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퇴사한 이후 오랜만에 전 직장 동료들과 저녁을 먹었다. 자연스럽게 2차, 3차까지 달렸더니 술에 취했고 막차가 끊겼다.
“아. 택시비 아까워.”
어질어질한 정신을 잡으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익숙하게 택시비를 아까워하다가 아직 십수 억은 남아 있는 잔고를 떠올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택시비 정도야 뭐.”
누군가에겐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내게는 큰돈이었다.
그러니 부족함을 느끼면 안 됐다. 안 되는 걸 아는데도 나는 자주 공허함을 느꼈다.
깊은 감정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나는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현관 앞에 도착한 나는 눈을 찌푸렸다.
문 앞에 택배 상자가 있었다.
“뭐지. 내가 뭘 샀더라.”
마음이 허전해서 그런지 생각 없이 이것저것 사고 있던 터라 나는 의심 없이 내 이름이 적힌 상자를 안고 들어왔다.
대충 씻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상자를 뜯었다. 그리고 다시 상자를 닫고 송장을 자세히 읽었다.
분명 내 이름과 주소 게다가 연락처까지 제대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안에 든 물건은 내가 주문한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과일 로고가 박혀 있는 노트북과 태블릿 피시 그리고 워치였다.
심지어 새것도 아니다.
나는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뺨을 한 번 꼬집어 봤다.
“아!”
맨정신이다.
나는 노트북을 먼저 꺼냈다. 망설이다 전원 버튼을 누르니 설마 했던 의심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졌다.
이건 내가 쓰던 노트북이었다.
화면에 띄워 둔 메모장과 메신저 프로그램마저 그대로다.
“미친…….”
나는 욕을 읊조리며 다시 송장을 읽었다. 발신인 자리에 처음 보는 회사명이 적혀 있었다.
게임 제작사인가 했지만, 그 이름이 아니었다.
나는 송장에 적힌 회사를 검색했다. 하지만 그 회사의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이게 뭐야.”
그러나 내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입술을 깨물던 나는 우선 노트북에 내장된 인터넷 프로그램을 열어 봤다.
그러자 처음 게임에 접속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커뮤니티에 접속할지 묻는 하얀 창이 떴다.
떨리는 손으로 로그인을 했지만, 커뮤니티에는 아무런 게시글도 없었다.
그저 공지만 하나 떠 있을 뿐이었다.
제목: 2차 베타 테스트 일정 및 커뮤니티 재가입 기간 공지
지금으로부터 3일 뒤에 다시 커뮤니티 재가입을 받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이유는 2차 베타 테스트가 진행되기 때문이란다.
나는 바닥에 앉아 자세를 잡고 공지글을 자세히 읽었다.
2차 베타 테스트는 1차와 시간 비가 다르다고 적혀 있었다.
1차 베타 테스트처럼 잠든 8시간 동안 한 번에 게임을 완성하고 돌아오는 게 아니었다.
2차 베타 테스트는 하루에 한 번만 들어가서, 하루를 살 수 있었다.
다만 접속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적이었다.
매일 밤 12시부터 오전 6시까지.
단 여섯 시간 동안만 접속할 수 있었다.
그 여섯 시간 동안 게임 속에서는 오전 6시부터 밤 12시까지, 18시간을 지낸다고 했다.
시간의 굴절이었다.
현생에서 잠든 6시간은 게임 속 18시간이 되고, 게임 속에서 잠든 6시간은 현생의 18시간이 되는 구조였다.
그들은 이걸 ‘호접지몽’이라는 표현을 써서 설명했다. 꿈속에서 다른 삶으로 접속을 하는 거라 생각하라며.
내가 알기로 그들의 네이밍 센스는 최악이었는데, 그동안 많이 발전한 듯하다.
“취했나.”
나는 내가 이들에게 후한 평가를 내렸다는 걸 인지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정들었나.
아님, 취한 건가.
한숨을 내쉰 나는 계속해서 안내 사항을 읽었다.
그들은 기숙사 사감처럼 엄격했다. 밤 12시까지 들어오지 못하면, 다음 날에 들어와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렇기에 타임워프 기능 또한 플레이 되는 18시간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30분 회귀권도 18시간의 제한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시간 제약이 강해졌지만, 장점도 생겼다. 모든 유저가 비교적 공평한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2차 베타 베스트는 접속하지 않는 날에도 시간이 흐른다고 했다. 유저가 없을 때는 타임워프처럼 NPC가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유저의 자유를 최대화했다며, 1차 베타 테스트 이후 보완한 점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 긴 공지를 읽고 내려왔는데, 어이없게도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태블릿 피시에 첨부된 2차 베타 테스트 안내서를 참고해 주세요.』
……이렇게 길게 설명했는데 또 설명이 있다고?
『반드시 설명서를 읽고 신중하게 결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회사가 바뀌어서 그런가…….”
작은 글씨로 주의사항을 적던 인간들답지 않았다.
