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9. 재회
201화.
몇 번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다 일어났다.
잠에서 깬 지 오랜 시간이 지나 그런지, 빛에 익숙해진 눈은 아프지 않았다.
드르르륵.
블라인드를 걷자 높이 솟은 아파트와 무성하게 잎을 늘어뜨린 가로수가 보였다.
아침 6시. 여름이라 새벽이 아침처럼 밝았다. 벌써 맑은 파란색으로 빛나는 하늘을 보다 시선을 틀었다.
나는 부엌으로 나와 물을 마셨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켰다.
돌아온 이후 나는 틈만 나면 플랫폼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손가락이 익숙하게 배너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 캐릭터 시나리오 선공개]
내년 상반기에 출시 예정인 게임을 소개하는 배너 아래로 100개의 웹소설이 1위부터 100위까지 나열되어 있었다.
1위의 제목은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였다.
작품 소개에 간략히 키워드와 내용이 적혀 있고, 인기 예상작 1위라고 강조도 되어 있었다.
『사촌…… 오라버니?
“맹세하지. 그대가 평생 안온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이에테르가의 비에른 알폰스가.”
혹시…… 이거 근친물인가요?』
퍽.
나는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내던졌다. 그리고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아, 진짜 이건 아니잖아.”
왜 이 테스트에 참여했던 유저들이 조용히 있는지 알 것 같다.
절대로 내가 저 소설에 빙의한 주인공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사회적 자살이지.
정말 죽는 게 나을 거 같다.
제작진은 비밀 유지 서약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비밀을 지켜 달라고 애원을 해야 할 판이다.
근친물이냐니.
과거의 나야, 왜 그런 생각을 한 거니.
나는 울먹이며 핸드폰을 줍고 바로 화면을 껐다.
이미 여러 번 던져서 이리저리 깨진 화면에 금이 하나 더 생겼다.
“폰부터 바꿔야지.”
한숨을 쉬는데 뒤에서 벌컥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삐걱거리는 목을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 눈을 부릅뜬 중년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너!”
나는 빠르게 내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간발의 차이로 나를 놓친 이광필 씨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이 자식! 너 그 돈 어디서 났는지 말 안 해?”
쾅쾅쾅.
다들 한 번쯤 그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로또 1등에 당첨이 된다면 가족에게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나는 알리지 않고 용돈이나 자주 드리며 월급이 오른 척하려고 했다. 그러나 큰돈을 만져 본 적이 없는 나는 용돈을 송금하다 실수를 했다.
술 먹고 2백만 원을 보내려다 0을 잘못 눌러 2억을 보냈다.
내가 벌써 2억이나 모았을 리 없으니, 이광필 씨는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었다.
얘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갑자기 억대 유동성 자산이 생긴 걸까.
그는 결국 공권력을 사용해 비밀스럽게 내 소득 출처를 알아냈다.
“너 왜 플랫폼에서 20억이나 받은 건데! 내가 그 플랫폼 세무조사 들어가? 엉? 빨리 말 안 해?!”
쾅쾅쾅.
“딸이라고 하나 있는데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어어?! 빨리 말 안 해애애애?! 무슨 짓 한 거야!”
말은 저렇게 해도 이광필 씨가 이유 없이 사기업에 공권력을 남용할 사람도 아니고, 매일 아침 홍삼을 챙겨 먹으며 누구보다 건강에 진심을 보이시는 분이 쉽게 목숨을 버리실 리도 없었다.
나는 일단 변명을 피하고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로판 소설에 들어가서 ‘이거 근친물인가요?’ 같은 생각을 하며 놀다가 20억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잖아.
나는 잠시 부모님께 진실을 고백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냥 죽자.
진짜 이광필 씨가 그것까지 알아내면 죽자. 왜 살아. 살아서 뭐 해.
“문 안 열어! 으억!”
“아우, 아침부터 또 시끄럽게 왜 이래. 아랫집 할아버지 또 올라오셔.”
엄마는 아빠의 등짝을 세게 때리고는 조용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얘도 생각이 있겠지. 그걸 왜 못 기다려 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20억을 누가 쉽게 줘! 저거저거 사기당한 거 같단 말이야.”
“아니야. 요즘 MZ 애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쟤들은 부수입으로 억대 쉽게 번대.”
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놀랐다. 엄마는 별말을 하지 않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혼자 뭔가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때, 핸드폰을 톡톡 건드리는 물방울 효과음이 들렸다.
“이거 봐. 당신이 말한 플랫폼 말이야. 여기서 콘텐츠 만들고 억대 수익 올리는 애들이 많대.”
“나도 알아봤지, 근데 그 플랫폼은 만화랑 소설로 돈 버는 거라는데, 쟤가 무슨.”
이광필 씨가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딸을 객관적으로 평가했다.
“쟤가 그림을 잘 그려, 글을 잘 써? 이거 수상하잖아.”
“아니야, 꼭 그런 것도 아니래.”
“무슨 소리야?”
