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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99화 (200/208)

199화.

평생 여기서 살 수는 없다는 건 나도 안다. 밖에 현실이 있고, 소중한 사람과 내가 쌓아 온 삶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이 시간을 살아 버렸는데 이 시간은 어떻게 버려야 할지 모르겠다.

새로이 소중한 사람을 만났고, 행복한 기억도 이렇게 많이 생겼는데.

나는 누군가를 사랑해 설레었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꼈고, 대가 없이 받는 따뜻한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여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쫓아내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동안 나는 최선을 다해 외면해 왔다.

다시 나가서도 적응할 수 있고, 이 감정들을 가볍게 잊어버릴 수 있다고.

오만한 생각이었다. 나는 분명 평생 이곳을 기억하게 될 거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이 시간을 그리워하며 지내게 될 거다.

문득 작은 나뭇잎이 어깨에 내려앉은 것처럼 미약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알렉스가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피식 웃었다.

“저기 그대의 개가 오네.”

알렉스는 나를 내려다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또 싸우면 그대가 내게 화를 낼 테니, 나는 상처받기 전에 돌아갈게.”

그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또한 그대를 아껴. 그대가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

“그건 부디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알렉스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알렉스가 사라지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그가 기둥 뒤로 사라졌을 때쯤,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을 한 겁니까?]”

뒤를 돌자 미간을 찌푸리는 요한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한은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평소라면 모른 척 물러나곤 했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눈앞으로 긴 손가락이 다가왔다. 넋을 놓은 탓에 흘린 줄도 몰랐던 눈물이 요한의 손길을 따라 닦여 갔다. 곧 요한의 눈동자가 알렉스가 사라진 곳으로 움직였다.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전하는 나쁜 말 안 하셨어요.”

“[감싸 줄 필요 없습니다.]”

“감싸는 게 아니라 진짜예요.”

“[그런데 왜…….]”

나는 요한의 말을 잘랐다.

“좋은 말씀을 해 주셔서 감동해서 그래요.”

사실이었다.

누군가에게 나를 아끼고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나?

이렇게 깊게 마음에 박혀 오는 걸 보니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소중히 여겨지는 마음은 쉽게 넘길 수 없는 감정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나는 입을 다문 요한을 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저는 알렉스 전하가 괴롭힌다고 울 만큼 약하지 않아요.”

이것도 사실이다. 세상에 너무 강한 사람이 많아서 그렇지, 나는 누가 괴롭힌다고 울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요한은 그제야 손을 거두었다. 나는 멀어지는 요한의 손가락을 보다 시선을 조금 더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무언가가 얽혀 오는 바람에 시선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요한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살며시 내 손을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데이지.]”

“네?”

손을 쥐었다 폈다 망설이던 그가 겨우 말을 꺼냈다.

“[오늘 제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시간이라는 단어가 크게 다가왔다. 내게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고개를 드니 요한이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시간이 남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 시간을 요한과 보내고 싶었다.

요한의 눈동자에 잠시 밝은 빛이 돌았다. 미묘하게 입꼬리 끝도 올라갔다.

그는 성벽 너머 숲 쪽을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내려 눈을 맞췄다.

“[보여 드리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뭘 준비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대체 뭐길래 요한이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지 호기심이 들었다.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연회 끝나고 같이 가요.”

“[연회는 얼마나 걸립니까?]”

“길지 않을 거예요.”

다들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금방 끝내고 돌아갈 거다.

요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회 준비가 모두 끝나고, 마지막 연회가 시작되었다.

***

타임라인의 마지막 날인 오늘, 대부분의 유저들이 연회에 참석했다.

나는 완성된 카드를 자리에 놓으며 영애들과 동행한 이들의 이름을 읽었다. 성이 같은 가족도 있었고, 연관성을 느낄 수 없는 이름도 있었다.

익숙한 이름들도 눈에 담긴다. 시에나, 라리사, 아리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나누어 준다는 건 큰 배려였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리안을 돕기 위해 모였다.

나는 입가에 따스한 웃음이 번지는 걸 느꼈다.

이곳을 나가면 무엇보다도 이들을 잊기 힘들 것 같았다.

“[도와줄까요?]”

이미 한차례 거절했는데도 요한이 다시 물었다.

“아니요. 헷갈리면 안 되니까 제가 할게요.”

