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나이도 어린 게 왜 벌써 지쳐.”
쌩쌩하게 앞서 나가는 50대 부부를 따라 나온 나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바들바들 떨며 산을 올랐다.
“……매주 등산 다니는 분들이랑 비교하지 마세요.”
“엄살은.”
“경치 좋지 않니?”
경치고 뭐고 흙바닥밖에 안 보였다. 그래도 예의상 고개를 들어 숲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아빠가 웃으며 자랑했다.
“핸드폰으로 블로그 보는데 AI 추천 콘텐츠라고 사찰 방문기를 추천해 주더라고. 얼마나 반갑던지.”
이광필 씨는 자신이 본 게시글을 보여 주며 뿌듯해했다.
“아빠가 이 지역 살 때는 할머니랑 자주 왔었는데, 참. 하나도 안 변했어.”
사진은 겨울에 찍은 듯했다. 새하얀 눈에 파묻힌 기와와 돌탑. 사찰은 눈에 뒤덮여 윤곽만 겨우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늦여름. 울창한 수풀이 생명력을 뿜어 대고 있다.
“저기 봐라. 사진보다 더 예쁘지. 허허, 2년 만인가.”
나는 바닥을 기다시피 걷던 자세를 바로 세웠다.
눈에 담기는 정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산 아래 자리한 검은 기와와 붉은 기둥. 그리고 사찰 안에 호수처럼 고인 시원한 계곡.
여름국에서 본 화월궁의 모습과 비슷했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며 아빠는 신이 나서 사찰의 역사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러자 엄마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이어폰을 꺼내 TMI를 차단했다.
“주지 스님은 아직도 계시려나. 아빠가 그분을 정말 잘 따랐거든…….”
쏴아아아.
나뭇잎이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에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목소리가 사라졌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게임 디자이너가 이 사찰을 참고해 그렸을 수도 있잖아.
한국인 게임 디자이너가 만들었으니, 한국 사찰을 참고하는 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우연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다시 차분해졌다.
사찰 안에 들어서자 커다란 현수막과 물고기처럼 생긴 연등이 보였다.
여긴 분명 화월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꼭 경계 안에 들어선 사람처럼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느꼈다.
“아, 스님!”
아빠는 갑자기 웃으며 합장한 채 허리를 숙였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시는 스님이 아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분의 시선이 내게로 흘러왔다.
뜻 모를 미소를 지은 채 그분이 물었다.
“전에 말한 따님이시군요.”
“예.”
아빠는 멋쩍게 웃으며 긍정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찜찜했다.
밖에서 내 얘기를 좋게 했을 리가 없는데.
그분은 이 사찰의 주지 스님이셨다. 아빠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꽤 막역한 사이 같았다.
그분은 스님들이 지내시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 주셨다.
나는 마루에 앉아 스님이 내어 주신 차가운 차를 마셨다. 새콤하고 시원한 음료가 입안에 퍼지는 느낌이 좋았다.
그 덕에 잠시 일었던 상반된 감정이 무게의 추를 잃었다. 부정적인 것들은 깊이 가라앉아 모습을 감추고 오직 긍정적인 기분만이 느껴졌다. 상쾌하고 시원한. 그런 감각들.
찰랑.
그때 처마에 걸린 종이 바람에 흔들리며 귓가를 간질였다. 풀냄새 짙은 바람에 사찰 특유의 향 내음이 가득했다.
그 기분 좋은 감각에 집중한 탓에 나는 대화의 흐름을 놓쳤다.
한참 후에 아빠가 갑자기 내 어깨를 퍽 내리치고 나서야 움찔 정신을 차렸다.
“하하, 얘가 재주가 좋아서 앞가림은 잘하는데. 그래도 언제까지 재주에 기댈 수는 없죠. 다시 사회로 나가야 할 텐데.”
……이광필 씨 딸 하나 더 있나? 재주가 좋다니.
흐린 눈으로 보는데 엄마도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자랑을 하고 있었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칭찬도 아니다. 나를 대박 이모티콘 작가라고 오해한 그분들의 착각일 뿐.
