러 왔다는 건 알았지만, 막상 그 상황을 보니 울컥했다.
나는 도서관으로 갈 생각으로 일어섰다가 주춤했다.
“저기 의원님.”
“[네?]”
“밖에 위험할까요? 아무래도 다른 수호성 분들은 절 싫어하시니까…….”
날 죽이려 들지 않을까.
얌전히 그냥 요한을 기다리고 있을까 고민하는데 의원이 손을 마구 내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들 제1성 님이 만든 감옥에 갇혀 계십니다. 안전하게 지내실 수 있을 테니 마음 놓고 계십시오. 안정. 안정이 제일 중요합니다!]”
“감옥이요?”
“[예. 절대 나오지 못하는 감옥이죠.]”
의원은 멋쩍게 웃으며 창밖을 눈짓했다.
그곳으로 간 나는 경악했다.
설원 한가운데에 검은 바닥이 드러났고, 그 주변으로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건…….
마치 마법진처럼 넓게 펼쳐진 불기둥 안에 마족이 있었다.
나는 올림픽의 상징처럼 맞붙은 다섯 개의 불기둥을 흐린 눈으로 보았다.
“[제1성 님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신 건 처음이라 위협을 가하지는 않을 겁니다. 적어도 당분간은요.]”
의원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네.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이 상황이 굉장히 당황스러웠지만, 의원이 내 눈치를 보니 나는 안심한 척 웃었다.
의원은 오래 잠들었다가 일어났으니 묽은 수프를 먹어야 한다며 식당으로 갔고 나는 그가 나가자마자 탑으로 갔다.
그 도서관에 요한이 있을 테니 그곳으로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