나는 원래 안내서를 대충 보는 사람이었지만, 이 게임에서 나온 이후로는 작은 글씨까지 세세히 보는 습관이 생겼다.
사실 2차 베타 테스트를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1차 베타 테스트가 끝난 후 현실에 다시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제야 겨우 적응하기 시작했는데,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손은 상자에서 태블릿 피시를 꺼내고 있었다.
머릿속 이성과 몸은 반대로 움직였다.
태블릿 피시를 켠 나는 실소했다.
“……웬일이야.”
지난 안내서와 다르게 이번 안내서는 글씨가 컸다. 심지어 그림과 영상 자료까지 첨부되어 있어서 쉽게 읽혔다.
나는 페이지를 넘기며 그들이 안내한 새로운 규칙을 읽었다.
우선, 화폐 개혁이 일어났다.
이제 사계국 통화인 골드를 시스템 통화인 캐시로 환전할 수 있다고 한다. 100골드에 1캐시로 환율 비도 명시되어 있었다.
타임라인은 무한대이자 제로.
내가 원한다면 죽을 때까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원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종료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전 유저가 동접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또한 모든 유저가 다 함께 [결]을 맞이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메신저에 표기되는 ON/OFF 사인으로 유저의 접속 여부를 확인하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도 랭킹 제도가 사라졌다. 남주에게 내장된 등급도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남주 시나리오가 유저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번 2차 테스트는 전보다도 더 유저의 선택이 미치는 영향이 커졌다.
2차 베타 테스트는 실시간으로 선호 키워드 추가와 삭제가 가능하니, 내가 원하는 대로 진행하기 편할 것이라고 쉬워진 난이도를 어필했다.
“너무 많이 달라졌는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몇몇 유료 기능도 무료로 변환됐다.
BGM과 장거리 메시지 기능은 언어와 승마 스킬처럼 필수 내장 스킬이 되었다.
눈에 띄는 변화는 그런 것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자세하게 달라진 부분을 설명했다. 신중하게 선택하라는 듯.
그랬다. 이건 선택권이었다.
나는 괜히 소름이 돋은 팔을 한 번 쓸었다.
예전에 버그가 내게 다가와 Y/N으로 나뉜 선택권을 주었던 순간이 떠오른 탓이다.
그들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모든 건 내 선택에 달렸다는 듯한 태도였다. 캐시를 준다며 클릭을 유도하지도, 20억을 준다며 행동을 자극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들의 세계를 설명하고, 최대한 많은 정보를 풀어 두었다.
만약 내가 1차 테스트를 하지 않았다면, 10페이지도 읽지 않고 접었을 재미없고 장황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는 천 페이지가 훌쩍 넘는 안내서를 계속 읽어 갔다.
희미한 새벽빛이 화면에 드리울 때까지 긴 시간을 집중했다.
안내서 마지막에 붙은 부록을 넘기던 나는 흠칫했다. 부록에 붙은 서문이 충격적이었다.
내가 사라진 이후에도 타임라인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뭐라고?”
부록 목차는 유저의 이름으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목차를 살피다 멈칫했다.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
나는 거기서 페이지를 더 넘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수많은 기억이 밀려온다.
다정했던 사람들과 무서웠던 마물들. 화려한 황성과 불타는 동굴.
잊지 못한 사람과 공간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생각이 길어질수록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가슴속 어딘가에 자리했던 진득한 감정이 묻어나온 듯하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후회 같기도 하고, 우울함 같기도 하고, 두려움 같기도 했다.
술에 취한 몸은 그 짧은 감정 소모에도 금방 피로를 느꼈다.
숨을 쉬는 것도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래도 잠은 오지 않고, 기억 속에 묻어 둔 감정은 끝도 없이 밀려왔다.
배려심과 이기심. 기쁨과 슬픔. 설렘과 죄책감. 허탈함과 성취감. 그 모든 감정이 어지럽게 뒤섞이다 하나로 엮여 들었다.
그리움이었다.
분명 여름인데, 혹한에 떨어진 것처럼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현실에 겨우 적응해 가던 마음이 이렇게 동요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희망.
나는 결국 다시 눈을 떴다.
바닥에 내려 둔 노트북의 화면이 보인다. 다시 그 사람들과 공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서 반짝였다.
그러나 그들이 건넨 선택권을 선뜻 수용할 수 없었다.
가상의 세계라 분리하려 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건 가상의 세계가 아니다.
인연이 이어지고 감정이 엮이고, 수많은 감각을 일깨우는 경험. 삶을 빗어 가는 실존하는 세계였다.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하나의 삶을 더 받아들인다는 건 아직 두려웠다.
내가 그 많은 사람을, 경험을, 감정을 수용할 수 있을까?
당장 들어가고 싶은 마음과 달리, 현실에 머무르는 몸은 조금 더 신중하라고 경고했다.
나는 피어오른 희망을 외면하며 그대로 누워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