#착각계가 왜 현실에서 또.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다 생각을 멈췄다. 꼭 이쯤에서 사람 속을 뒤집는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려온 진중한 목소리는 사려 깊고 현명했다.
“사회라는 개념은 주관적이지요.”
스님은 인지하게 웃으시며 덧붙였다.
“인간이 모이는 곳이 속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 그렇죠. 그렇죠!”
아빠는 황급히 맞장구를 쳤다.
스님은 맑은 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로 생각을 나누어 주셨다.
“흘러가는 대로 어느 한 곳에 모였다가 또 흩어지기도 하는 것이 인생사 아니겠습니다. 그러다 정이 가는 곳에 정착하고 또 떠나기도 하고.”
스님의 시선이 내게로 흘러왔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연스레 속할 자리를 찾으시게 될 겁니다. 아직 어리니 시간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한데요.”
아빠는 토 달고 싶다는 눈빛으로 스님을 보다 뒷말을 삼켰다. 그 속뜻을 이해했는지 스님은 허허 웃으셨다.
“앞가림을 잘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계속 믿음을 주세요. 아무리 귀하다 한들 자식의 시간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은근히 내가 복직하길 바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종교 권위자 앞에 데려와서 이런 말까지 꺼낼 줄은 몰랐다.
왜 일주일 내내 같이 등산을 가자고 계속 노래를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스님께서 내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 주시길 바란 모양이지만 스님은 내 편을 들어 주셨다.
그분은 부드럽게 입매를 휘신 채 나를 응시하셨다.
“그래요. 요즘 마음은 어떠십니까.”
오랫동안 수양을 해 온 분이라 그런가. 스님은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화법을 구사하셨다.
나는 따라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평온합니다.”
“그렇군요.”
“네가 언제부터 평온했다고.”
내가 스님을 따라 차분하게 말하자 이광필 씨가 대놓고 인상을 썼다.
나는 괜히 울컥해서 말대답했다.
“아빠도 은퇴하시면 알게 될 거예요.”
“참나. 애가 왜 저렇게 태평해진 건지.”
아빠가 기가 찬 지 눈을 흘겼다. 스님은 나를 이해하시는지 그 시선을 보고 허허 웃으셨다.
그때, 스님과 내 입 밖으로 동시에 답이 나왔다.
“이게 바로 잔고에서 나오는 여유라는 거죠.”
“속세를 벗어나 얻은 깨달음 덕분이겠죠.”
속세에 찌들어 타락한 나는 스님과 깊은 뜻을 함께하지 못했다.
마루에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엄마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손절했다.
“흠.”
스님께서는 찻물을 한 모금 머금으신 후에 물으셨다.
“그래요. 지금에 만족하십니까?”
“아, 네!”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맞을 것이다.
만족하고 있다.
아마도.
“정말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까?”
나는 그 질문에 혼자 움찔했다. 스님께서 말하는 건 다른 의미였을 텐데.
나는 나를 쳐다보는 엄마와 아빠의 시선을 의식하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돌아가고 싶어요.”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거짓말도 아니었다.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현실을 떠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나는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복직하길 바랐으면서, 정작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니 엄마와 아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지 못하는 것과 가지 않는 것은 다른 의미니까. 혹시 상처받은 게 아닐까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현실에는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현실을 가볍게 여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깊은 감정의 충족을 맛보아서일까. 나는 내가 경험한 세계를 떨쳐 내지도 못했다.
한참 침묵하던 스님은 내게 답을 주기는커녕 넌지시 물으셨다.
“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나 할까요?”
그 말에 아빠가 먼저 일어섰다.
스님은 사찰 안에 있는 호숫가를 한 바퀴 돌자고 제안하셨다.
나는 시끄럽게 떠드는 이광필 씨의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그러다 호수에 정신이 팔려 그곳에 시선을 두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시선을 트니 엄마와 아빠가 호숫가 근처에 있는 천막으로 가고 있었다. 천막은 연등을 접수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님과 둘만 남게 되었다.
매미 소리만이 간간이 침묵을 잘라 냈다.