또 뿅 하는 효과음이 들렸다. 엄마가 핸드폰 화면을 누른 듯했다.
그러자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부업으로 억대 연봉 벌기, 부연 채널의 부자입니다. 영상 감상 전에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릴게요.”
너튜브를 켠 모양이다.
나는 눈이 흐려졌다.
엄마가 시도 때도 없이 너튜브 링크를 공유하는 걸 보고 자주 너튜브를 본다는 건 알았지만, 부업 채널을 구독하는 줄은 몰랐다.
“이건 제 정산서인데요. 이모티콘을 등록하고…….”
낭랑한 너튜버의 목소리가 새벽의 적막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봐봐, 센스가 중요하대. 이 친구도 그림 배운 적 없고, 글도 써 본 적 없는데 이모티콘 대박 쳐서 며칠 만에 몇 억을 벌었대.”
“잠깐만! 이거 얘가 자주 보내던 이모티콘 아니야?”
“그러니까. 그때 단톡방에서 왜 이모티콘에 자꾸 돈을 쓰냐고 했더니 쟤가 뭐라고 그랬어?”
이광필 씨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이모티콘 작가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하냐고 따졌지?”
“그래. 이모티콘 작가님들이 얼마나 돈 잘 버는지 아느냐고. 자기 친구들은 이 작가님 거 출시되기 무섭게 산다고 화냈었잖아.”
이른 새벽.
남의 방 앞에서 떠드는 부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손가락 두 마디 두께 정도 되는 문 앞에서 흐린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당신들 딸에게는 그런 센스가 없잖아요.’
그러나 으레 부모님들이 그렇듯, 그 중년 부부의 눈에도 단단히 필터가 끼어 있었다.
사실은 내 자식이 천재였을지도 모른다는 착각 필터.
한참 침묵이 이어진 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너 진짜 이모티콘인지 뭔지 그거 그렸어?”
도덕 선생님의 차분한 목소리에 설득됐는지 이광필 씨가 누그러진 태도로 물었다.
“어휴, 또 재촉한다. 기다려 봐. 어련히 알아서 말해 주겠지.”
엄마가 다시 한번 핀잔을 주자 이광필 씨가 구시렁거리며 물러났다.
거실에서 뉴스 소리가 흘러나오고, 엄마 아빠가 출근 준비를 시작하는 소음도 들려왔다.
“…….”
말이 되냐고.
내가 그렇게 센스 있는 인간이면 두 분이 몰랐겠냐고.
딸에 대해 조금도 모르는 부모님을 보며 나는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하.”
그래도 일단 두 분의 오해를 내버려 두기로 했다.
저것도 언젠가 밝혀지겠지만, 지금은 내가 소설에 빙의해서 정신 놓고 놀았다는 걸 들키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어차피 일찍 일어난 김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포털 창을 켜 검색을 했다. 나는 몇 달째 비슷한 것들을 검색하고 있었다.
플랫폼과 게임 제작사였다.
알아보니 플랫폼은 게임을 직접 제작하지 않고 외주를 맡겼었다. 제작사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는데 AI 쪽으로는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나는 턱을 괴고 마우스 휠을 내렸다.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현실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플랫폼이 게임 제작사와 외주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외부자인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기사 자체도 플랫폼 측 보도자료인지 합의하에 가상현실 게임 공동 연구를 그만두었고, 대신 투자금은 회수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플랫폼은 게임 제작사 없이 자체적으로 를 내년 상반기에 출시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게임 소개와 출시 일정에 관한 내용이 더 자세한 걸 보면 분명 플랫폼 측 홍보 기사였다.
나는 한동안 플랫폼과 제작사를 시간 단위로 검색했었다.
도무지 현실에 적응할 수 없어서.
내가 있던 곳이 가짜가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많은 정보를 읽어도 나는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진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심지어 나는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오직 표면적인 홍보 기사만 접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자주 올라오지 않았다.
통장에 20억이 입금됐을 시기에 플랫폼의 주가가 떨어졌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리고 몇 주 후에 게임 제작사에서 인간처럼 감정을 가진 AI를 개발해 국제 학술지에 실렸다는 기사가 나왔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작사 대표가 학계의 윤리 위원회에 소집을 당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 세계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철저하게 외부인이었다.
어떠한 정보도 제대로 얻을 수 없었다. 제한된 정보로 알아본 건 고작 그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포기하게 됐다.
시간 단위로 검색을 하던 습관은 나절 단위로, 하루 단위로 바뀌었고 이제는 컴퓨터를 켜고도 다른 일을 먼저 하기도 했다.
그 사실을 다시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결국 잊혀지고 있다.
처음엔 그 공허함을 절대 채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현실은 꾸준하게 그 빈 공간을 채웠다.
내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현실을 잠시 잊었던 것처럼, 돌아온 현실은 제 시간을 밀어 넣으며 그곳의 기억을 밀어냈다.
과거의 추억은 현실에 쉽게 잡아먹혔다. 나는 그걸 인지할 새도 없이 오늘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