마지막 연회는 날씨마저 좋았다.

깨끗한 밤하늘 아래로 적당히 달궈진 따스한 바람이 살랑였다. 안젤리카가 불의 이능으로 홀에 열기를 채워 두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참석자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리안이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오늘 리안은 아마 인생에서 가장 바쁜 하루를 보냈을 거다.

오전에 그녀는 남주와 연못에 빠졌다가, 황성에서 옷 주문을 받고, 마왕에게 납치를 당하고(사실은 마왕이 리베라의 명령으로 그녀에게 길 안내를 해 준 거지만), 남주에게 구해졌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데 리안은 그 살인적인 스케줄을 모두 소화했다.

짝짝짝. 뭉클한 눈으로 대견한 리안을 쳐다보는데 누군가 박수를 쳤다. 아리나였다.

“으윽.”

황족 테이블에 앉은 그녀가 인상을 썼다. 옆에 있던 라리사가 발을 밟은 모양이었다. 라리사는 눈짓으로 시선을 끌지 말라고 핀잔을 주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그때, 프리마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신을 소개해 주는 연회 담당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래를 시작했다.

맑은 피아노 음과 깊은 현악기 연주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가 얽혀 들었다.

몇몇 참석자들이 홀린 듯 일어나 무대로 나가자고 파트너에게 청했다. 하지만 대부분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리안이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었다.

우리는 마지막 날, 동료가 [결]을 완성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말랑말랑한 분위기 사이로 경쾌한 폭발음이 들렸다.

팡.

색색의 빛 가루가 하늘을 수놓으며 아름답게 밤을 장식했다.

“와아.”

불꽃이 터질 때마다 함성과 웃음소리가 밀려왔다.

그 모습에 잠시 넋을 놓고 있는데 리안의 비명이 들렸다.

“꺄악!”

무대 한가운데 서 있던 리안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나뿐이 아니라 모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리안이 떨리는 손을 내렸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리안의 입꼬리는 계속 하늘 높이 올라갔다.

“저 다 채웠어요!”

그녀는 모두에게 외쳤다.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뜻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한 이들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단 축하하듯 손뼉을 쳐 주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녀의 말을 이해한 이는 아마 79명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중 한 명이라 행복했다.

모두가 [결]을 완성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 사실에 울컥했다.

마지막 날이라 감정 제어가 잘되지 않나 보다. 나는 진정하려 애쓰며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돌아오던 시선은 옆 테이블에 있던 디아나에게 걸렸다.

그녀가 너무나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리안이 결을 완성했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한 모양이다.

그녀는 미소를 띤 채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혼자 감동했다.

정말로 나는 이곳을 잊지 못할 것이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애정. 이 단단한 연대를 또 경험할 수 있을까?

프리마돈나는 노래를 마치고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다 할 인사 없이 손을 한 번 흔들고는 사라졌다.

그 작별의 손짓을 기점으로 유저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공지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했지만, 정확히 몇 시에 타임라인이 끝나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자정에 끝날지 혹은 아침이 와야 끝날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이제 모두 제 시간을 가지고 싶어 했다는 거다.

초가 하나둘 꺼지는 것처럼 참석자들이 사라져 갔다.

나는 시야로 담기는 끝의 시작을 보며 희미한 상실감을 느꼈다.

그때,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는 사람들이 있네요.]”

요한이 홀을 보다 내게 시선을 내리며 물었다.

“[이제 나가도 되는 겁니까?]”

미약한 기대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는 안 되는데, 오늘은 괜찮아요.”

“[왜 오늘은 괜찮은 겁니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몸을 일으켰다.

“가고 싶다고 한 곳은 어디예요? 여기서 멀어요?”

요한은 아직 해소되지 않은 호기심 탓에 찜찜한 눈을 했지만, 순순히 나를 따라 일어났다.

그는 적응이 빠른 사람이었다. 금세 그의 입가에 어색한 웃음이 어렸다.

“[사실 조금 멉니다.]”

그는 로브 주머니에서 두 장의 스크롤을 꺼냈다.

낡고 빛바랜 스크롤이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65년이나 지났는데, 지금도 효력이 있을까요?”

요한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써 보면 알겠죠.]”

무책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면서 요한의 손끝에 걸린 작은 종이를 잡았다. 낡은 스크롤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사위가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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