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도착했습니다.]”
눈을 뜨자 하얀 성이 눈에 들어왔다. 얼음으로 만든 성이었다. 나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성을 보며 입을 달싹였다.
“……저길 올라가야 하나요?”
말 그대로 하늘에 닿을 듯 높은 성이었다. 저걸 올라갈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요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깍지를 끼며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는 순간 바닥이 떠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기분이 아니었다. 눈 바닥이 구름처럼 부드럽게 떠올랐다.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꼭대기에 달린 거대한 창문까지 순식간에 도착했다.
이능을 쓰는 이들의 삶은 참 편하구나.
나는 발을 떼다 흠칫했다. 아래에서는 창문으로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아예 벽 하나를 날린 거였다.
그러니 넘을 필요 없이 걸어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얼음 성은 모순되게도 포근해 보였다. 바닥에는 양털 카펫이 깔려 있고, 한쪽에는 거대한 벽난로가 있었다.
불의 이능은 얼음의 이능을 녹였다. 그런데 저 벽난로의 불은 얼음을 녹이지 못하는 걸 보니, 이능이 아닌 평범한 불같았다.
바닥에 깔아 둔 양털 카펫이나 담요 또한 직접 가져온 걸 거다.
나는 물끄러미 요한을 쳐다봤다.
오전 내내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이걸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걸 왜 준비한 거지?
왜 여기에 왔는지 물으려는데, 요한이 내게 카펫 위로 앉을 것을 권했다.
나는 일단 그가 권한 대로 바닥에 앉았다.
시야가 낮아지자 트인 창밖의 세상이 눈에 담겼다.
“와.”
달빛에 어스름히 빛나는 사계절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겨울국과 3국의 경계였다.
겨울 산 아래로 뻗은 세 갈래의 산맥. 색채는 보이지 않지만, 설산 아래로 이어진 강력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환한 달빛에 드러난 사계절의 모습은 꼭 아득히 먼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다 요한에게 물었다.
“왜 여기로 온 거예요?”
“[데이지는 시끄러운 걸 싫어하지 않습니까.]”
“제가요?”
“[사람들 틈에서 화약 냄새도 맡고 소음을 듣는 것보다.]”
그는 모포 아래 있던 향초를 꺼내 불을 붙였다.
“[좋은 향기를 맡으며 조용히 바깥을 보는 걸 좋아하잖아요.]”
요한은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 초를 두었다.
신선한 겨울 공기 속으로 라벤더 향기가 은은히 퍼져 갔다.
그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는 절 위해 나가 주었으니, 이번엔 데이지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어떤 정경을 가장 좋아할지 몰라 사계국이 한눈에 보이는 곳을 찾았고요.]”
뿌듯함이 묻어나는 표정에 웃음이 새 나왔다.
“고생했겠네요.”
진심이었다.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이런 걸 다 구하려면 정말 고생했을 거다.
그는 입매를 한 번 길게 늘일 뿐 부정하지 않았다.
이곳은 아주 조용했다. 타닥거리는 벽난로 소리만 이따금 들려올 뿐.
달빛 아래 자리한 사계절의 모습 또한 동화 속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마음을 포근하게 했다.
평온하다.
그때, 손으로 약력이 전해졌다. 요한이 맞잡은 손에 힘을 준 모양이었다. 요한은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 입을 달싹였다.
“[사실은.]”
낮은 목소리가 적막을 밀어냈다.
“[늘 어딘가로 사라질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그는 단어를 고르는지 천천히 말했다.
“[다르다는 것도, 그 차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이해하는데.]”
작은 한숨 소리가 잠시 말을 끊었다.
“[노력해도 자꾸 욕심이 나서 마음을 다스리는 게 어려웠습니다.]”
요한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래도 기다리겠습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 또 해야 할 일이니까.]”
나는 그제야 요한이 왜 나를 여기에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전에 내가 물었던 말을 계속 신경 써 온 듯하다.
만약에 내가 사라지면 어떨 거 같냐고 물었던 그 질문.
그때도 요한은 같은 말을 했었다.