그때, 스님이 웃음기가 스민 목소리로 운을 떼셨다.
“그래요.”
그분은 나와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셨던 건지 부모님이 자리를 뜨자 내게 말을 건네셨다.
그분은 아빠의 뒷모습을 보던 시선을 내게로 돌리셨다.
“정말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까?”
여긴 이광필 씨가 어린 시절부터 다닌 사찰이라고 했다. 산에 오르며 스님을 잘 따랐다고 자랑하던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 말은 사실이었나 보다.
스님 또한 아빠를 소중히 여기는 듯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딸의 속마음을 들어 보려 여기까지 나오신 걸 보면.
그 따뜻한 배려가 복잡한 머릿속에 엉켜 있던 불안을 풀어낸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다정한 그분에게 보답하듯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
“네, 돌아가고 싶어요.”
“그런데 왜 가지 않습니까?”
“가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신기하게도 말이 막히지 않았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이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나 보다.
“저는 지금에 적응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다시 돌아갔다가 쫓겨나면 그땐 정말 힘들어질 거예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저는 그 고생을 또 할 자신이 없어요.”
스님은 이해가 가지 않으셨는지, 침음을 흘리셨다.
“많이 힘들었다면 미련을 거둘 만한데, 왜 아직도 미련을 두는 겁니까.”
나도 계속해 왔던 고민이라 한숨처럼 웃음이 새 나왔다.
아직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나름의 결론을 얻었었다.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알고 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잖아요. 그래서 결핍을 느끼는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이 멋쩍어서 목덜미를 괜히 쓸었다.
“그냥…… 욕심이죠. 상처받기는 싫어하면서 또 결핍은 채우고 싶어 하고.”
두루뭉술한 말이나 스님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셨다.
말을 끊지도, 바로 말을 덧붙이지도 않고 침묵으로 내게 계속 말하기를 권하셨다.
그간 혼자 속으로만 고민해 왔던 생각이라 그럴까.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 것만 같은 사람이 내게 귀를 기울여 주니 답답한 폐부를 끌로 긁어낸 것처럼 시원해졌다.
곪아 터질 듯 고여 있던 말들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저는 지금도 좋아요. 그냥 가끔 허전함을 느낄 뿐인데…….”
말을 뱉을 때마다 입안에 바람이 고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더는 삶에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살던 시간을 하나 잃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소속되어 있던 공간이요. 회사, 네, 저는 거기서 벗어났잖아요.”
나는 혹시라도 그가 오해할까 황급히 말을 덧붙이며 웃었다.
하지만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스님은 고요한 눈으로 나를 보시며 깊은 숨을 삼키셨다.
어른들의 눈에는 그런 게 보이는 걸까. 불안을 웃음으로 숨기는 그런 잔재주 같은 게.
나는 깊은 시선이 요구하는 대로 다시 숨겨 둔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저는 그 삶도 필요한 거 같아요.”
한숨이 흘러나간 탓일까. 오랫동안 먹먹하게 가슴을 누르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미련이 남아서 그렇지요.”
스님은 내게 짧은 답을 주셨다.
그는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았다.
“미련은 한낮의 그림자 같습니다.”
웃음이 스민 목소리인데도 무겁게 들렸다.
“해가 높을 때는 짧아져 이제 곧 사라지겠다 싶은데, 어느 순간 다시 길어져 있어 영원히 떼어 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그에게 답을 구했다.
“어떻게 해야 미련을 버릴 수 있을까요?”
그는 허허 웃었다.
“그림자를 억지로 떼어 낼 수 없듯이 미련 또한 내 의지로 버릴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요.”
그는 허탈한 답을 주고는 다시 내게 말했다.
“물론 시간이 미련을 거두어 가길 기다리는 것도 좋지만.”
노승의 맑은 시선이 내게 다가왔다.
“미련이 남지 않게 끝을 보고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스님의 뜻 모를 미소를 응시하는데 멀리서 부모님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님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틀어졌다.
나는 몇 초간 더 그대로 있다가 호수의 반대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녹음에 둘러싸인 사찰에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매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