잊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맹세했으면서 뒤에서는 또 고민하고 있었나 보다.
한눈에 담기는 사계절을 보고 있으니 이 세상이 좁게 느껴진다. 다음 생이 어디에서 시작된다 한들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만나게 될 것처럼. 나는 요한이 굳이 여기로 온 또 다른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 생에 저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번 생처럼 또 노력할 테니까.]”
어둑한 공간 속으로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을 힘들게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붉은 입술에서 나온 말이 따스하게 고막을 움켜쥐었다.
나는 시선을 피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웃으실 줄 알았는데.]”
“……웃고 있어요.”
나는 내 표정이 엉망일 걸 알면서도 우겼다.
요한은 조용히 있었다. 모른 척해 주는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요한은 손으로 내 뺨을 쓸었다. 그리고 제 쪽으로 내 고개를 돌리더니 장난치듯 내 입꼬리를 손끝으로 눌렀다. 그러자 움푹 팬 보조개를 따라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당황해서 미간이 찌푸려졌다. 요한은 그 인위적인 미소가 마음에 드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겨요?”
“[네.]”
“안 웃긴데.”
“[어떻게 해야 웃게 만들 수 있을까요? 웃게 해 주고 싶은데.]”
요한은 심각한 척 표정을 지웠지만, 입꼬리는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실소가 나왔다.
헛웃음을 흘리자 요한이 따라 작게 웃었다. 모든 웃음이 지워지고 다시 침묵이 시작될 때쯤 요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와 줘서 고마워요.]”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요한을 응시했다. 달빛이 스민 부드러운 윤곽이 눈에 담겼다.
처음 요한을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반짝거리는 머리칼이나 어둠에 대조되는 하얀 얼굴이 별처럼 환하게 느껴졌다.
보고 있으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나는 그가 주는 평화로운 감각에 잠식되었다.
겨울바람을 타고 흘러온 향 내음 때문일 수도 있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간지러운 온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떠한 이유 때문이든 불안한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뺨이 팽팽해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입꼬리가 스스로 올라갔다.
그때, 요한의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갔다.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 위로 은빛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 작은 움직임이 보일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내 따스한 숨이 입가에 닿았다. 그는 입술을 맞댄 채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입안을 파고드는 부드러운 숨을 삼켰다. 그 숨이 달았다.
잠시 후에 숨으로 전해지던 미약한 온기와는 결이 다른 열기가 전해졌다.
그런데도 그는 만족스럽지 않은지 고개를 기울였다. 뜨거운 살점이 더 깊이 얽혔다. 그는 모자란 숨을 채울 때만 잠시 입술을 떼어 냈다.
어느새 내 목덜미를 받치던 커다란 손이 목선을 타고 어깨로 내려왔다. 그 가벼운 손짓이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몸이 예민해졌다.
두툼한 겉옷이 벗겨지고, 한 겹 한 겹 아래로 떨어지는 천 자락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맞붙은 살갗으로 전해져 오는 온기 탓일지도 모른다.
요한은 고개를 내려 쇄골에 입을 맞추었다. 설원에서 이능을 전해 주던 긴박한 몸짓과 달랐다.
아주 느리고 여유로웠다.
그러나 자극은 그 어느 때보다 깊었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뜨거운 열기가 깊숙이 밀려왔다.
그는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처럼 천천히 행동했다. 나는 그게 애가 탔는데, 그는 나를 따라 성급히 굴지 않았다.
곧 이능인지 쾌락인지 모를 것들이 가득 들어찼다. 손에 닿은 얼음 바닥이 미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몸에 열이 올랐다.
나는 더 이상 시간이 흐르는 걸 느낄 수 없었다.
***
요한이 몸을 들썩이는 바람에 고개가 들렸다. 그러자 바로 눈이 마주쳤다.
아득히 멀어졌던 감각들이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한쪽에 개어 두었던 새로운 모포를 펼치며 입매를 휘었다.
“[추울 것 같아서요.]”
요한은 진심인지 하얀 모포를 내 어깨에 둘렀다.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땀에 젖은 몸을 털로 감싸는 게 어이가 없었다.
“……추울 리가 없잖아요.”
미소를 지은 요한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모포 끝을 내 어깨에 묶어 단단히 고정했다.
“[금방 추워질 겁니다.]”
이해 못 할 행동은 아니었다. 밖에서 찬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순순히 모포 자락을 잡았다. 벌어진 틈을 꼼꼼히 여미는데 앓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요한이 헛웃음을 흘리며 내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왜 웃어요?”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허탈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늘 어머니를 찾아 동면에 들려고 노력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에 뺨을 붙였다. 머리 위로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가 내려앉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대답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그대로 다시 다물었다.
나도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그러나 나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트인 벽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듯했다.
남색 하늘의 끝자락에 벌써 빛이 스미고 있었다.
나는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하늘을 보다 뒷머리로 파고든 손길에 몸을 맡겼다. 자연스레 이끌려 간 몸이 단단한 품에 기대졌다.
그때, 눈앞에 검은 창이 드리웠다.
[타임라인이 만료됐습니다. 게임을 종료합니다.]
종료 공지였다.
마음의 준비를 해 왔지만, 끝을 마주하니 몸이 움찔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잡고 있던 요한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당황할 틈이 없었다.
“윽.”
사위가 어둠에 물들며, 공간이 갈기갈기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뺨을 간질이며 스친 바람이 손길처럼 느껴진다.
녹아내리는 눈처럼 모든 것들이 사라져 갔다.
괜찮아.
끝날 걸 알고 있었잖아.
괜찮아, 그냥 돌아가는 거야.
나는 끝을 외면하듯 눈을 감았다.
한참 후 얼굴을 간질이던 바람이 사라졌을 때 다시 눈을 떴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욱한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세상에서 분리된 듯한 커다란 상실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시스템은 그런 반응을 무시하듯, 어둠 위로 상태창을 띄웠다.
[평가를 위해 유저의 [기]-[승]-[전]-[결]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어둠이 쪼개지듯 사방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실처럼 나풀거리던 빛은 마구 뒤엉켰다. 그 빛은 틈이었다. 내가 지내 온 시간들이 고인 틈. 빠르게 지나가는 장면들은 제멋대로 합쳐졌다가 찢어지길 반복하며 하나가 되어 갔다.
나는 여러 갈래의 빛을 응시하며 이것이 결말임을 깨달았다.
마구 뒤엉킨 것들은 제대로 풀어지지 못하고, 꾸역꾸역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격렬하게 저항하며 나풀거리던 빛들이 끝내 패배를 인정하듯 하나씩 바닥으로 툭툭 쌓여 갔다.
그러나 아직은 보여 줄 수 없다는 건지, 상태창이 다시 시야를 가렸다.
[유저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의 데이터가 모두 업로드되었습니다!]
가로로 길게 늘어진 하얀 빛들이 빠르게 쌓여 갔다. 촤르륵. 소음과 함께 팡파르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유저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의 최종 랭킹은 1위입니다.]
1위.
가장 높은 순위를 받았는데 와닿는 기쁨은 없었다.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숫자가 빠르게 사라졌다.
상태창은 계속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취향을 꼭꼭 담아 선택해 나가는 스토리 게임 ! 어떠셨나요? 즐거우셨나요?]
명랑한 목소리가 테마파크의 직원처럼 낭랑하게 마무리 멘트를 읊었다.
[그동안 와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현실에서도 타인의 취향이 아닌 나의 취향으로 선택해 나가는 즐거움이 이어지길 응원하겠습니다.]
상태창은 금빛 윤곽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자 불투명하게 가려져 있던 빛들이 보였다. 얇게 쌓인 하얀 빛이 상태창의 금빛 윤곽 안에 들이찼다.
그것은 마치 금색 커버에 갇힌 페이지 같았다.
금빛 윤곽이 좁아지며 책은 작은 점이 되어갔다.
끝내 모든 게 사라지는 순간 나는 무언가가 끊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게는 너무나 갑작스럽고 허무한 [결]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직 나는 [결]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